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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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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한 서평을 보면, 평범한 미국 노동법 변호사가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체제 혹은 복지체제를 접하면서 느끼는 일상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에세이로 소개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는 내내 머리 속에서 맴돌았던 생각은 '한미FTA'였다. 많은 이들이 한미FTA의 문제에 대해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최대의 수출시장인 미국에 우리기업이 자유롭게 수출할 수 있도록하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논리다. 하지만 북미권에 수출되는 현대자동차의 자동차가 대부분 멕시코에서 생산되고 있다면? 삼성전자의 텔레비전 등이 국내에서 생산되는 비율이 10%도 안된다면? 


삼성이나 현대기업이 이익을 버는 것이 산술적으로 고용으로 이전되기 어렵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아웃소싱된 생산체제에서는 상식과 가깝다. 그런데 협정문도 읽어 본적이 없는 국회의원들이 날림으로 통과시킨 한미FTA는, 사실 수출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한국경제 체제의 미국화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제로 삼성경제연구소는 2006년 보고서를 통해서 자유무역협정의 체결은 한국경제체제의 외부적 충격을 제공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경제체질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한 바 있다. 경제적 체질이라고?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건강보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럽인은 단순히 돈을 더 쓰는 게 아니다. 미국인과 달리 그들은 효과적으로 돈 쓰는 방법을 안다. 비효율적이라고 평가받는 독일의 의료보험도 관련 총비용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1퍼센터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미국의 의료보험 관련 총비용은 GDP의 17퍼센트나 되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물론 보험에 가입한 중산층도 종종 혜택을 받지 못한다. 64쪽

이게 바로 체질의 문제다. 정부는 건강보험이 안전할 것이라 주장하지만, 카피약의 제조가 어려워지면 현재 건강보험의 40%이상을 차지하는 약값비중이 높아지고 결국 보장성의 약화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건강보험이 있음에도 별도의 민간보험을 가입해야 하는 '시장'이 생기게 된다. 바로 이것이 삼성경제연구소가 말한 체질 개선이다. 


우리는 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독일의 길이 아니라 미국의 길로 가고자 하는걸까. 손쉽게 독일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의 삶과 미국에서 살고 있는 교민들의 삶을 비교해도 쉽게 알 수 있을 일을 말이다. 


결국 배경에는 제조업 경시와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놓여 있다고 본다. 이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제조업이 국민성과 연관된다는 저자의 평가는 이 책의 백미에 가깝다. 


제조업에 신경 쓰기 싫다고? 뭐, 괜찮다. 노동운동도 생각하기 귀찮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앞으로 '국민성'이 어떻게 변화할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제조업과 노동운동의 존재 여부에 따라 국민성이 달라질 수도 있다. 미국인은 숙련된 제조업 노동자처럼 독립적이고 기술 지향적이 될까? 아니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갓 취직한 신입 사원처럼 서비스 지향적이고 의존적이 될까? 140쪽


개인으로 이 주장이 이 책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에서, 지금 우리에게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통찰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산업의 선진화로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의 변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로라고 믿고 있다면, 이는 심각하게 제고할 필요가 있다. 얼마전 장하준 교수가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온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저자는 능청을 떨며, 미국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냐라고 말한다. 더 나은 삶의 방식이 있음에도 그것이 막혀 있는 미국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시간이 조금더 흐른다면, 우리 역시 한국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한미FTA가 걸려있는 지금이, 바로 그 갈림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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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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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통제되지 않는 지성만큼 공포스러운 것이 있을까. 고국에서 버려져 스위스-프랑스-영국을 오갔던 루소의 행적을 보면, 흡사 예수의 고난이 떠오를 정도다. 그런데 이 책은 루소의 고난을 정조준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을 보면 루소의 처지가 참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것이 이 책을 탄생하게 만든 배경은 아니다.


이 책의 리뷰에 앞서 필요한 것은, 왜 지금 '루소와 흄'이냐는 질문일텐데 아무래도 해답은 이 책의 저자들이 보여준 전작에서 찾아야 할 듯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왜?>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그들의 전작 역시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짧은 논쟁을 모티브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꽤나 흥미로운 책이었고, 이 책 <루소의 개>는 그런 전작과의 모티브와 유사하다. 


이야기로 들어가보면, 자기 신념이 강하고 결벽증이 강한 루소는 자신이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고향에서도 쫒겨나 스위스의 구석 지방에 정착한다. 하지만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시혜를 거부했던 그는,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다. 이를테면, 흄과 루소가 최초로 갈등한 마차의 사례를 보자. 너무나 한적한 곳이어서 마차를 이용할 경우 왕복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곳인데 루소의 후원자가 그를 위해 마차를 보내며 그냥 보내면 분명 타지 않을 것이 확실하여, 편도값만 미리 내고 루소로부터 편도의 비용만 받도록 했다. 그런데 루소가 이 사실을 눈치챈다. 그러면서, 의심은 흄으로까지 확장되어, 흄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기만했다는 의심을 하게되는 상황에 처한다. 이쯤되면, 루소는 누구에게나 민폐를 끼치는 독특한 인간형이라 할 만하다. 


이 책 <루소의 개>는 사실 어떻게 영미권의 합리주의가 루소류의 자연주의를 가두는데 실패하는지를 보여주는 우화소설같기도 하다. 즉, 흄이 처음부터 끝까지 견지하는 합리주의와 교양은, 루소가 보여주는 기행과 고집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합의주의의 그물은 자연인인 루소를 가두기엔 역부족이었다는 말이다. 


철학적 담론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두 사람은 종교, 인간 본성, 선한 삶, 정치, 경제 등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 했다. 하지만 진정 그들을 갈라놓고 떨어뜨려 놓은 것은 지식으로서 그들의 특성이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217쪽


이런 지식에 대한 태도를 보면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정명훈' 논쟁이 떠오른다. 서울시향의 지휘자인 정명훈은 20억원이 넘는 서울시 지원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온통 특혜성이었던 것이다. 논란이 되자, 진중권은 예술에 대한 투자에 대해 지원예산의 많고 적음으로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논평했다. 그 과정에서 지난 2008년 국립무용단 해체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다시 재론되었다. <뼈속까지 자유롭고 치맛속까지 정치적인>의 저자 목수정은, 당시 파리에 있던 정명훈에게 무용단 조합원들의 의견을 담은 전단을 전달하기 위해 정명훈이 있던 공연장을 방문한다. 시간은 밤 10시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정명훈은 이를 거절했고 이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논란이, 스스로도 파리 예술노동자들의 도움을 받았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국내 예술인들의 처지에 눈을 돌리지 못한 정명훈이 아니라 밤 10시라는 시간에 예의가 없게도 정명훈을 찾아간 행위와 예술가에게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주장으로 번졌다.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 미학자라 말하는 진중권은, 스스로 보였던 정치적 당파성이 무색하게도 예술 지상주의로 숨어든 반면에, 스스로 운동권의 논리에 답답함을 느껴 진보정당의 연구원 자리를 벗어난 목수정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라는 당파성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예의없는 해고에 저항하는 싸움에 예의를 들먹이는 것은 전형적으로 루소를 공격했던 당시 프랑스 사교계의 특징과 닮았다. 이런 차이는 아무래도 진중권이 자신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상아탑에 머물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목수정은 당파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터박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루소가 평생 함께했던, 그래서 연인이기도 했던 이의 매력은 원시성이었다. 세상이 잘난 시대에 가장 원시적인 행태는 자본과 권력의 공격 아래에서 나타난다. 진중권의 정명훈 옹호가 고까웠던 이유는 그가 그렇게 강조하고자 하는 예술의 자율성과는 별개로, 정명훈의 서울시향이 사실상 세종문화회관의 법인화를 위해 도입된 것이며, 환경파괴논란이 벌어진 한강예술섬 역시 정명훈의 서울시향을 위한 전용공간을 위해 구상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 때문이다. 


아무래도 루소에 대한 흄과 웰풀의 '공작'을 보면서,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 하지만 이를 당시 지식계의 허영과 신분제가 이뤄놓은 서구 근대의 합리주의가 체계적으로 식민화한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 책은 단순히 역사서를 넘어서는 시사점을 준다. 결국 루소에 비해 흄이 내상을 더 많이 입게된 결말은 흥미롭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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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광선 2020-02-29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꼭 읽고 싶게 만드는 멋진 리뷰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요이~~ 땅!!

 

 

 

누구는 유령이라고 하고, 누구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한다. 이름도 모른체 안방에 들여놓은 한 경제체제에 대해 '애비'를 말하듯이 두려워 하는 것보단 그 정체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다. 우리의 신자유주의가 시작한 기원을 알고 있다면 그 끝을 말할 수도 있으리라. 고로 끝을 말하고 싶다면 시작을 알아야 한다.

 

 

 

 

 

 

 

 

아니키스트로 소개되는 인류학자 그레이버의 경제사. 시장만능주의에 지쳐가는 사이에, 시장만 없으면 모든 것이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교환이 있는 한 관계의 한 형식으로 경제는 존재했다. 있던 것과 새로 생긴것을 구분할 수 있으려면, 과거의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볼 필요가 있다.

 

 

 

 

 

 

새롭게 번역된 지젝의 책. 지젝이 '지젝지젝'거리며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싶다. 게다가 지젝의 사진을 대문으로 삼은 로쟈의 번역이라니. 지젝보다 더 궁금하다. 

 

 

 

 

 

 

 

 

  

 

분명 진화론은 모든 것의 이론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진화해왔고, 인간과 관계된 것들은 진화해왔다. 어떤 면에서 모든 변화가 곧 진화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이 진화해왔다면 어떤 길로 왔고 어떤 길로 갈지 궁금하기는 하다.

 

 

 

 

 

 

 

 

헉헉~~~ 40미터 달리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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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imos 2011-12-0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이 땅! 자기 반성을 철저하게 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논리와 사고의 출발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요이~~ 이거 일본식이라는 것 알고는 계신가요? 일제의 썩은 잔재를 즐어움으로 간직하고 게신 분께, 아직도 그러고도 윤봉창 열사 앞에 서있습니까?

냥이관리인 2011-12-09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몰랐습니다. 고치도록 할께요^^ 감사합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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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를테면, 이 책은 '세겹의 페스츄리'가 가득한 빵 봉지 같다. 시와 시에 대한 이야기가 한편, 이와 조응하는 철학 한 자락, 그리고 시와 철학의 종합... 마지막으로 읽을거리 목록. 

그리고 강신주라는 사람, 참 다작이다. 바로 앞선 책이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이었고, 지금은 12권짜리 제자백가 시대의 이야기를 낸단다. 얼마전엔 최근에 나온 책 중 가장 두꺼운 철학책을 내놓기도 했다. 정말 꾸준히를 넘어서는, 열심히 쓰는 작가다. 

2. 

 이를테면, 김정환과 마르크스를 비교한 한 장을 보자.  

   
 

스텐카라친 -김정환- 

그것은 먼 나라보다 가가운 젊은 날의 

방황, 다만 속절없이 거대하게 

출렁거리는 무엇이 거대하게 

무너지고 그곳에 우리의 길이 

세상보다 더 거대하게 열리는가 

앞으로 우리들의 생애가 

창백하고 친근한 동안 그것은 

뒤돌아보지 않은 수천만 명이 

피를 흘리던 시간의, 젊은 날의 영화 

다만 거대하게 

탕진되는 무엇이 거대하게 무너지고 

그곳에 끔찍하지 않은 세상이 

둥지를 틀고 잠을 잘 것인가 보라 

역사를 강물로 비유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세월도 

보라 옳은 것은, 사실 옳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역사 속에 

남은 자의 몫일 뿐이다 

남은 자의 기억은 옳지 않았다 

피비린 기억보다는 더 많은 것이 이룩되었다.

 
   

 작가는 당대에 청년들을 들끓게 만들었던 포이어바흐를 뒤집은 마르크스의 테제를 등장시킵니다. 즉, "대상의 압력에 저항하며 대상이 움직이는 방향을 거스르는 능동적인 작용"(203쪽)이라는 대상적 활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즉, 인간은 세상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방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놓은 인간의 조건 하에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한다.  

   
  승자들은 자유를 위한 인간의 투쟁이 실패했다는 기억을 우리에게 각인시키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아야만 합니다. 역사에 패자로 기록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더 좋은 조건을 남겨놓고 떠났다는 것을 말입니다.(206쪽)  
   

3. 

이와 같은 시와 철학의 성찬이 14개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괴로움'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전작인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과 비교해 보아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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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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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에릭 호퍼라는 사람, <길위의 철학자>라는 책으로 얼핏 살펴본 이 사람이, 신문지상에 등장했다. 바로 이 책때문이었다. <프레시안>에서는 대중운동 자체의 역동성과 필연성에 주목했다면, <조선일보>에서는 적절한 때에 끝나는 좋은 대중운동의 속성에 주목했다. 원래 아포리즘 형식의 글은 기승전결의 구성이 아니라, 다양한 결론들로 치닫게 되어있다. 상대적으로 불교의 법어와 같은 아포리즘이나 성경 속 잠언들이 그런 경우다. 

1.


호퍼의 부두노조 조합증
 

에릭 호퍼는 노동자 출신의 사회사상가다. 통상 노동자 출신의 글쟁이들이 호평을 받는 조건은, 특정 사상이나 이념에 포함되지 않을 경우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그가 1983년에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기도 한 이력에는 레이건 정권의 이데올로기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그의 말랑말랑함도 한 몫을 했으리라...(논외로 1983년은 테레사 수녀가 자유 훈장을 받은 때이기도 하다. 테레사 수녀와 관련해서는 히친스의 비판적 평가에 동의한다 --;;) 

 

그가 밑바닥의 삶을 살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래서 <거리의 철학자>라 불리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사유가 좀 더 의미가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그에 대한 설명의 빈약함 만은 보여줄 뿐이다. 정확하게 보자면, <맹신자들>에서 보이는 그의 사유는 혼동스럽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프레시안>에서 <조선일보>까지 인용이 가능한 그의 글이 바로 그 증거다.  

2. 

이 책의 원제는 <The true believer>다. 그런데 국역본인 맹신자의 '맹'은 눈을 감고있는다는 뜻이다. 대중운동의 조건으로서 진짜 믿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에 대한 조건과 구성이 달라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아무래도 호퍼가 글에서 다루는 나치즘이나 공산주의의 대중운동을 염두에 두고 부정적인 의미의 맹신자로 다룬 것 같다.  

하지만 아래의 인용에서 보듯이, 대중운동에 대한 열광은 너무나 손쉽게 이용될 수도 있다. 즉 호퍼가 주목하는 것은 대중운동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다양한 대중운동의 다양한 측면들을 서술하는 것에 가깝다.  

   
  노동자들이 자기가 어떤 전체의 일부라고 느끼는 것은 고용주에게 이익이 되며, 그 전체에 고용주도 포함된다면 더욱 유리하다. 강한 연대감은, 인종이 되었건 국가가 되었건 종교가 되었건, 두말할 것 없이 노동소요를 방지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다.(66쪽)  
   

  그렇기 때문에, 대중운동은 언제나 현재에 결박당할 수 밖에 없다. 단결조차 고용주의 이해관계와 부합되는 행위라니.. 그런 점에서 대중운동이 현재를 비하하는 것은, 어떤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대중운동이 추진력을 갖는 하나의 조건이기도 하다. 

   
  대중운동이 설정한 많은 목표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를 비하하는 운동의 일부가 된다. 현실적이고 그럴듯하며 가능한 모든 것은 현재의 일부다. ...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장하지 않고 순수하게 현재만 비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의 저열함을 아무리 한탄한들 미래의 전망이 현재보다 더한 퇴보이거나 변함없는 현재의 연속이라면, 현재의 삶이 아무리 고달프고 보잘것없더라도 하는 수 없이 감내하는 쪽으로 돌아서기 때문이다. (107쪽)  
   

 


만년의 호퍼
 

 분명 호퍼는 극단을 싫어한 것으로 보인다(한 권만 보고 그를 단정할 수는 없으니). 실제로 광신적 공산주의자는 냉정한 자유주의자가 되기보다는 광신적 애국주의자로 전향하거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개종하는 경우가 더 많다(129쪽)는 말을 했다.  

그래서 대중운동은 행동가에 의해 장악되는 것을 요구했다고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소유를 위한 행동가의 출현으로 대중운동의 역동성은 사라진다고도 볼 수 있다. 언제나 행동가는 대중운동의 열망을 자신의 손위에서 통제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대중운동'과 '나쁜 대중운동'이라는 호퍼 자신이 내놓는 구분은, 자신과 유사한 출신의 맹신자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요인기도 하다.

   
  행동가는 대중운동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 그러나 행동가의 등장은 대개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현재와의 전쟁이 끝난 것이다. 진정한 행동가의 목표는 세계 개혁이 아니라 소유다. 역동적 단계의 생명을 지탱해주는 숨결이 저항과 급격한 변화에 대한 열망이었다면, 최종단계는 주로 획득한 권력을 집행하고 영속시키는 문제에 집중한다. (216쪽)  
   
 
대중 정치의 시대, 정치판의 판짜기에만 집중되는 상황. 우리는 왜 여의도 금융가 대신 국회앞에서만 진을 치는 걸까. 참 복잡한 시대에 복잡한 글이다. 그리고 참으로 복잡한 사람이다, 에릭 호퍼라는 사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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