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까뮈]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
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할분담이 가능한 사회 

솔직히 이 책을 읽으면서, 내심 까뮈와 사르트르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지길 바라는 저자의 의도와는 달리, 까뮈와 사르트르가 전후 프랑스 시기에 역할극을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불온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보편과 특수, 당파성과 일반성, 혁명과 저항- 마치 모든 목욕탕에 냉수와 온수가 나오듯이, 건강한 사회에 실천적인 지식인이 가질 수 있는 두 개의 롤모델이라고 할까. 

물론 저자는 소련의 몰락 이후 까뮈적 인간형의 승리를 강변하고자 책을 썼다고 하지만, 그레서 왠지 사르트르를 위시한 일군의 집단이 까뮈를 일방적으로 이지메를 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여러 장치들 - 까뮈 사후에 그에 대한 사르트르의 언술이 마치 그렇다는 인상을 주는 것과 같은 -이 등장하지만, 결론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지성인 사회의 역할 분담에 대한 놀라움만 남게 되었다. 

강남좌파형 인간 까뮈, 386형 인간 사르트르 

공교롭게도 <사르트르와 까뮈>와 <강남좌파>를 함께 보게되어서 좋았던 점은 까뮈의 이해할 수 없는 여러 태도들 -이 책에서 그의 반공주의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고, 프랑스의 식민주의에 대한 그의 관용성도 잘 설명되지 않는다-을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을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까뮈는 전형적으로 강남좌파 모델과 닮았다.  

   
 

 강력한 정치 활동을 경험한 후에 그는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만반의 준비가 된 것처럼 느꼈다. 필요한 개혁안을 발표하기 위해 그는 필요한 경우 오직 그 자신만을 의지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같은 결심은 부분적으로 카뮈 자신의 뿌리 깊은 소명에서 기인한다. 폭력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을 거절한다는 소명이 그것이다.(194쪽)

 
   

얼마나 전형적인 태도인가? 그러면서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벌이고 있는 식민지 침략에 대해서는 입장을 보이지 않고(196쪽), 국내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기 위한 정치연합을 위해 활동을 벌였다. 성공을 위한 그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과정으로서 폭력을 인정했고 비폭력으로 고통을 끊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폭력으로 그것을 끊어내는 것이 도덕적 태도라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사르트르에게서 윤리와 역사, 그리고 윤리와 정치를 구별할 수 없게 된다. 도덕적이라는 것은, 인간과 세계가 필연적으로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가정하는 것이다.(239쪽)

 
   

 나는 이와 같은 까뮈와 사르트르의 태도에서, 우리 식의 강남좌파 모델과 386모델을 떠올린다. 명민함과 사회적 성공, 그리고 치우침 없는 합리성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는 강남 좌파형 집단은 사실상, 까뮈와 같이 사회의 급진적 일부를 배제함으로서 의미를 획득한다. 마치 까뮈가 반공산주의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그의 '반항적 인간'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반면 무능하고, 전문성도 없으며 난폭하기까지한 386 모델들을 보면 뛰어난 당파성에 대한 헌신과 비타협적인 태도들이 사르트르의 '혁명적 인간'과 닮았다. 김진석의 표현에 따르면, 현실의 더러움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태도랄까. 

까뮈의 복권이 껄끄러운 이유 

이 책이 사르트르의 과대포장을 벗겨내고 까뮈의 복권을 꾀하는 책이라면,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사르트르의 책을 번역하고 사르트르에 대한 연구를 집중하는 학자임에도, 그 의도가 독자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하나의 맥락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대안없음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조건이다. 

사르트르는 한국전쟁으로 침묵한 메를로퐁티와는 다르게 발언을 지속했으며, 냉전체제에서 고립을 자처하면서도 공산주의자를 자처했고 끝까지 불안한 실존을 현실에 대한 직접적 개입과 당파성을 바탕으로 실천해왔다. 반면 까뮈는 주관적인 신조에 현실적 지형을 대입했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만들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 안전하기를 택했다. 굳이 비난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태도가 시간이 지나 타당하거나 바람직한 것으로 변한 것이라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그런 면에서 까뮈적 태도는, 마치 '희망버스'에 대해 폭력성과 대안없음을 질타하는 일군의 진보적 연구자 혹은 교수들을 보는 것과 같이 껄끄럽다.  

저자의 편견이 짜증스럽다 

   
 

 알제리의 가난 속에서 성장한 카뮈에게서 노벨상은 그의 성공의 정점이었으며, 또한 그 상은 그의 인생이라는 작품이 완결되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안락한 주거지를 구입하기 위해서 상금을 이용했다. 반면, 파리에서 성장한 유목한 어린이였던 사르트르는 정치적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노벨 문학상과 그 상금 그리고 거기에 동반되는 모든 것을 거부했던 것이다.(482쪽)

 
   

솔직히 이런 저자의 태도는 마치 '조선일보'식 심리소설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난다. 까뮈도 인간이었고 한계가 있었다면 이를 그대로 보면 그만인 것이지, 스스로 선택하지도 않았던 출신의 내용을 바탕으로 성인이 되어서 본인 선택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은 합당한 태도가 아니다. 

어쨋든 이 책은 일종의 의도된 편견을 가득담고, 저자의 일방적인 상황해석이 독서를 방해하는 불편한 책이다. 만약에 균형추 역할을 해주는 번역자의 서문이 없었다면 '뭐 이런 책이 다 있어?'하면서 중간에 독서를 접었을 지도 모르겠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