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다른이와의 관계를 막 시작하려 하던 참이었다. 그는 내 친구의 친구였는데, 전여자친구와의 관계가 틀어져 심적 상황이 안좋다고 들었고, 우리의 술파티에 잠시만 들렀다가 간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반대로 그는 기분이 좋아보였고, 자리를 일찍 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진 상태라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과는 달리, 그닥 강권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술까지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다같이 취해가기 시작할 무렵 난 그의 강한 눈빛을 언뜻 느꼈다. 그는 어느새 내 옆자리로 와 있었고, 얼핏 들으면 다같이 놀자는 것이었지만 또 얼핏 들으면 데이트 신청 같기도 한 말을 해서 난 그가 날 바라보는 눈빛과 나를 향한 초조한 미소가 신경쓰일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모습 저편에서 당당함이 느껴졌고 그날 새벽, 나는 직감했다. 내가 시작하려고 했던 다른이와의 관계는 이미 끝났다는 것을.
다음날 약속했던 대로 권총 사격장에 가자고 전화가 왔다. 난 전날 숙취가 가시지 않아 쉬고싶다고 얘기했고 숙취가 좀 가신 그 다음날 그는 그의 트럭을 끌고 나를 태우러 내가 사는 아파트 앞으로 왔다. 운전을 하며 그는 내내 담배를 피워댔고 그의 손은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펍에 도착하자마자 우린 또다시 맥주잔을 비워대기 시작했고, 펍 안에 있던 그의 동생과 친구들을 소개시켜주며 그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귀빈 대하듯 정중히 대했다. 그는 신세계와도 같았다. 체크무늬 남방에 가디건, 멜빵과 청바지. 파티를 할 땐 정장, 베레모, 빡빡 민 헤어스타일, 청바지에 청자켓 패션을 당연시하고, Oi 뮤직에 열광하고, 광적으로 싸우고, 백인우월주의를 혐오하는 마초 중의 마초 스킨헤드였다.
그런 사람이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는 건 뭐랄까, 설렌다기 보다는 흥분된다고 해야 하나. 내 평생 애인으로 삼을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해봤던 사람이 눈이 하트가 되어 날 바라보며 웃는데, 머리가 멍해지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담배를 피우러 펍 밖으로 나와서, 추워하는 내 어깨를 감싸며 그는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했다. 평소처럼, 만난지 이틀만에 개뿔 사랑타령이야, 하면서 비웃으려 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진심은 무거운 것인줄만 알았는데 그보다도 가벼울 수가 없어서 들뜬 마음이 불안할 뿐이었다. 가벼워서 무거운 마음이 눈발과 함께 흩날렸고 그 때 나는 그 순간이 행복이란 걸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