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가려고 화장을 하는데 뭔가 어두워서 보니 블라인드를 걷지 않은 걸 발견했다. 어두운데서 화장을 하면 꼼꼼하게 할 수 없기도 하고 특히나 요즘 건조해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화장이 떠버려서 화장할 때 빛은 필수. 황급히 블라인드를 걷어내니 조명을 무색하게 하는 태양빛이 들어온다. 어제 한 마사지 필링이 조금 효과가 있으려나 하며 거울을 들고 다시 화장을 하는데 문제는 뜬 화장보다 눈가의 주름.  

언제나 웃을 때 눈부터 웃어져버리니 눈가의 주름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만 조금 짙어진 것인지 오늘따라 확연히 눈에 띈다. 아보카도가 함유된 비싼 아이크림을 항상 바르고 있으니 더 이상 노력할 것도 없고, 세월의 흐름을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슬퍼할 것도 없는데 괜히 울적해졌다. 웃을 때 생기는 주름은 웃을 때 생성되는 주름방지 호르몬(?) 덕택에 걱정할 일이 없다고 들어서 이를 철썩같이 믿고 양껏 웃어제꼈는데 이젠 노화방지를 위하여 조금 참아야 할까 고민된다.  

예전에 취업 준비 스터디를 할 때 만났던 사람들 중에 약간 마음이 있었던 오빠가 있었다. 심각했던 건 아니었고, 마음이 깊어지기도 전에 스터디 멤버 중의 하나랑 커플이 되어서 그냥 접어버리고 말았는데 밴쿠버에 도착한 날, 메신저로 쪽지가 왔다. 기쁜 소식이 있다고. 대번에 결혼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만감이 교차할 수 밖에. 인연이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내가 밴쿠버 백패커 싸구려 침대 위가 아니라, 그 신부 자리에 서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만약 내가 그 오빠를 꼬시는데 성공해서 캐나다고 뭐고 계획할 생각조차 못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사랑하는 그 사람과 결혼을 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결혼을 종착지점으로 여기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새로운 시작점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결혼을 하면 방황이고 젊음이고 뭐고 다 끝날 것만 같다. 그래서. 웨딩사진을 보는데 무척 부러워졌다. 나는 내가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둥둥 떠다니기만 하는데 그들은 그 둘만의 따뜻하고 안락한 보금자리를 마련한거니까 그게 참 좋아 보인다. 만약 3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스터디 모임을 시작하게 된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사실 모르겠다. 관계라는 것이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단히 고민할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둘이 사귀게 냅두겠지. 나는 2007년도 하반기 취업에 실패하고는 인도로 떠났을테고.

생각해보면 결혼을 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고 다니는 건 어딘가에 붙을 '아직은' 이라는 시간부사를 생략한 것일테다. 언젠가는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눈가에 주름을 보며 홀로 쓸쓸히 늙어감이 어떤 것인지를 약간이나마 체감한 지금도 실은(이런 내가 참 어이없기도 하고 짜증도 나지만) 나의 모든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다. 하루 하루가 시험이고,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폭풍우를 천막 하나만 갖고 기다리고 버텨야 하지만 아직은 이걸 끝낼 자신이 없다.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는 평온한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 후회와 함께 눈을 뜨는게 어떤건지 잘 아니까. 잘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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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6 1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7 0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7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6 1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7 0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0-06-1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회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난 이마에 주름 자글자글 ㅎㅎㅎ

Forgettable. 2010-06-17 02:39   좋아요 0 | URL
고난을 받아들일 망정 후회는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 ^^
앗 이마에요? 안보여요!! 이마는 앞머리 내리면 되잖아용 히히

L.SHIN 2010-06-16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그 곳에, 당신이 예상하지 못 했던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죠.
뽀게님의 마음이 닫혀 있다면 보이지 않겠지만 -

Forgettable. 2010-06-17 02:41   좋아요 0 | URL
오 제 마음은 너무 열려 있어서 바람조차도 쉽게 들어오는 걸요. ㅋㅋㅋ
음. 사람 일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깐 언제나 닫혀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이드 2010-06-1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캐나다 라이프 얘기들 좀 풀어봐요~ 사진도 팍팍 올리고~
지나고 보면 남는게 '페이퍼' 라는 서재명언이 ㅎㅎ

* 6월에 '철서의 우리'가 나온다는 소식이 .... (무려, 상중하 세권일세!)

Forgettable. 2010-06-17 02:44   좋아요 0 | URL
아하하 재미는... 사실 재미는 아직; 제가 워낙 조용하고 평온한 도시에 살고 있는지라. ㅋㅋ
조만간 추려서 올리지요 :)

두둥.. [철서의 우리].. 찾아보니 벌써 표지도 나왔군요. 떨려. 두근두근
그러고보면 저 지금 교고쿠도 금단증상인 것 같기도 -_-;; ㅋㅋㅋㅋ

무스탕 2010-06-16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님 거기서 저렇게 깃털펜으로 저렇게 멋들어진 글을 쓰시는건가요? +_+

눈가의 주름은 웃는자만의 특권이에요. 웃음이 없는 자들은 눈썹 사이에 내천자가 생기는거죠. 좋은거니까 그냥 두세요 ^^

Forgettable. 2010-06-17 02:46   좋아요 0 | URL
아휴 그럴리가요! 전 그저 사진만 찍었을 뿐입니다. ㅋㅋㅋ

아 내천자.... 내천자가 있던 직장 상사가 급 떠오르며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직장생활이 추억으로 남아있다는 게 완전 행복해지네요. 흐흐 네 그냥 둘게요. 주름 방지(?) 기술이 점점 발달하겠죠 뭐 ^^

Joule 2010-06-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결혼은 종착점이라는 생각, 맞아요. 저는 결혼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혼할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결혼은 종착점이에요. 결혼하면 어쨋든 하나를 얻으니 다른 하나를 잃죠. 저는 잃게 될 그것이 더 아까워 결혼을 못하는 것일 테고, 결혼하는 이들은 얻게 될 그것이 잃게 될 그것보다 더 탐이 나는 거겠죠.

라로 2010-06-16 16:22   좋아요 0 | URL
얻게 될것이 더 탐나서 결혼했드만 잃어버린것 때문에 후회되더만요,,,

저도 눈가 주름 작렬이에욥!! 그래서 안웃으려고 했더만 입가에 八자 주름 잡히더라는,,,ㅠㅠ
그러니 차라리 많이 웃는게 더 나아요~.늘 웃고 지내세요~.^^

Forgettable. 2010-06-17 02:51   좋아요 0 | URL
쥴님. 맞아요. 제가 말하고 싶었던게 그거 ㅋ

언젠가는 제가 지금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잃어도 좋다, 이제 만족한다, 이런 시간이 오게 될까요?
아니면 적어도 다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 결혼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더라도, 그런 시간이 오지 않는걸 다행으로 여길지도 모르겠어요.

나비님. ㅠㅠ 팔자주름 ㅠㅠ 저도요 ㅠㅠ ㅋㅋ 왜 동질감을 느끼지;;;
항상 선택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미련이 남나봐요. 요새 별로 웃을 일이 없어서 주름 걱정은 됐다능;;ㅋ

루체오페르 2010-07-06 15:53   좋아요 0 | URL
으악 쥴님!
이렇게 핵심을 관통하는 멋진 말씀을...ㅠㅠb

비로그인 2010-06-17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도 하다가, 빵도 만들었다가, 뭔가 배우러 어딘가에 훌쩍 떠났다가..
재밌는 삶을 살고 있으시네요~ :D

조바심 내지 않는 듯 보여 좋아보입니다. 뭔가를, 혹은 자신의 그 무엇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진행과정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나저나 저 깃털펜은 그냥 새 깃털 빼서 쓰는 거랑 비슷한 건가요? ^^

Forgettable. 2010-06-19 14:55   좋아요 0 | URL
호오. 저 요즘 초조함과 조바심때문에 거의 혼절상태로 지내고 있는걸요;;;;;;;;

여튼 응원이라고 생각하고 힘 내겠습니다. ^^

깃털펜은 관광갔다가 찍은 것인데 ㅋㅋ 깃털 끝을 뾰족하게 해서 잉크를 묻혀서 쓰는 것 같아요.
매력적이에요.
저런 펜이라면 매일매일 종이에 글 쓸 것 같아요. 히히

순오기 2010-06-2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이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표지 같아요. 아니 조금 더 멋져요~~~ ^^

Forgettable. 2010-06-22 11:54   좋아요 0 | URL
저 표지 디자인 할까요?????????????
어휴 순오기님 때문에 제 자뻑이 늘어만 갑니다요 :)

ljh 2010-06-2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결혼한 사람들이나 직장에 매여있는 사람들은
언니의 자유로움을 부러워할것임을(자기합리화 인가?ㅋㅋ)

결혼한지 5개월된 오빠친구가
오빠한테 결혼하고 나서 보니
그렇게 자유로운 총각들이 부러울수가 없더라더라ㅋㅋ
아무래도 이제 다시는 돌아갈수 없는 시절이기 때문이겠지ㅋㅋ

여튼 결혼이란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렵고 아이러니한것같아
하고싶기도 하고 이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않기도하고

뭐 언젠간 하게되겠지만
우리 회사 팀장님이 장작10일 호주출장을 가셨어
지금 겨울이라 춥기만할껄요.
라고했는데부럽더라..........ㅋㅋㅋㅋㅋㅋ

월요일아침부터 할일없어서 댓글에 주절주절

Forgettable. 2010-06-22 11:56   좋아요 0 | URL
5개월만에 자유를 부러워한다니. 그 사람 결혼도 참;;
나중에 애낳으면 어쩔려구 ㅠㅠㅠㅠ

하지만 자유에는 그만한 고통이 수반되는 법.... ㅇㅈㄹ ㅋㅋㅋㅋㅋㅋㅋㅋ

호주 출장이라.
나 호주에 있는 친구한테 여름방학 즐겁냐고 물었다가 쿠사리먹었다능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긴 바다가 없어서 호주에 비치가 그립기도 해.

오늘 학원에서 there is no 빗취 here. 라고 했다가 선생님이 there is no 비이취... 라고 정정해줬음 -ㅁ-

루체오페르 2010-07-06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일보 총수 '건투를 빈다'의 김어준님이 말하길...
'선택의 총합이 바로 당신이다'
안철수 교수님께서 말하시길...
'말과 생각이 그 사람이 아니라, 행동과 선택이 그 사람이다'
라고 하셨죠.
인생은 항상 선택의 연속이고 기회비용을 따져가며 살아가야 하기에 어려운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뽀겟(이라고 엘신님께서 부르시길래,저도 괜찮을까요?)님, 하이드님 서재에서 타고 왔습니다.루체오페르 입니다. 댓글들에서 뵙긴 했는데 인사는 처음 드리네요. 이런 멋지고 유쾌한 글들을 쓰시는줄 알았다면 진작 왔을텐데...즐겨찾기 서재 추가해뒀으니 자주 뵙겠습니다.^^
캐나다 계시는군요. 공부 하시나봐요? 무슨 일을 하시든 제 느낌엔 열심히 살고 계시는듯 합니다,그러니...네,잘 사실 겁니다. 뭣보다 건강하세요.^^

Forgettable. 2010-07-07 04: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루체오페르님. ㅎㅎ 반갑습니다. 늑대 사진은 예전부터 익히 봐오고 있었어요. ㅎㅎ
유쾌한 글이라니 정말 과분한 칭찬인데요. :)

선택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전 거기에 운도 집어 넣고 싶어요. 여기에 와서 보니 열심히 사는 건 필요 없고, 운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시작하려고 하면 '열심히'보다는 행운이 더 중요하더라고요. ㅠㅠ 잘 살아야죠. 힘들게 왔으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