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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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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는 미시간대학에서 철새인 울새를 연구하는 연구자의 사례가 나온다.

미시간 대학 구내에서 쉽게 만날 수 있던 울새들의 사체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왜 그랬던 걸까? 전해 나무의 방재를 위해 뿌린 살충제가 원인이 되었다. 그 살충제는 울새의 먹이 사슬 밑에 있는 지렁이에게도 흡수되었고, 그 지렁이 11개면 울새의 치사량이 되었던 것이다(131쪽).


그래서 봄이 왔음에도 새들이 침묵하는 캠퍼스가 되었다.



위의 사진은 후쿠시마에서 일어난, 엄청난 지진과 그로 인해 벌어진 해일이 지나간 다음의 풍경이다.

최근 <시사인>의 현지 취재에 따르면, 밭을 일구던 한 노인은 땅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지구가 아픈가보다"


그런데, 후쿠시마는 지구가 아픈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탐욕과 직접적으로 닿아있는 인재가 되었다. 그래서 그 노인의 말은, "사람이 아픈가보다"라고 정정되어야 한다.


1.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과학교양서가 아니다. 우리 식으로 보자면, 고발서에 가깝다. 당시까지 자연속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던 화학자들의 시대에, 그렇게 만들어 놓은 화학약제들이 자연에 그래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밝혀냈다. 


더욱 절망스러운 것은, 그런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침묵의 봄> 이후에도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것이 앞서 언급한 후쿠시마다. 여전히 서울의 100배에 이르는 방사능이 나오고 있는 후쿠시마는 침묵의 봄이 아니라 절망의 봄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2.


그래서 <침묵의 봄>을 읽는 내내 내 머리속은 살충제의 위험이 아니라 후쿠시마가 떠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잔류허용량'이라는 개념을 보자(201쪽 이후). 잔류허용량은 통상 안전과 불안전의 기준점으로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다. 그 기준이 의미하는 것은, 반복적인 허용량의 접근에 대해서도 안전을 보장하는가 문제이다.


통상 허용량의 기준은 성인 1명이 한회에 적용되는 범위다. 그런데, 그것이 반복된다면? 즉, 특정한 영향이 배출되는 시간과 새로 흡수하는 시간에 시차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작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당시, 카이스트 교수라는 자와 서울대 교수라는 자가 공항에서 들어온 사람들의 피폭량이 '허용치'를 밑돌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취지의 말을 한 바 있다. 하지만, 허용량의 기준은 방사능을 내뿜는 물체가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는 대상의 총량으로 접근해야 타당했다. 


3.


<침묵의 봄>은 전혀 낡은 이야기가 아니다. 살충제 즉, DDT를 방사능으로 바꾸면 바로 당대의 문제가 된다. 개인적으론 오히려 지금 사용이 금지된 살충제의 용어가 나오는 바람에 마치 옛날 책을 보는 듯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이 거북했다. 


다시 말하면, 이 책을 단지 과학교양서 정도로만 읽게될 그 '시차'가 불편했다는 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침묵의 봄>이 가지고 있는 현대적 의미일 것이고, 곧 다가올 후쿠시마 1주기는 그런 현재성을 다시금 고민하는 데 시금석이 된다. <침묵의 봄>은 절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오히려 확산되는 침묵의 시작을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이 새의 침묵에 무대응할 때, 결국 인간 스스로가 침묵할 수 없다는 고발을 담은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의 재출간이,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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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노하지 않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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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어느날 사람들이 모여 선언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권리가 되었고, 그것을 존중받게 되었다. 너무 낭만적인가? 하지만 역사적 사건으로서 '선언'은 권리 있음을 말함으로서 없던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이를테면, 제3계급이 명실상부하게 국가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는 테니스코트 선언을 보자. 그저 세금이나 뜯어볼 생각으로 제3계급의 의회 참여를 보장했지만, 그것이 더욱 큰 정치적 각성으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루이16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았을 것이다.


<다비드, 테니스코트의 선언>


비슷하게, 권리장전도 그렇다. 무혈혁명이었던 명예혁명에 이어, 1689년 영국 의회가 당시 국왕이었던 윌리엄 3세에게 승인하도록 요구한 것이었다.


권리장전의 풀네임은 "신하와 백성들의 권리와 자유를 선언하고 왕위 계승을 정하는 법"이다. 다시 말해, 왕은 바지사장이 되었고 신하와 백성의 권리와 자유가 '선언'된 것이다. 이렇게 한번 선언된 것은,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책이 전하는 1948년 세계인권선언의 풍경도 그러하다. 1948년 12월 10일의 저녁, 프랑스 파리의 샤이유 궁전에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183번째 국제 연합 (UN) 총회가 열렸고, 이 날 밤 당시 58개 가입국 중 50개국의 찬성과 함께 하나의 선언문을 채택한다. 국제연합 총회 결의 217 A (III) 이라고 불리며 다른 말로 세계인권선언이라 불리는 것의 탄생이다. 


<세계인권선언 회의 광경>


2.


<왜 분노하지 않는가>는 세계인권선언이 나온지 100년이 되는 해에 지금보다 더욱 구속력있고, 바뀐 현실에 부합되는 인권규약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고, 전세계의 사람들과 공동작업이 진행중이다. 


앞서 언급한 선언의 풍경들을 보자면, 정말로 뭔가가 될 것 같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100년 인권선언이 가진 의미와 그것이 현재의 상황에서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행동하자고 말한다. 어떤 정치적 과정보다 더욱 절실하고 필요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기후변화에 따른 위험, 여전히 광범위한 편견들로부터 인류는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다보면 한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일종의 피상성이다.


2048 프로젝트는 인류의 1%에게 상류로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강을 따라 떠내려온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상류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단 1%의 사람만 상류로 올라가보고 나머지 99%는 상에서 사람들을 구하더라도 말이다. 59쪽


저자는 자신의 역할을 1%의 것으로 말하고 있다. 떠내려 오는 사람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사람들이 계속 떠내려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인권보장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2008년 이후, 1% 대 99%의 시대에 가장 쟁점은 경제적 부의 분배와 관련된 것이다. 즉 저자가 말하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관련된 것이다. 저자가 볼때 인권이 법률적으로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반란에 기대어 사회격변을 이끌어 내려고 할 수도 있는 시대다(101쪽). 그래서 "사람들이 반란에 의지하지 않게 하려면 법에 의해 인권이 보호되어야만 한다."(102쪽)고 주장한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가 부를 강화한다는 점"(100쪽)을 강조하면서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공공사업과 결합된 자본주의와 시장을 통해서"(105쪽)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절실함이 좀 더 분명하게 다가온다. 저자가 말하는 파국, 즉 지금까지의 세계를 지탱해온 구조가 바뀌는 순간을 막기 위해서라도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완충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조바심말이다. 혁명이든 반란이든 그것이 1948년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이 지탱해온 체제를 흔들기 전에 좀 더 강력한 형태로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3.


이 책을 읽어보면 중요한 문제의식과 내용, 사례들이 나오지만 모든 것이 깔대기처럼 인권선언으로 수렴되는 일관성은 좀 질리긴 하다. 저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계인권선언이 상류로 향하는 1%의 깨어있는 선지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가 아는 인권의 역사는, 저자가 깔끔하게 정리하는 말보단 더욱 남루하고 삐뚤빼뚤한 것 같다. 테니스코트선언 이전에 수없이 죽어간 제3신분의 존재들을 떠올려 보거나 가까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인권활동가들이 국가 그 자체와 갈등을 보여왔는지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또한 지금 식물이 된 국가인권위원회를 보라. 인권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고, 그것을 수호하는 기구가 있다고 해도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는가.


아무래도 <왜 분노하지 않는가>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선뜻 2048 홈페이지에 접속하기가 꺼려 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삶에서 벌어지는 치열함, 그리고 갈등, 그 남루함을 아는 입장에선 말쑥한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회의장 속에 의논하고 토론하는 모습으로 인권을 말하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분명 2048년에 새로운 인권선언은 가능하고 실행될 테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좀더 그 운동이 지상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금 누가 그 인권을 흔들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그와 싸우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인권을 위해 돈을 기부한다고, 문화적 패권의 상징인 테드 터너가 인권의 수호자가 되는 것은 왠지 어색하지 않은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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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기후정의



지구를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북극의 곰들을 지켜낼 수 있을까. 언제나 '어쩔 수 없음'이라는 말로, 적정한 소비라는 말로 감춰진 것은 '대안부재'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서 지구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서 인간의 문제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그들은 지구를 위해서는 사랑을 넘어서는 '정의로운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앉아서 사랑만 외친다고 지구가 지켜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궁금하다.









 2. 장소론                                                              



로컬리티 총서는 부산대학교의 한국민족문화연구소에서 수행하는 일련의 작업 중 번역물을 통칭한다. 꽤나 흥미로운 책들을 많이 펴냈는데, 장소론은 특히 그렇다. 이를테면, 웹상의 리얼리즘과 지역의 로맨티시즘이라는 부제를 보자. 우리가 가상공간이라 부르는 웹에서 리얼리즘이라니, 현실의 부박함이 산재해 있는 지역에서 로맨티시즘이라니,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걸까. 










3. 다윈 지능


진화론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책. 문제는 왜 진화론인가라는 질문일 테고, 그것이 최재천이라는 과학자에 의해 소개되는 맥락을 이해하는 것일테다. 어쩌면 이 책에서 가짜 과학이 판치는 시대에 정말 과학적 사고가 무엇인지를 말해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사회화된 과학이론이 어떻게 살아남고 확장되고 있는지에 대한 '이론의 성장사'다. 











4. 루이비똥이 된 푸코?


여전히 원전의 질곡에 빠져서, '정확한 이해'가 마치 '원서가 사용한 언어의 통달함'으로 이해되는 우리의 상황에서, 미국화된 프랑스 이론의 조건은 흥미롭다. 어떤 외국 이론의 수용이라는 문제에 있어, 왜곡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수용의 맥락에 주목하는 '이론의 이민사'가 궁금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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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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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년도 전에 국제정치이론이라는 수업에서 하나의 질문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과연 임진왜란 시기에 한반도의 사람들은 일본의 침략을 '국가의 위험'으로 받아들였을까 하는 문제였다. 즉, 삶의 위기일 수는 있어도 단순히 지배자가 바뀌는 차원이었다면 충분히 수용가능한 위기가 아니었을까하는 질문이 나왔다.


단순하게 말하면, 임진왜란 시기에 '애국자'라는 개념이 존재했느냐의 의미였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국가라는 것, 국경이라는 것, 국민이라는 것이 일괄해서 해명되어야 했다. 어쨌든 당시 문헌을 보면 왜구의 침략에 대한 반발은 있었으나 그것은 이슬람의 공격에 직면한 기독교 공동체의 위기감과 같았다. 즉, '재조지은'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서 중화에 대한 공격은 있을지언 정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존립에 대한 위기감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재조지은을 말하면서 예상되는 외침(병자호란)을 앉아서 당하는 멍청한 시대인식이 가능했을리 없다. 이를 테면, 송시열과 같은 이는 재조지은이라는 정치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면 백성들이 얼마나 유린되더라도 '참을 수 있을 굴욕'이라고 여겼다. 그것은 근대적 국가체제가 사실상 엄밀하게 등장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 


송호근 교수의 [인민의 탄생]은 바로 이런 오래된 질문을 떠오르게 했다. 이 책은 근대부분을 다루는 2권으로 이어질 시리즈의 첫번째 책이다. 저자는 이 책 서술의 목적을 현재 취약한 시민공론장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밝히고자 하는 '현재적 요구'로 설명한다. 그리고, 오늘날 시민 공론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이유는 '교양시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87년 이후 형성된 시민공론장이 주체없는 공론장으로 전락했는지를, 근대 공론장의 탄생 및 그 특수성을 해명함으로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일단 이와 같은 접근법이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지는 2권이 나오지 않으면 확인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민의 탄생이라는 1권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인 개념틀이 제시될 뿐 구조적 특징이라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있다면, 조선왕조를 '지식국가'의 한 유형으로 보고 통치이념으로서의 유교가 이와 같은 지식국가의 바탕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 정도다. 


저자가 제시하는 근대적 인민의 탄생 경과롤 생각보다 간단한다. 천주교, 민란과 농민 전쟁, 서민 문예라는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형성되었으며(78쪽), 이는 각각 종교담론장의 변화로서 유교의 균열, 문예 공론장의 변화로서 언문의 사용, 정치 담론장의 변화로서 민란의 발생을 각각 한 장씩 할애하여 살피고 있다. 


그러고 나선, 우리의 주체적 근대화가 이루어 진 것의 원인으로 조선왕조의 강력한 통치 배경이었던 지식과 권력의 융합이라는 관계가 이완된 것에서 찾고 있다. 즉, 과거 통치기제들이 이완된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통치기제가 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 


이 책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에서 펴내는 일련의 '개념사' 작업과 쌍을 이룬다. 개념사의 작업이 인민이라는 말의 용례에 집중하여 맥락을 밝히는 과정을 밟는 반면,  [인민의 탄생]에서는 공론장의 구조 변동이라는 가설을 확인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나열되고 있다.


문제는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가설, 즉 인민이라는 주체의 등장 경로로 3가지를 제시하는 것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발견이었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희열을 주기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피타고라스 정식의 자세한 주해서를 보는 듯한 지루함이 생긴다.


그리고, 차라리 과감하게 역사적 인용들을 줄이고 2권의 내용을 합쳐서 한번에 내는 것이 타당했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의 문제를 해명하는데 1권에서 내놓고 있는 주요한 주장과 역사적 사실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과도한 교육열이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지식국가로서의 특징 때문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굳이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또한 문헌상의 한계이긴 하지만, 구한말의 시대상황에 대해 외국인이 쓴 기행문을 근거로 서술한다는 것은 방법론적으로 봤을 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왜냐면 본인은 외국 유학파 출신으로서 나름대로 '우리 땅에서 학문하기'라는 화두를 머리글에서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확하더라도 객관성을 보장할 수 없는 기행문을 바탕으로 논지를 이끌어 간다는 점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4.


결론적으로,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유보적이다. 일단 1권은 별 2개 정도라고 두자. 2권의 내용에 따라서, 1권의 내용은 별 다섯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관점, 즉 아래의 인용문과 같이 세대와 세대의 관점을 아비와 자식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한 절대로 새로운 학문적 지평이 열리지도 않을 뿐더러, 현재를 살아가는 '교양없는 시민'들에게 씨알도 안 먹힐 것이라는 말을 학 싶다. 


1970년대 세대가 자부심을 갖고 행했던 과거와의 단절, 못한 아비 죽이기의 대가는 혹독했다. (19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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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그 첫 5천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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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이후, 어쨌든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누군가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언제든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겠냐만은, 2008년 이후의 자본주의는 확실히 이전의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위기의 문제가 곧잘 '인간의 위기'로 치환되곤 하고 마는데, 그것은 철의 여인이 말했던 '대안이 없다'라는 인식탓이다. 2008년 위기 이후 탐욕이라는 인간의 오류가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를 망가뜨렸다고 보는 시각이다. 그래서 위기때마다 위기의 근원을 드러내기 보다는 지속적으로 어떤 장치를 덧대기 바쁘다. 


그래서 우리는 기후변화에 따른 지구 문명의 멸망은 상상하기 쉬워도,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체제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한 종교적 세계를 살고 있다.


이 책,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쓴 [부채]는 바로 이런 '신앙'을 정조준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인간을 자본주의 이후에 두었던 일종의 편견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자본주의라는 체계가 사실은 가상의 원시시대에 대한 가정에 기반을 둔 불안전한 체제라는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자본주의 이후를 고민하는 것이 생각보다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류학자다. 인류학이라는 것은 과거 인간의 삶을 직소퍼즐처럼 맞추는 자이기도 하지만, 현대인과 동시대에 살고 있는 수많은 '원시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공통적인 특징을 찾아내는 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인지,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책에는 수많은 인간사회의 사례들이 나온다. 일군의 경제학 책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수식이나 그래프 없이도 자본주의라는 경제체제의 핵심으로 치고들어 간다.


[부채]를 관통하는 질문은 서론에 저자가 직접 겪은 일화에서 나온다. IMF의 탐욕은 이해가 되더라도, 그리고 그들이 강제적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 빚을 떠 안긴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 빚을 갚는 것이 윤리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그 국가들은 돈을 빌렸잖아요! 돈을 빌렸으면 갚는 것이 당연하죠."(6)


이 말은 저자가 나름 진보적이라는 활동가에서 들은 호소다. 그렇다. 우리가 처해있는 경제적 상황은 빚으로 쌓아올린 도덕적 요구에 처해 있는 막다른 길이다. 저자는 이런 도덕적 요구가 사실, 교환이라는 고전 경제학의 가설적인 전제에 비롯되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런 교환=경제의 등식이야 말로 인간경제의 제 모습을 잃게 만든 주범이다.

"인간의 모든 삶을 교환으로 압축한다는 것은 곧 다른 형태의 경제적 경험(계급조직, 공산주의) 모두를 제외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들 중에서 성인 남자가 아닌 까닭에 일상적 활동을 물물교환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현장에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229)


 

이를테면, 아담 스미스가 상상하는 물물교환의 그림을 상상해보자. 물고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곡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담 스미스는 그 둘 간의 교환 비율로 슬쩍 넘어가지만, 이런 교환상황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내가 물고기를 가지고 있을 때 상대방이 내가 필요한 곡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다. 그게 일상적으로 물물교환이 가능할 정도로 가능한 일이었을까.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아담 스미스나 현대 경제학 교과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원시적 물물교환의 그림이 사실상 가상의 전제에 불과하다는 것은 단순한 사고 실험을 통해서 쉽게 반박된다. 


사실 생각해봐도, 어린 시절 동네 가게는 늘 외상장부가 있었다. 라면 두개, 파 한단을 그에 맞는 돈을 주고 가져다 먹진 않았다. 그저 "아주머니, 파한단 가져갈께요~"라는 말한마디로 외상이 성립되었고 한달에 한 두번 한꺼번에 그간 밀린 외상을 갚았다. 그것이 상당히 일상적인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누구나 공유하는 사실적 경험이 경제학 교과서의 비현실적인 상식에 의해 전도되었다. 이에 가장 비근한 사례는 바로 신용카드다. 실질적인 현금지급이 없어도 지불이 가능한 것은, 아담 스미스가 상상했던 물물교환이 얼마나 예외적인 것인지 보여준다. 문제는 그렇게 형성되는 신용경제를 위해서는 이후에 지불가능한 소득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하지만, 이런 국가 혹은 사회의 조건에 대해서만은 침묵한다.


그렇다면, 이런 자본주의적 시장은 왜 등장하게 되었을 까. 그것은 바로 통치의 문제와 연관된다. 


"만약 자신의 영토 안에 금광과 은광들이 있다면, 국왕들은 보통 그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금을 채굴해 일정한 모양으로 만든 뒤 그 위에 자신의 얼굴을 찍어 국민들 사이에 유통시켜놓고는 국민들에게 그 돈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89)

 

 


이것은 시장을 형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데, 여기서 시장은 단순히 교환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을 구성원으로서 구속시키는 기제를 의미한다. 이런 기본적인 부채를 바탕으로 개개인은 국왕이 발행한 국채하에 결속된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이런 인류학적 가설을 통해서 사실 물물교환의 현대적 형식으로서 화폐경제의 본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장이 경제활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지배라는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이 진 부채는 사실상 사회적 부채에 가깝다. 그리고 부채가 사회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제나 위기상황을 불러올 수 있다. 저자는 그것을 부채위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런 점에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한 인류학적 사실로 제시하는 '희년' 제도는 매우 흥미롭다. 이를테면 페르시아의 '깨끗한 서판' 사례가 그것이다. 부채를 진지 7년이 지나면 왕의 명령으로 기존의 부채를 청산하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희년이라는 것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된 방도였다는 점이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부채의 기본적인 속성으로는 '평등'이 있는데, 그것이 상하관계와 같은 계급적 관계로 치환될 때 사회를 구속하고 있는 도덕적 규범이 파괴되고 만다. 이를 테면, 면대면 사회의 경우 부채가 사회관계에 우선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고대왕국은 부채위기를 부채 탕감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이런 부채위기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유사하다. 하지만 누구도 그와 같은 부채를 일괄해서 탕감해주는 방식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은행이라는 제도는 과거의 면대면 사회를 타인과 타인의 관계로 만들었고, 사회의 도덕적 구속원리는 부채의 비도덕적 구속원리와 병렬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방법이 다를 것은 없다.


"이것이 20세기의 위험한 함정이다. 한쪽엔 시장의 논리가 있다.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는 모두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 개인으로 출발한다고 상상하길 즐긴다. 다른 한쪽엔 국가의 논리가 있다. 그 논리 때문에 우리 모두는 상환이 절대로 불가능한 빚을 안은 채 시작한다. 우리는 시장과 국가는 정반대이며, 시장과 국가 사이 어딘가에 진정으로 인간적인 가능성들이 있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고 있다."(127)


 

 

대안은 화폐의 다른 기능, 즉 저자가 표현하는 인간경제를 위한 속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저자가 수많은 인류학적 사례를 통해서 밝히고자 한 것은 화폐가 단순히 교환가치를 담고 있는 '소비장치'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업경제와 내가 "인간경제"라고 부르는 것, 즉 돈이 물건을 구입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끊는 사회적 통화의 역할을 하는 경제의 차이를 밝히려 한 것이다."(283)


사실 저자는 이런 부채의 속성, 즉 인간과 인간이 맺고 있는 사회성의 한 형태로서 부채를 발굴해냄으로서 채무이행이라는 현재 경제체제 내의 도덕적 명령이 사실상 정치적 지배체제의 폭력적 수탈의 한 형태임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부채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은행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이 빚을 갚지 않으면 경제체제가 붕괴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은행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파산 위기에 처한 은행을 납세자의 돈으로 지원해주는 상황은 부채를 둘러싼 도덕의 전도된 풍경을 여실히 드러낸다.

 

개인적으로 현재의 금융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채무자가 빚을 갚으라는 요구를 거부할 때 가능하다는 암시를 읽는다. 그래도 인간의 삶은 지속될 것이며, 오히려 삶 자체가 자유와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읽는다. 아마도,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는 빚에 있을 것이고, [부채]의 저자가 제안한 빚의 백지화가 그것을 새로운 대안적인 체제- 저자가 말한 바 '인간경제'-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오랜 만에 마음껏 생각을 뻗어볼 수 있는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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