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내 존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문밖에 서서 연랑을 불렀을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황톳길에서는 뿌연 진흙탕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길가에 쌓아두었던 쇠로 된 농기구들에 맞아 잘게 부서지는 빗소리가 들려왔다. 빗방울이 내 얼굴과 베로 된 겉옷 위로 떨어졌고 나는 이 처마에서 저 처마로 뛰어다니며 우산을 가져오너라, 어서 우산을 가져오너라, 주위를 돌아보며 습관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마도 나를 미친 사람이라 여겼을 것이다. 마침내 연랑이 빗속을 가로질러 나에게 뛰어왔다. 연랑의 집에는 우산이 없었기 때문에 급한 마음에 그는 새까만 솥뚜껑을 들고 달려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솥뚜껑으로 머리를 가리고 대장간으로 뛰어들어갔다.

p.269 <나, 제왕의 생애>

 

위의 구절은 한 때 섭국의 왕이었던 사람이 난으로 인해 궁에서 쫓겨난 후 자신을 따르던 내시, 연랑과 함께 연랑의 집으로 돌아온 직후를 묘사하는 부분이다.

 

회사에서 구조조정이 있어서 한 순간에 생계 수단을 잃고 살아갈 목적마자 잃어버렸기에 이 구절을 읽고 나도 그렇다, 하며 눈물을 흘렸다면 이 부분을 발췌한 이유가 그럴듯 하려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재까지 삶을 돌아봤을 때 내겐 이렇게 극단적인 삶은 주어지지 않은 듯 하다. 이 부분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새까만 솥뚜껑' 때문이다. 베옷을 입고 진흙탕 위에 서 있으면서 그 처지를 잊고 '우산을 가져오너라'라고 소리치는 폐왕을 위해 연랑은 황급히 솥뚜껑을 들고 달려와서 비를 막아준다. 무겁고 까만 솥뚜껑. 그 모습이 새삼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여 눈물이 났다.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해보자면, 왕은 이 솥뚜껑을 시작으로 늙은 대장장이의 집에서 기거하게 된다. 하지만 그도 잠시, 사람들의 멸시와 비아냥은 우유부단하고 제멋대로인 왕도 바꾸는데, 드디어 자신만의 결정을 내려 줄타기를 하기 위해 광대패에 자신을 팔러 연랑을 두고 혼잣몸으로 길을 떠나기로 한다. 그 뒷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도록.

 

솥뚜껑 때문이라고 하긴 했지만 인생의 기로에 선 폐왕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나는 '또'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쳤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잘'다니고 있지 않았기에 그만둔 것이긴 하지만 어찌 됐든 괴로웠던 4개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전과 같이 비자 사진 찍고 올리고 하며 저 뉴질랜드 가요, 라고 페이퍼를 쓰면서 염장을 지르면 참 좋겠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러진 못하고 대신 직종을 아예 바꿔서 오늘부터 나는 새로운 경력을 쌓는다. 화이팅! 이라는 댓글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다. 누구 말마따나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느낌보단 삶의 연속이란 느낌이 강하다.

 

누군가는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걱정을 한다. 누군가는 아침마다 짜증섞인 큰 목소리로 날 깨우며 위기감이 없다고 혀를 쯧쯧 차기도 한다. 부러워하는 사람에게는 이 역시 또 다른 지옥일 것이라 대답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못하는게 뭐가 있겠냐며 잘 할 수 있을 것이라 안심시킨다. 아침마다 날 몰아붙이는 남자에게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의 진심을 알기에 그도 나의 진심을 알 것이라 생각한다.

 

전직장은 내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섭왕이 습관처럼 우산을 가져오라고 난리를 쳐 연랑이 가져온 솥뚜껑을 쓰고서야 겨우 비를 피해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했던 것처럼 나 역시 일과 사람을 모두 짊어지고 저 아래 땅속으로 꺼져드는 우울과 절망의 습관을 한동안은 버리지 못할 것이다.

 

다스리는 것, 핏물이 흐르는 정치에 섭왕의 성정이 맞지 않았던 것처럼 그 일과 사람들에 나의 성정이 맞지 않았을 뿐인데 마치 내가 잘못해서 끝까지 갈 수 없었던 것이란 생각이 가끔 든다. 사실 사직의 이유를 비상식적인 그 조직과 업무 구조를 핑계로 댈 때마다 매번 이 핑계들이 자기 위안인 것만 같다. 남들 잘못이라고, 이 조직의 문제였다고 말로 떠들어대지만 실은 적응하지 못한 내가 잘못한 걸까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책을 읽으며 마음 속으로 섭왕에게 계속해서 니 잘못이 아니야, 라고 응원해주었듯이 그 말을 내게 해주고 싶다. 앞으로 새로 시작하는 일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하고 괴로워서 그만둘 생각만 할 까봐 불안해하고 걱정하는 내게 니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겐 빗속을 달려나와 솥뚜껑이나마 씌워주는 이가 곁에 없기에 나라도 내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그래도 불안할 때면 진흙탕의 안개 속에 서있던 섭왕을 떠올려야겠다. 네 잘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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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2-0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

(하지말라는 거 하고 도망치기)=3=3=3=3=3

Forgettable. 2012-02-09 19:21   좋아요 0 | URL
흥 ㅋㅋㅋ

2012-02-08 14: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9 1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lazydevil 2012-02-08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가세요? 서운해요.

Forgettable. 2012-02-09 19:23   좋아요 0 | URL
갔으면 좋겠다규요..
정독하십시오.
(ㅋㅋㅋ)

lazydevil 2012-02-10 13:20   좋아요 0 | URL
두번이나 읽었거든요. 글구 또 읽어 봐도 이상하게 또 가는 걸루 읽히네요...
뭐 저는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군요.ㅋㅋ

Forgettable. 2012-02-10 13:42   좋아요 0 | URL
ㅋㅋㅋ 두번이나 읽어주셨다니 황송할 따름^^
음, 내잘못이 아니란 말은 참 다정한 것 같네요. 감사 ㅎㅎ 대낮출근중이에요. 남들이 출근하지 않는 시간에 이동하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출근길을 기분좋게 만들어줘요.

레와 2012-02-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선을 보래요. 난 꽥 소리를 질러버렸어요. 아.. 두통이야..=.=

Forgettable. 2012-02-09 19:24   좋아요 0 | URL
전 소리를 지르는 대신
내 스펙과 집안과 외모와 성격에 맞는 신랑감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고, 하나라도 빠지면 난 평생 살 수가 없다고 조근조근 설득을 하지요. ㅎㅎㅎ

꼬마요정 2012-02-0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고싶어졌어요. 아.. 읽고 싶은 책은 너무 많아요...ㅜㅜ

파이팅!!!

(하지 말라는 거 하고 도망치기2)=3=3=3=3=3=3=3=3=3

Forgettable. 2012-02-09 19:2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전 읽고 싶은 책은 없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고자 노력은 해요.
신간체크, 남들 서재 체크, 를 하지 않으니 책욕심이 줄긴 하네용 ㅋㅋ

Arch 2012-02-09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화이팅 대신 추천했어요^^
여기랑 나랑 안 맞아, 라고 생각하면 될텐데 아냐, 내가 뭐가 부족하고 부족하다는 자책으로 이어지고 말아요.
그렇지만 그래도 잘 할 수 있을거야.

Forgettable. 2012-02-09 19:26   좋아요 0 | URL
잘했어 아치~!!

자책하지 말자. 구리게 살지 않을 수 있는데, 참고 꾸역꾸역 구리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거에요. 그쵸?

버벌 2012-02-12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 (하지 말라는 거 하고 도망치기3!!!! )
보고 싶어요. 그래서 책 구입해야겠어요 ㅎㅎ

위의 위의 레와님과의 댓글들을 보고난뒤...

전 이제 선도 잘 안 들어옵니다. 그나마 들어오던 선. 두통이 몰려와서 꽥 소리지르며 나가지 않겠다고 했고, 그 뒤엔 조근 조근 설득도 했었는데. 이젠 그렇게 버티기엔 남들 시선이 완전~ 따가울 정도가 되었어요.(전 그걸 극복하지 못합니다) 네. 전 선보러 갔었어요. 하지만 결과는 암울이죠. 나가든 나가지 않던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어요.

Forgettable. 2012-02-15 09:22   좋아요 0 | URL
전 쑤퉁의 책들 정말 하나도 빼지않고 다 좋아요. 어쩜 그렇게 다 하나같은지.. 작가 편식이 심한 편이라 좋은 작가의 책은 거의 한번이 읽어버리는데 쑤퉁처럼 안전빵인 작가도 드문듯해용^^
음.. 선은 사실 저도 나간적이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아욱ㅋㅋ 진짜 시러 ㅋㅋ

진주 2012-02-1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파이팅!'하면 안 되는거죠? ㅋㅋㅋ
이미지로 올린 그림도 아름다워요.저런 걸 '진주스럽다'라고 표현하지요ㅋㅋ
물론 저는 포슬포슬하지만 무릎 나온 수면바지에 + 우리아들한테 물려받은 면티가 저으 빠숑이지만요..
(아들한테 물려받은 면티요,,,저거 버리기 아까워요. 뭐래더라? 비타민 티셔츤가..암튼 피부에 좋은 뭘 집어넣어 만든 면인데 돈을 솔찮게 많이 주고 샀고요 또 입으면 감촉이 넘 좋아요. 입으면 내 몸과 하나가 되는 그런 아주 편하고 보드라운 옷이라...<--이거슨 구질구질한 변명)

Forgettable. 2012-02-17 11:23   좋아요 0 | URL
오 비타민 티셔츠!!!! 확 땡기네요. 한번 어떤건지 찾아봐야겠어요. ㅋㅋㅋㅋ
저도 수면바지 너무 좋아해요. 베개도, 이불도 다 그 수면바지 재질이에요. 그러니 침대를 너무 좋아해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오늘은 큰 맘먹고 글 하나 써볼까 하고 빠져나왔습니다. ㅋㅋㅋ

진주스럽다.. 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