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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진보를 생각한다
김창호 지음 / 동녘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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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쪽


자영업자들의 보수성을 언급하면서, 17대 대통령선거 이후의 자영업 형태의 변화를 살펴보고 있음. 이는 자영업자들의 계급 배반(즉, 지지를 주고도 손해를 보는)을 설명하기 위한 통계인데, 통계자료가 2001년과 2007년 자료에 국한되어 있음. 사실상 2007년 말의 통계는 대통령선거 이후라고 하기엔 힘듬. 


- 저자는 길게 브리핑룸 통합운영과 관련된 정당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134쪽엔 일본의 보고서를 언급하면서 기자클럽 폐지를 권고한 미 포브스 아시아태평양 지국장의 책을 언급하고 있음.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정부부처의 기자 접근을 일원화하기 위한 조치로 브리핑룸을 축소한 것이지 각종 기자클럽을 혁파한 것이 아님. 아전인수적 해석.


- 163쪽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경포대' 등의 용어 사용에 대해 말과 스타일을 비판하는 방식이 자격과 능력시비로 확대되었음을 언급하는데, 이를 단순히 보수언론의 언론플레이로 치부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방식.


- 237쪽에서 작년 촛불집회를 단순히 생활의제의 폭발력을 지적하는데 그치고 있는데, 문제는 정부의 소통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은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임. 이는 노무현 정부시절 대추리, KTX 비정규직, 한미FTA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임.


다만 이런 인식의 선긋기는 오히려 최장집 교수의 논의를 반박할 때 반대의 논거로 활용함.


" 민주주의를 대단히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대목은 의외이다. 민주주의는 의자가 결정되는 과정을 체제화한 근대 민주주의 체제로서만 대변되지 않는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물론이고 그것의 실질적 내용의 민주성, 나아가서는 민주적 내용들의 유통을 막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고 이와 같은 민주적 내용들이 제대로 구현되기 위한 정치체제의 변화까지 포함된 것이 오늘날의 민주주의 개념이라 할 수 있다."(247)


- 진보적 시민공동체: 생활의제에 천착하면서 실제로 현실속에서 살아움직이는 시민들이 중심되는 공동체를 상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함. 하지만 김창호의 그것은 탈정치화된 공동체에 불과함. 그가 내세우는 어떤 해설에도 지역정치의 정치적 왜곡에 대한 판단이 없음. 그저 시민공동체는 선이다라는 단순한 가치선언에 불과함. 물론 후반부에 지역정치의 가능성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저자가 생각하는 대안적 운동체인 시민공동체의 활동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지역정치의 중요성때문에 시민공동체의 가치가 연역된 것은 아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유보조건들. 
" 그렇다고 이것이 국가를 부정하거나 정치의 의미를 폄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반대이다. 결국 과거의 국가주의나 권위주의는 원칙적으로 지양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국가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치와 국가권력이 중요한 만큼, 국가와 정치를 어떻게 진보적으로 재구성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사이버상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 운동과 집단지성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것이라 기대한다."(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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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건축의 새로운 상상력 - 우리 도시 건축의 방향성을 모색하다
김성홍 지음 / 현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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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현대미술관에서는 <메가시티전>이라는 기획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는 3년전부터 우리 나라의 신진 건축가와 회사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전시하는 프로젝트 행사였다.  

일전엔 독일에서도 전시를 했고 호평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부정적 대상으로서의 '메가시티'였다. 즉, 전시의 기획을 오독하고 참여한 것이다. 

전시를 마치고 마침 공동기획자인 건축가와 일단의 사람들이 함께 자리를 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건축가는 장래의 건축가들이 먹고살 공간을 미리 다 팔아먹고 있다." 고밀, 고층화된 건축의 풍경이 미래세대의 기회를 착취하는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는 의미였다. 

이 책은 그 전시에 참여하는 전문가 중 한명인, 김성흥 교수의 저서다.  

앞 부분에는 저자의 건축에 대한 생각, 즉 지역마다 상이한 공간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특징들, 그리고 우리 한성- 즉 서울-의 도시공간이 가지는 역사적 특징들이 서술되어 있고, 뒷 부분에는 현재 도시의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들에서 드러나듯, 현재 뉴타운이니 재개발이니 하는 사업들은 모두 1960년대 형성된 성장우선주의의 산물이다. 달력으로는 21세기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20세기 중반에 형성된 정체성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비약이지만, 변화는 때론 급진적으로 와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공치사나 뻐기기가 없는 건축가의 진솔한 대화가 듣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활용을 위한 인용>

1981년부터 20년 이상 우리나라 주택 공급 정책을 주도해 온 '택지 개발 촉진법'이 그 배경에 있다. ... 국가가 택지 조성을 위해 필요한 땅이라고 지정하면 소유자가 반발하더라도 일괄 매수하여 아파트 택지로 조성할 수 있었다. 231쪽


1966년부터 서울 시장을 지낸 김현옥은 파리를 무자비하게 개조한 프랑스의 행정 장관 오스만을 연상케 한다. 김현옥의 수많은 건설 구호 중 압권은 "도시는 선이다."라는 말이다. ...4년간 재임 중 10개의 지하도와 144개의 보도육교를 건설했다. 1974년부터 서울 시장을 지낸 구자춘은 김현옥을 능가했다. 재임 4년간 구자춘은 도로 39개 7만 8,216미터를 신설하고, 기존 도로 40개 4만5,618미터를 확장했다. 261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서울의 인구밀도는 파리와 뉴욕 다음으로 높지만 건축 밀도는 6개 도시 중에서 로스엔젤레스 다음으로 가장 낮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구 밀도와 건축 밀도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 261제곱미터(81평) 대지는 번듯한 사무실을 짓기도 애매한 크기다. 5층 이상이 되면 승강기도 있어야 하고 지하 주차장도 만들어야 한다. ... 결국 승강기 없이 지을 수 있는 5층 이하의 근린생활 시설이 대안이 된다. ... 이보다 작은 땅을 가진 사람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두 가지밖에 없다. 작은 필지를 모두 합쳐서 대단위 재개발로 가든지 낙후된 채 적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건축의 양극화다. 288~292쪽

기존의 아파트를 더 높은 아파트로 갈아 치우는 재건축의 경우 기존 세대수와 입주 세대수의 비율은 1:1.2 정도로 미미하다. 낡은 지역을 허물고 아파트를 신축하는 재개발의 경우는 1:1로 차이가 거의 없다. 293쪽



유리로 싸인 투명한 SCL시애틀중앙도서관은 예상과 달리 에너지 면에서 효율적인 건축물이다. 복층 유리 사이에 알루미늌 메시가 삽입되어 직사광선을 굴절시킨다. 그러나 내부 공간에서 알루미늄 메시는 육안으로 감지할 수 없어 투명한 외피로 보인다. 11층 높이 내부 실내 공간의 더워진 공기는 상부로 올라가면서 네 차례 환기된다. 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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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 - 미디어사상총서 1
손석춘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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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 한국 공론장의 구조변동, 커뮤니케이션북스, 2005.

시니컬한 정치이론에 따르면 근대의 시민은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구속되어 있는 상태이며 ‘단지’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 정치전통에 서있으며 이의 기본적인 전제는 자유로운 개인의 존재다. 이 점에서 개인의 자유는 해당 정치체제가 정당한가 그렇지 못한가를 판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라 할 만하다. 이점에서 앞서의 시니컬한 평가는 현대 정치체제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불완전하며 오히려 매순간의 위기상태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근대적 정치 기획을 ‘계몽’으로 특징지면서 이를 ‘완수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자 하는 일련의 시도들은, 기본적으로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면서 좀더 나은 사회의 가능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와 연결된다. 푸코에게 계몽이 하나의 감옥 이미지 였다면, 하버마스에게는 동굴 이미지였다. 그런 하버마스에게 시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구성되는 자유로운 공간은 끝나지 않는 계몽의 기획이 지속되는 장소인 동시에 지금보다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계기로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라 할만하다.

하버마스가 수행한 서구 공론장의 역사적 계보에 대한 탐구는 근대 정치체제가 지니고 있는 역동성과 함께 정치체계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민의 공간’을 전제한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연구자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섣불리 들여온 서구 이론은 그만큼 쉽게 부식되는 특징이 있어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죽은 개’ 취급을 받고 있는 지경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운동가 손석춘이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라는 틀을 가지고 한국의 공론장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시도한 것은 때늦은 참신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손석춘은 하버마스의 공론장이라는 주제를 ‘신문’을 위시한 저널리즘으로 한정하고 브로델의 장기지속이라는 문제의식을 전용하여 한국의 공론장을 “시공간에서 전개과정을 분석하고 그 속에서 ‘주기적 순환’과 ‘추세’를 도출”(19쪽)해내고자 한다.

특히 한국의 근대적 공론장의 형성 시기를 19세기로 잡고 그 근거로 사학계에서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자본주의 맹아론’에 기초하고 있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정의 체계가 흔들리고 자생적인 지역 소통체계가 마련되는 과정을 서술한 2장의 분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이는 하버마스가 절대주의 국가가 체제 정당성을 의심받고 이 때문에 발생한 정치적 균열 가운데서 근대 공론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논리의 한국적 독해이다. 2장의 분석에서 눈이 가는 것은 지방의 수령이라 이서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존재했던 향회의 존재이며, 이것이 잇따른 농민봉기에서 민회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다.

후쿠자와 유키지의 영향 속에서 창간된 근대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에서 부터 <독립신문>,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의 <매일신문> 창간과 일본 제국주의의 순화정책 중 일환으로 등장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등장을 역사적 계열에 따라 살펴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재편되는 신문들의 구조와, 정치권력과 유착하면서 발전해나는 ‘정치적’ 언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4장으로 이어진다.

사실 손석춘의 분석은 엄밀하게 말해서 ‘공론장’에 대한 분석이라기보다는 ‘언론사’에 가깝다는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언론이 공론장의 대표적인 장치임에는 분명하지만 정치 체제가 포괄하지 못하는 제도와 시민사이의 틈에서 ‘포착되지 않은 체’ 존재했던 수많은 공론장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손석춘이 일제 시대 때 주요한 공론장의 하나로서 ‘지하신문’의 존재를 언급하면서 민중의 자생적 아고라에 대한 평가를 하고 있더라도(65쪽~66쪽) 이는 오히려 부록의 느낌이 강하다.

또한 5장과 6장을 통해서 정치체계와 생활세계, 그리고 양자의 편향 속에 위치하는 공론장의 위치를 분석하는 작업 역시 ‘해방의 공론장’(142쪽)이라는 규범적 지향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도식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사실 이런 점은 한계라 할 수 없는 한계라 할 만한데 왜냐하면, 이미 서두에서부터 저자가 주기적 순환과 추세에 주목하겠다고 밝힌 방법론적 한계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의 공론장 분석은 손석춘이 선구적으로 해놓은 언론 중심의 공론장 분석에 제도로 잡히지 않는 불규칙적인 민중의 자생적 공론 구조를 덧붙임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를 테면 조선시대에 등장한 방이나 격문, 그리고 일제시대 때의 각종 지하 유인물들, 군사독재시대 때 발행되었던 지하언론 및 선전물 등이 지니고 있던 함의들을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 <한국 공론장의 구조 변동>은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저자의 삶에 한 전환점”(저자서문)이 될 것이고 이에 따라 후속 연구 작업을 기대할 근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만하다. 무엇보다 하나의 분명한 잣대를 가지고 한국의 근대 언론사를 짚어보는 책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읽을 거리가 된다.

무엇보다 공론장 이론이라는 서구의 이식된 종자가 가장 실천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렴된 연구서라는 측면에서 이 책은 충분히 그 노고를 ‘치하’받을 만 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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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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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07. 3. 5)이 책은 불편하다.
지인의 말대로, 신문에 연재될 때에는 대판의 사이즈 만큼 불편하더니 책으로 묶여 나온 지금은 두툼한 질량 만큼이나 불편하다.

나의 불편함을 설명하는데, 내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진보에 놓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보다 손 쉬운 방법을 없다. 이 책은 나처럼 스스로를 진보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그렇다고 해도 그 불편함은 진정성의 연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짜증이 나진 않는다.

이를테면, 온갖 구역질나는 과거로 뒤덮힌 조중동같은 찌라시들의 비판은 진정성이 없기에 무시하기 일쑤다. 말이야 바로하라고, 신문 기자가 사주의 범법사실을 알면서도 '힘내세요'라고 외칠 수 있는 집단을 언론사라고 하기엔 쑥쓰럽다. 또한 자신의 친일 행정에 대해서는 함구하면서도, 세상에 둘도 없는 애국자연 하는 집단을 일관성있는 언론사라 칭하기 힘들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책의 필자들인 경향신문사 기자들은 순전히 상대적인 우월감만으로도 신뢰감을 준다. 적어도 찌라시 수준은 아니라고 말이다.

난 스스로를 보수라고 칭하면서 한나라당에게 자기를 일치시키는 사람들의 고백 역시 불편하다. 너무 당당하기 때문이다. 여성을 접대부 수준으로 밖에 보지 않고, 같은 당 동료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나가라고 윽박지르는 그들의 유아기적인 행태를 볼 때는 기가 막힌다.

어쨌든 난, 이 책을 사서 2일만에 밑줄을 쳐가며 일곤 동료를 줘버렸다.

혼자 불편할 수 없으니까.

같이 불편하면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민주화를 위한 열망이 절망으로 변했다는 것이 이 책의 제목에 담긴 뜻이겠지만, 난 오히려 '그리고 희망'이라는 마지막 단어가 생략되었다고 믿는다.

내 책의 불편함을 전염당한 동료와 그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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