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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뭐라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가을날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곧 겨울, 아득하게 느껴져봐야 어느새 턱까지 치민 세월들을 어찌할까나...  

소년은 쉬이 늙는데, 중년은 더 빨리 늙는 이 세월의 역설이라니. 느느니 푸념이요, 먹자니 나이뿐이로다!!

 

  1. 이 책은 어쩌면 '윤리학 서적'에 포함되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내냍는 이산화탄소가 지구를 비닐하우스처럼 덥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생때였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란 것이 지구의 것을 조금씩 소비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기후변화와 석유의 고갈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어느 누구도 심각하게 다음 세대 이 후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과학서가에 꽂혀 있는 이런 책들이 윤리학 책들 사이로 옮겨질 때 쯤 나는 참으로 무책임했던 기성세대의 일원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지구-윤리와 관련하여 공부를 해야 한다. 나부터. 

 

 

 

2. 일종의 유행상품에 이름을 달다 

  

우리가 복지국가를 말하고자 할때 굳이 그것의 주인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비그포르스라는 낯선 이름을 들었을 때 이사람이 궁금하다고는 생각했다. 잠정적 유토피아로서 복지국가와 영원히 잠정적인 유토피아가 되어버린 현대 복지국가의 명암은, 어쩌면 정책에서부터가 아니라 사람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모두가 복지국가를 바란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비그포르스가 될 필요는 없다. 

 

 

 

3. 제국과 다중, 그 세번째 악장 

 제국에서 다중으로, 그리고 다중과 제국으로. 

21세기는 바야흐로 네그리의 시대다. 수많은 논쟁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현존하는 정치이론가이자 활동가. 

제국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다중이, 합쳐진 제목처럼, 수미일관하게 연결될까? 제국을 읽고도, 다중을 읽고도 해결되지 않았던 궁금증이 풀리게 되려나.

 

 

 

 4. 태초에 인간은 줌 이었다.

 

 소유권이라는 것이 종교의 경전처럼 여겨지는 시기는 불과 2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세속의 욕심이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 짐이 된다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고, 그 전에는 물질을 줌으로서 비물질적인 것을 얻는 시기가 있었다. 

이 책은 '증여'를 다루는 거의 모든 책에서 언급되는 책이지만, 정작 그 본 내용을 볼 수 없었던 책이었다. 나왔으니 다행이다. 

 

 

 

5. 부처는 부디스트가 아니다

 

사회사상은 이즘으로 변하면서 신도를 얻지만, 태초의 심상을 잃는다. 아마 대표적인 것이 이땅의 기독교일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누구도 예수가 되려고는 하지 않는 모순. 

토막글을 통해 박노자 선생이 전해준 부처의 모습도 그러했다. 부처는 호국과는 상관이 없으며 살생과는 더더욱 상관없고, 가진 것과는 철저하게 결별했지만 불교는 그렇지 못하다. 

부디스트가 아닌 부처의 모습이 어떨지, 박노자 선생이라면 기대할만 하다. 

 

첫 눈이 오면, 지난 세월의 무게만큼 맞아주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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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1-09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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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네번째 손
존 어빙 지음, 이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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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배달사고의 산물이다. 인문쪽 서평단인 내게 이 책은, 마치 어느 날 손을 잃은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우선, 재미있다. 어쩐지 폴 오스터도 그렇고, 비슷한 연배의 미국 작가들 책을 보면 굉장히 수다스럽다는 느낌을 받게 될 때가 많은데 이 역시 그렇다.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 자체는 하나도 복잡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스포일러의 문제가 있기에 언급하기 어렵지만, 단 한 줄이면 이 책의 줄거리는 끝난다. 하지만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꾸불꾸불한 선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시종일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 전개는 군더더기가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그렇지만, 통상 소설을 볼때에도 언제나 감정을 이입할 대상을 찾게 된다. 그래야 활자가 쉽게 이미지화되고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책에 나오는 누구와도 이입을 할 수 없었다. 그만큼 나의 정서와는 이질적이었다고 할까. 

왜 이다지도 섹스와 임신에 연연하는가? 

어쩌면 이렇게 어이없는 방송이 있는가? 

그들의 관계라는 것도 이 처럼 허무맹랑한가? 

이런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가볍게 튕겨오르는 농담들은 시종일관 유쾌했고,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진진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란 사람이 살아온 과정도 왜, 어쩌면, 이처럼이라는 의문형을 달고 산 인생이 아니었나라는. 

관계에는 충족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고, 그것은 늘 엇나가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인생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결국은 마음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지 않을까. 

낯설게 찾아온 존 어빙의 소설은, 폴 오스터의 소설들이 꽂힌 서재의 한켠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나이를 먹고 부산영화제나 갈 일이 있을때 한번 가지고 가서 읽어 볼까 싶다. 그때쯤이면 지금보다는 어처구니를 찾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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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파인만 Feynman
짐 오타비아니 지음, 이상국 옮김, 릴런드 마이릭 그림 / 서해문집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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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핵폭탄의 문제 

내겐 편견이 있다. 20세기의 물리학자에 대한 전기를 읽을 경우, 언제나 로스앨러모스에 대한 태도를 먼저 확인한다. 특히 미국의 물리학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내게 유쾌한 물리학자로 생각되는 파인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신나게 그 이야기를 해줬어. ... 어쨌든 로스 알라모스는 엄청난 흥분으로 들끓었어. 모두가 파티 분위기였어. 이리저리 뛰어다녔지. "왜 우거지상으로?" "우린 끔찍한 물건을 만들었어." "하지만 당신이 시작한 거예요, 밥." "당신이 우릴 끌어들였잖아요!" 얼마 안 있어 로스 알라모스에서의 일은 끝났고 나는 교수직을 얻었어. 뉴욕에 돌아오니 기분이 이상했어. 주위를 둘러보니 히로시마의 원자폭탄 피해 반경이 생각났어.(110~111)  
   

원자의 움직임과 에너지에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파인만은, 핵폭탄을 개발하는 문제는 세상의 진리를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파인만은 참으로 개인적인, 사람이었다. 

   
  자기가 사는 세상에 대해 꼭 책임질 필요는 없어. 좋아, 그래. 그럼 폭탄은?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어. 원래는 독일의 위협 때문에, 그들이 폭탄을 만들지도 몰랐기 때문에 폭탄을 만들었던 거야. ... 하지만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끝까지 염두에 못 둔 건 도덕적인 면에서 나의 실수야. 독일이 패전했을 때에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 왜 그 일을 계속 해야 하는지, 그때 다시 고려해야 했는데. 뭔가를 배웠어. 어떤 일을 할 때 끊임없이 그 일을 하게 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야. 상황이 바뀔지 모르거든. (188~190)  
   

그런 입장은 노년에 다시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반복된다. 하지만 거기서 한걸음 더 나간다. '그일을 하게된 이유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렇다. 파인만의 천진무구함을 고려했을 때 이런 고민이 얼마나 많이 나간 고민인 지 알 수 있다.    

2. 순진무구한 파인만 

이 책 <파인만>을 보면, 파인만의 복잡한 생각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 문제이긴 한데 그럼에도 진리에 대한 순진무구한 태도를 오히려 확연히 볼 수 있다. 

인터넷을 보면, 파인만은 늘 웃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옆의 사진을 보면, 누구나 웃음이 나올 것이다. 그런 그는 언제나 평범한 사람도 진리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랬고, 그를 위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해왔다. 게다가 번호 금고의 자리 수 몇개를 알면 나머지 번호가 무용지물이 되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연구소의 사무실 금고 번호를 수집하기도 했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발견하고 이를 '알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만을 위한 비밀이 아니라 모두에게 말하고 싶어했다.

 이런 태도는 중세 시대 진리를 독점했던 수도사의 태도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모습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어떻게 하면 가장 쉽고 정확하게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알려줄 것인가. 

 그것은 책에서 수차례 나오듯이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파인만 스스로도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런 형태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함께 본 아내의 말에 따르면, 뒷부분에 QED 나오는 부분부터는 안읽힌다고 한다. 나도 잠자리에서 읽으면서 몇번이고 졸아서 아내의 웃음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길을 찾는 사람으로서 파인만의 이야기를 - 이 사람의 책이 어마어마하게 번역되어 있다 - 접하는 첫번째 문의 역할은 톡톡히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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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한 번은, 우리가 가을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 

뜨거운 여름 후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 올 때, 우리가 계절에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무섭게 깨달았다.  

그리고 찾아온 가을같은 가을, 저절로 휴우 라는 한숨이 베어나올 만큼 마음이 놓였다. 

단지 서울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올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 종착역까지 정신없는 이슈 속에서 헤매고 있는 신세라니... 

그래서 그런지 이번 9월의 신간에서 건져올린 책들도 그런 관심을 반영한다.

    

여론 조사라는 것은 객관적인 의사의 종합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의사를 그럴듯하게 속이는 조작의 기술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미 익숙한 구분법이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결과를 맞추는 게임으로서가 아니라, 특정되지 않는 대중의 의식적 흐름을 짚는 수단으로서 접근하는 것은 그리 익술한 문법은 아니다. 국내 유수의 여론조사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필자는 무수히 많은 여론조사의 결과를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을 둘러싼 구체적인 의식의 지도를 그려냄으로서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어쩌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던 레이코프의 한글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높은 크레인을 표지로 삼은 이 책은, 이론서다. 요즘처럼 이론서가 호응받기 어려운 시절에 그래도 묵묵히 사회과학 도서를 내는 갈무리 출판사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한때 이성을 벗어나는 것만이 근대를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근대의 이성이라는 것이 거의 중세적 의미에서 주술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왔다. 하지만, 근대 이후로 '해방'을 상징해온 이성의 다른 측면은 여전히 필요하며 오히려 세계적 위기라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이 과거 중세의 그늘을 걷어냈던 이성의 벼린 날을, 이제는 녹슨 칼집에서 끄집어 낼 수 있을까. 제목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스캔들은 재미있다.  

이 책은 한 때 아는 사람사이에서는 무섭게 회자되던 스캔들의 한 복판에 있던 책이다. 동시에 번역서가 판을 치는 우리 지성계에서 번역의 윤리는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지 논란을 던졌다. 

그 스캔들의 결과가 -지난한 법정 고발을 포함하여- 어떻게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스캔들을 당사자였던 그 출판사에서 다시금 그 책을 냈다는 점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 밖에 판권을 무기로 오역본을 껴안고 있는 출판사들!! 각성하시길!!  

이젠 스캔들은 뒤로 한 체, 왜 민주주의의 모델이라 일컫어지는 프랑스에서 바로 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들끊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그 시선 그대로 우리의 앙상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직시할 때다. 때 아닌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논란 한복판에서,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경험적으로 미리 알고 있는지 모른다.

  

원체 발표되었던 글을 묶어놓은 책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중권이라면, 솔직히 관심있다. 하지만 잡지에서 보았던 그의 글들이 높은 시의성을 바탕으로 쓰여졌던데, 그것이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을 때 적절해 보일지 의문이다. 

그저 시니컬하고 독설만 일삼는 3류 지식인처럼 보이는 진중권이 적어도, 이 연재글에서는 자신 안에서 곰삮고 있는 고민들을 조금이나마 펼쳐보였다는 확신이 있기에 궁금하다.

 

 

 

 

통섭으로 유명한 윌슨은, 사실 생물학 중심의 학문적 패권을 역설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잘난 인간도 어쩔 수 없는 생명체에 불과하니 말이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뇌 연구'도 마찬가지의 흥미로 보인다. 

그런면에서 사회생물학이란 분야는 매우 흥미롭다. 이쪽에서는 도킨스나 데닛 같은 이들이 인간의 창조물인 사회와 주어진 자연이 상호 영향을 주면서 '공진화'한다는 발상이란, 왠지 DNA에 좌우되지 않는 자유를 말하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사회'생물학'인 이유다.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논란을 불러일으켰을까. 슬프게도 과도하게 기독교화된 우리 사회의 특징 상 사회적 논쟁은 미비했으나, 학문적으로 끼친 역향은 심대했던 것 같다. 바로 이책에서 불려 나온 학자들의 면면을 보니 그렇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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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1-10-11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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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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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분담이 가능한 사회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내심 까뮈와 사르트르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지길 바라는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까뮈와 사르트르가 전후 프랑스 시기에 역할극을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불온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편과 특수, 당파성과 일반성, 혁명과 저항- 마치 모든 목욕탕에 냉수와 온수가 나오듯이, 건강한 사회에 실천적인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두 개의 롤모델이라고 할까. 

물론 저자는 소련의 몰락 이후 까뮈적 인간형의 승리를 강변하고자 책을 썼다고 하지만, 그레서 왠지 사르트르를 위시한 일군의 집단이 까뮈를 일방적으로 이지메를 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여러 장치들 - 까뮈 사후에 그에 대한 사르트르의 언술이 마치 그렇다는 인상을 주는 것과 같은 -이 등장하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지성인 사회의 역할 분담에 대한 놀라움만 남게 되었다. 

강남좌파형 인간 까뮈, 386형 인간 사르트르 

공교롭게도 <사르트르와 까뮈>와 <강남좌파>를 함께 보게되어서 좋았던 점은 까뮈의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태도들 -이 책에서 그의 반공주의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대한 그의 관용성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까뮈는 전형적으로 강남좌파 모델과 닮았다.  

   
 

 강력한 정치 활동을 경험한 후에 그는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만반의 준비가 된 것처럼 느꼈다. 필요한 개혁안을 발표하기 위해 그는 필요한 경우 오직 그 자신만을 의지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같은 결심은 부분적으로 카뮈 자신의 뿌리 깊은 소명에서 기인한다. 폭력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소명이 그것이다.(194쪽)

 
   

얼마나 전형적인 태도인가? 그러면서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벌이고 있는 식민지 침략에 대해서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196쪽), 국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정치연합을 위해 활동을 벌였다. 성공을 위한 그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과정으로서 폭력을 인정했고 비폭력으로 고통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폭력으로 그것을 끊어내는 것이 도덕적 태도라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사르트르에게서 윤리와 역사, 그리고 윤리와 정치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인간과 세계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가정하는 것이다.(239쪽)

 
   

 나는 이와 같은 까뮈와 사르트르의 태도에서, 우리 식의 강남좌파 모델과 386모델을 떠올린다. 명민함과 사회적 성공, 그리고 치우침 없는 합리성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는 강남 좌파형 집단은 사실상, 까뮈와 같이 사회의 급진적 일부를 배제함으로서 의미를 획득한다. 마치 까뮈가 반공산주의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의 '반항적 인간'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무능하고, 전문성도 없으며 난폭하기까지한 386 모델들을 보면 뛰어난 당파성에 대한 헌신과 비타협적인 태도들이 사르트르의 '혁명적 인간'과 닮았다. 김진석의 표현에 따르면, 현실의 더러움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태도랄까. 

까뮈의 복권이 껄끄러운 이유 

이 책이 사르트르의 과대포장을 벗겨내고 까뮈의 복권을 꾀하는 책이라면,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사르트르의 책을 번역하고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를 집중하는 학자임에도, 그 의도가 독자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맥락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대안없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조건이다.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으로 침묵한 메를로퐁티와는 다르게 발언을 지속했으며, 냉전체제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자를 자처했고 끝까지 불안한 실존을 현실에 대한 직접적 개입과 당파성을 바탕으로 실천해왔다. 반면 까뮈는 주관적인 신조에 현실적 지형을 대입했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만들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 안전하기를 택했다. 굳이 비난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태도가 시간이 지나 타당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변한 것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런 면에서 까뮈적 태도는, 마치 '희망버스'에 대해 폭력성과 대안없음을 질타하는 일군의 진보적 연구자 혹은 교수들을 보는 것과 같이 껄끄럽다.  

저자의 편견이 짜증스럽다 

   
 

 알제리의 가난 속에서 성장한 카뮈에게서 노벨상은 그의 성공의 정점이었으며, 또한 그 상은 그의 인생이라는 작품이 완결되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안락한 주거지를 구입하기 위해서 상금을 이용했다. 반면, 파리에서 성장한 유목한 어린이였던 사르트르는 정치적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노벨 문학상과 그 상금 그리고 거기에 동반되는 모든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482쪽)

 
   

솔직히 이런 저자의 태도는 마치 '조선일보'식 심리소설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까뮈도 인간이었고 한계가 있었다면 이를 그대로 보면 그만인 것이지,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았던 출신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인이 되어서 본인 선택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어쨋든 이 책은 일종의 의도된 편견을 가득담고, 저자의 일방적인 상황해석이 독서를 방해하는 불편한 책이다. 만약에 균형추 역할을 해주는 번역자의 서문이 없었다면 '뭐 이런 책이 다 있어?'하면서 중간에 독서를 접었을 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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