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in Love (영국판, Paperback)
알랭 드 보통 지음 / Picador / 2006년 1월
구판절판


Stendhal believed that love could be brought about only on the basis of a fear of losing the loved one and Denis de Rougenmont confirmed, "The most serous obstruction is the one preferred above all. It is the one most suited to intensifying passion.' To listen to this view, lovers cannot do anything save oscillate between the twin poles of yearning for someone and longing to be rid of them.-50쪽

Certain areas and coverings of the body say more about a person than others: shoes suggest more than pullovers, thumbs more than elbows, underwear more than overcoats, ankles more than shoulders.-54쪽

'By forty, everyone has the face they deserve,' wrote George Orwell-92쪽

Happiness with other people seems bounded by two kinds of excess: suffocation and loneliness-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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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19. 일을 지연시키는 단순한 원인인 의심은 우유부다함으로 불리며, 이 우유부단함은 분명 '악 중에 가장 나쁜 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위베르 그르니에 <위대한 도덕 이론들 Grandes Doctrines morales>

 

우유부담이 왜 최악일까요? 잘못 행동하는 것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편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물음들에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잘못 행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데카르트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면에서 우리는 결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의하면 선택은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방법과 그 선택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끈기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정신은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유한한 것으로 이해력, 즉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한한 것으로 의지 또는 판단력, 다시 말해 긍정하고 부정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이해력은 유한하니까요. 하지만 의지는 무한하기에 모든 것을 욕망할 수 있습니다. [...] 모든 문제는 우리 내부의 이러한 불균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우리 의지는 그것이 '참'이라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긍정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실수의 개연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수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이해하는 것, 이해의 행위)을 확인하는 것(판단하는 것, 의지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의지가 무한하듯 실수를 저지를 개연성 역시 무한합니다. 우리는 이해력이라는 희미한 등불 아래, 어둠 속에서 한없이 빨리 그리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습니다.

 

p21. 행동의 비결은 바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법서설>제3부에서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두 번째 원칙은 행동할 때 최대한 단호하고 확고한 태도로 밀고 나가야 하며, 아무리 의심스럽다 해도 일단 견해를 취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이 확실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변합없이 계속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여행자들이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처럼,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빙빙 맴돌며 방황하지 말고 한자리에 멈춰 서 있지도 말 것이며, 우연히 어떤 방향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항상 같은 방향으로 최대한 똑바로 걸어가야 하며 사소한 이유들로 절대 방향을 바꿔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확히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딘가에 다다를 것이고, 아마도 낯선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p24. 숲속에서 길을 잃은 더카르트는 어떤 길을 따라갈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그것이 가장 합당한 선택인 양 자신의 선택을 집요하게 밀고 나간다. 그처럼 확고한 태도로 자기가 선택한 길을 충실하게 따라감으로써 그 우연한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든다. - 알랭, <관념>

 

p269. 매그니토는 공공의 안전을 위한거라고 주장하면서 캠페인의 선두에 서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상원의원을 납치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따져 의원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를 자화시켜 돌연변이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교환을 지켜봅니다. 한편에는 힘을 받는 의원, 다른 한 편에는 교환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힘을 잃어가는 매그니토.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침에 따라 매그니토 자신은 녹초가 됩니다. 그 작업은 에너지를 소진시키니까요. 그는 자신에게 해를 입혀야만 그에 비례해서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오의 본질입니다. 증오는 '우리 외부'에서 행하는 것을 '우리 내부'에도 행합니다. 그래서 매그니토의 힘은 결국 고갈됩니다. 증오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p271. '나는 인간의 신체가 오직 시체로 변한 경우만 죽었다고 인정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경험은 그 반대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라고 하기 주저될 정도로 심한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정리에 대한 주석>

 

p325. 인간의 문제는 현재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어떤 점에서 자신이 완전한지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가 더 나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현재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즉 희망은 현재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희망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희망이란 현재에 대해 절망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환멸로부터 동시에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망을 잃는 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느 ㄴ것을 보기 위해 우리에게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더 현재적이 됩니다. 말하자면, '현재에 대해 더욱 현재적'이 된다는 얘기지요. 현재의 것, 그리고 현재의 완전함을 이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음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p334. 철학은 이성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성이 곧 사랑이라는 의미지요. 이성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누구에게도 금지되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똑같은 거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똑같이 갖기 위해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온전하게 자기를 내어주니까요. 더욱이 이성의 영역에서는 타인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그가 이성을 갖길 바라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성을 갖고 있고 능동적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역시 가능한 한 능동적이며 그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것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성적인 인간은 오히려 이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신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동시에 신을 알 수 있다. 모든 선 가운데 오직 진리만이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거실 수 있다. - 알랭, <스피노자>

 

p349. 많은 능력을 발휘하는 신체를 가지게 되면 정신 역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체가 다른 신체보다 동시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능력이 우월할수록, 그 신체의 정신 역시 많은 것을 동시에 지각하는 능력이 우월하다. 그리고 어떤 신체의 행동이 오직 그 신체에만 좌우되며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신체와 경쟁하는 다른 신체의 수가 적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판명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그만큼 더 증대된다. - <에티카>, 제2부, 정리 13, 주석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고 다양한 것들을 만나 적합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능력은 동시에 발달합니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논문에서 입증한 결과입니다. 그는 신체와 정신은 단일한 것이며, 두 가지 관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신에서도 일ㄹ어납니다. 우리가 신체와 정신을 갈라놓을 수 없는 이상,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효과나 결과 또는 반향이 정신에 일어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반향이 아닙니다. 반향이란 원래 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응하는 효과로 상정되니까요.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정신의 생각에 해당합니다. 신체에 일어나는 일은 동시에 우리 정신에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정신까지 부여받은 인공적 존재의 신체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면, 그 존재의 정신은 더한층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의 신체가 능동적으로 됨에 따라 그의 정신은 "직접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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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게 뭔지도 겪어봐야 안다]

p87. 아름다운 것을 경험해야 뭐가 아름다운지 안다. 한강 다리의 야경이 바뀌고 나니, 조명의 기능에 눈뜨게 되고, 외국의 도시들이 밤에 더욱 아름다워 보였던 이유를 깨닫게 된다. 행복한 경험을 해야,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안다. 쾌적한 경험을 해야 어떻게 쾌적해지는가를 깨닫게 된다.

 

[재미로 자아를 확인하라]

p172. 살다 보면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다. 그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불과 몇 개월, 몇 년에 불과한 사장, 은행장, 장관의 지위로 평생을 사는 사람이다. "저 분은 전에 무슨 은행장이었어.", "저 분은 전에 장관이었어"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 장관, 사장, 은행장 이후의 삶은 없다. 불과 몇 개월, 몇 년의 지위로 수십 년을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자신의 노후에 만족할 리 만무하다. 잘못된 것이다.

"저 분은 중국 고전 전문가야", "저 분은 민물낚시광이야", "저 분은 난초에 미친 분이야" 이렇게 소개되는 이들은 전에 장관, 사장한 사람들 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다. 진짜 성공한 사람은 노후의 아이덴티티가 분명한 사람이다. 이 아이덴티티는 자신만의 재미로 얻어지는 것이다.

 

내겐 과거의 영광도 없지만, 과거의 명칭으로 살아가고 싶진 않다. 지금의 내가 어떤지가 가장 중요하다. 시야가 좁아서 미래까지는 볼 수 없지만, 현재에 만큼은 충실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체력과 열정이 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되는 한 내가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작업을 찾고싶다.

 

p179. 독일의 내 지도교수는 사람이 하는 일에 "can not(할 수 없다)"은 없다고 주장한다.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다. "can not"이 아니고 "will not(하고 싶지 않다)"이라는 것이다.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잘 들여다보면 다른 일에 비해 우선순위가 밀려 내가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우리가 쉴 수 없다. 바빠서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다른 일에 비해 노는 일, 쉬는 일이 뒤로 밀린다는 뜻이다. 즉 놀고 싶지 않고, 쉬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계속 쉬지 못해, 놀지 못해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다. 쉬는 것, 노는 것, 일하는 것, 바빠서 정신 없는 것. 이 모든 것은 내 선택의 결과다. 여기서 재미있게 노는 것, 쉬는 것이 뒤로 밀릴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재미있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삶의 목적을 항상 뒤로 미룬다. 바쁘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행복해지겠지.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행복한 시간은 절대 오지 않는다. 그저 죽을 때까지 바쁠 뿐이다.

 

[즐겁지 않으면 성공이 아니다 - 뻔한 질문과 의외의 답]

p189.

(가) 부패한 정치인과 결탁한 적이 있으며 점성술로 결정을 내리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매일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9~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나) 회사에서 두 번 쫓겨난 적이 있으며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때 마약을 복용했고, 매일 한 번씩 위스키의 1/4을 마신다.

(다) 전쟁 영웅으로 채식만 하고 담배도 안 피고 필요할 때만 맥주를 조금 마실 뿐이다. 불륜은 한 적도 없고 죽을 때까지 단 한명의 애인만 사귀었다.

 

조금 받아들이기 껄끄럽겠지만 (가)는 루즈벨트, (나)는 처칠, (다)는 히틀러의 순서이다. 모두 사실이다. 루즈벨트나 처칠의 음주 습관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생활 태도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반면 히틀러의 개인 생활 습관은 거의 청교도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루즈벨트와 처칠에 대한 부정적인 서술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반면 왠지 훌륭한 사람일 것 같았던 (다)의 주인공이 히틀러라고 할 때는, 밥을 잘먹다가 돌 씹은 느낌이다.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사회적 전형성에 그야말로 '느닷없이' 히틀러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훌륭한 정치가는 술 담배, 마약에 가까워서는 안 된다. 성실과 근면은 기본이며 여자 문제 또한 알려진 바 없어야 한다. 알려졌어도 가능한 한 쉬쉬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함'의 전형성에 어긋나면 많은 사람들이 상처 받기 때문이다.

 

[성공중독의 5가지 'D']

'성공중독'은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D'를 포함하고 있다고 퍼샬Pearsall이라는 심리학자는 이야기한다.

 

   결핍deficiency 월드컵 당시 우리의 목표였던 16강에 오른 뒤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감동했지만, 따지고 보면 목표를 이룬 뒤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성공중독'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다. 성공중독은 우리를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게 한다.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할 수 없는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심doubt 아무리 주위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축하하고 부러워해도 정작 자신은 자신이 성공한 줄 모른다. 오직 자신보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만 눈에 띌 뿐이다. 자신의 성공에 대해 의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하 직원들에 대한 의심도 갈수록 늘어간다. '세상에 정말 믿을 놈' 없다고 생각한다. 매일 돈을 도둑맞는 기분이 든다.

   분리detachment 이제까지 맺어왔던 관계들로부터 이탈되어가는 과정을 뜻한다. 집에 와서도 온통 일에 대한 생각뿐이다. 가족들과 함께 한 정말 오랜만의 휴가 동안에도 핸드폰의 배터리는 아침저녁으로 충전시켜야 하고, 이메일과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야 마음이 놓인다. 몸은 가족과 함께 있지만 마음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실망disappointment 아무리 많이 가져도 자신이 소유한 것이 실망스럽다. 자신이 이미 소유한 것에 감사하기 보다는,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괴롭다. 남들의 장점과 자신의 장점을 비교하기보다는 남들의 장점과 자신의 단점을 비교하며 항상 열등감에 젖어 있다.

   우울depression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만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건강한 사람도 우울증의 덫에 걸리면 어지간해선 헤어 나오기 힘들다. 그 잘생기고 돈 많은 홍콩배우 장국영도 호텔방에서 뛰어내렸다. 장국영에 비하면 나는 돈도 그리 많은 것 같지 않고, 배는 갈수록 나오고, 머리는 샤워할 때마다 한 움큼씩 빠진다. 게다가 다리까지 짧지 않던가. 그래도 호텔방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항상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 부족한 것만 보게 하는 성공 중독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공허함과 절망감에 빠지게 한다. 이들에게 죽음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 갖지 못한 것보다 현재 이룬 것과 가진 것을 보자

 

[진정한 성공에 포함된 3가지'C']

진짜 성공은 세가지 C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선 '만족contentment'이다. 자신이 이룬 것에 대해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면 성공한 것이다. 두번째는 '평온함calmness'이다. 아무리 성공했다고 여겨져도 마음에 평온함이 없으면 성공이라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관계connection'다. 자신을 둘러싼 사랑하는 사람들과 성공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아무리 성공했다 여겨져도 주위에 그 기쁨을 함께 할 사람이 없다면 그 성공은 무의미한 것이다. 이 세가지C를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성공은 자주 웃고 많이 사랑하는 것이다'. 돈으로 인해 자주 웃을 수 있다면 가능한 한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높은 지위가 많이 사랑하는 것의 필수조건이라면 가능한 한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러나 분에 넘치는 돈과 지위 때문에 웃음이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서 떠난다면 그 성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흠..내겐 만족밖엔 없는 것 같다. 쩝쩝.. 게다가 내게 가장 어려운 건 사랑이다. 가끔은 스스로가 경미한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싶다. 물론 아니겠지만, 일반적인 기준에 비해 사람에 대한 애정의 강도가 약한 것 같다. 내 안엔 사랑이라는 감정이 남들보다는 조금은 결핍되어 있는 것 같다. 이건 어떻게 채워넣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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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말하는 대로 되어간다 - 스스로 믿고 사랑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p111. 스스로를 믿고 사랑하는 일이 중요한 까닭은, 그렇지 못할 경우 지나치게 남의 말, 남의 판단, 남의 이목에 휘둘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두고 저 옛날의 현자 에라스무스도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합할 수 있는가? ... 대개 친모보다는 계모와 비슷한 자연은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총명하면, 남들에 대해선 감탄하는 마음을 심어 놓는다. 그런 성향은 삶을 우울하게 하며 그로 인해 인생은 모든 이점과 매력을 잃고 만다."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줄 줄도 모르는 법이다." 언젠가 오빠가 내게 해준 얘기였다. 위와 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말이다. 난 스스로 다른 이들로부터 무언가를 받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해주어서 고맙다는 느낌보다는 빚지는 느낌이 컸다. 이런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때 그들이 언젠가는 내게 갚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편으로 내가 스스로 사랑하지 못해서 이런 얘기를 듣는게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스스로를 뭔가를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기에 그만큼 남들에 대한 애정도 느끼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나도 가끔은 다른이들이 느끼는 애뜻함을 느껴보고 싶다.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감정 점수 체크하기]

 

p203. 허밍웨이의 문체는 단순, 간결한 것으로 유명하다. 빙빙 돌리거나 늘어지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난 글을 쓰는 내내 어느 정도에서 그치려고 애썼고 그건 엄격하고 유용한 규칙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에게 전범이 되어준 사람은 에즈라 파운드였다. 파운드는 작가가 너무 많은 단어를 사용하면 무능력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문장론이 분노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분노는 대개 당사자의 무능력을 드려내는 것 외에 별 효용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분노야말로 어느 정도에서 그치려고 애쓰는 편이 좋다. 또한 그것이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유용한 규칙이 되어준다면 삶의 많은 부분에서 낭비와 손실을 줄일 수 있다.

 

p210. <화를 다스리는 법>

 

1. 왜 화가 났는지, 상대방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만 간결하게 이야기하라

   이 방법을 터득하려면 화를 낼 때 자신이 하는 말을 녹음해서 들어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 자기가 왜 화가 났는지, 상대방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는 전혀 말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얼마나 잘났고 상대방이 얼마나 못났는지 이야기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 불필요한 에너지를 방출하지 마라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꼭 나오는 장면이 있다. 미친 듯이 화를 내던 사람이 갑자기 푹 쓰러지는 장면이다. 적절한 분노 표현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3.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충동을 절재하라

   분노할 때 처럼 가학적이고 공격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와 같은 공격을 받은 사람은 대개 원망과 앙심을 품게 마련이다. 언어적인 폭력은 신체적인 폭력보다 오래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신체적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전치 6주 혹은 6개월을 간다면 언어적인 폭력으로 인한 상처는 최소한 전치 6년은 간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부메랑과 같아서 자기가 뿌린 씨는 자지가 거두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화가 날수록 더 절제해야 한다.

 

4. 상대방에게도 자기 입장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주라

   앞서 말했듯이 분노 표현은 간결 명료해야 한다. 따라서 내가 화난 이유를 분명하게 전달했다면 이번에는 상대방이 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인간관계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상처는 상대방이 자기 마음속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데서 생겨난다.

 

5. 분노는 화가 난 후 23시간 57분 후에 표현하라

   분노의 마지노선은 대개 하루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지금 화를 낼 경우 상대방을 모욕하는 이야기만 할 것 같으면 일단 하루만 참아보자고 생각하라. 다음날이 되면 대개는 그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가 나면 일단 23시간 57분 후에 보자고 생각하라. 그리고 화를 내더라도 딱 3분만 하고 잊어라.

 

[일단 칭찬하고 지지하고 격려하기 - 사람의 마음은 메아리와 같다]

 

p219. 저명한 정신분석가이자 집단치료 전문가가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 모임을 갖게 되었다. 그 학자는 10년 이상 자기에게서 집단치료를 받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그와 함께 보낸 긴 세월을 회고하면서 모두가 보여준 변화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면서 그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그건 지난 10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은퇴를 앞둔 학자라는 것이었다.

그 말은 상당히 시니컬한 데가 있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얄롬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깨달았다. '타인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도 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고 변화되지도 않을 만큼 그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은 정녕 슬픈 일이다." 그러면서 얄롬은 자신을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수용과 지지만큼 자신을 믿게 만드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수용과 지지에 인색하게 굴지 말라고 그는 거듭 충고하고 있다.

[...] 나는 그가 말한 자세, 즉 상대방이 내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려고 애쓰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핵심 가치라고 믿는다.

그런데도 이 세상엔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넘치는 것이 사실이다. 상대방의 존재를 중요하게 여기기는커녕 드러내놓고 무시하는 것이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일수록 자신은 도무지 잘못한게 없는데 왜 인간관계가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자주 한탄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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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버린 세계의 허무함]

 

p204. 니힐리즘은 현대인의 조건conditio humana moderna이 되었다. 인식의 니힐리즘, 도덕의 니힐리즘, 미학의 니힐리즘. 아직도 철학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면, 인간들에게 이 보편적 무의미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리라. 일찍이 니체는 허무와 마주치는 두 가지 방식을 제시한 바 있다. 하나는 허무를 이기기 위해 외부의 가치에 자신을 의탁한 채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부에서 새로운 도덕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떤 오류(?)가 역사적으로 계속 반복된다면, 거기에는 어떤 절실한 요구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중세 이후에도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것은 과학에 무지해서가 아니다. 종교적 광신은 무너진 가치들의 폐허 속에서 허무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모든 흘러간 주의의 주창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삶이 무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이다. 종교와 이념의 신봉자들이 흔히 보이는 독단적 태도는 실은 타인의 비판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을 쫓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를 절대화함으로써 삶의 근원적 무의미를 망각해버리는 것이 노예의 도덕이다. 반면, 주인의 도덕은 모든 주의와 가치의 절대성을 부정하며 거기서 나오는 허무의 상태를 기꺼이 끌어안는다.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니힐리스트의 길일 것이다. 니힐리스트가 주의와 도덕의 싸움을 무의미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그 '놀이'에 꽤 열정적으로 참여할 수가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는 자신이 변호하는 주의나 가치가 근원적으로 상대적이라는 의식을 놓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루함: ennui] - 무의미한 삶이 기계적으로 반복된다는 느낌

 

p206. "감각, 독약, 단검, 방화가 우리 불쌍한 인생들의 진부한 캔버스를 그 유쾌한 디잔인으로 수놓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담대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 우리 악덕의 추잡한 짐승들 중에, 더 추하고 더 악하고 더 더러운 놈이 있다. 비록 커다란 제스처를 취하지도, 커다란 울부짖음을 내지도 않지만, 그놈은 지구 위를 어기적거리며 커다란 하품 속에 기어이 세계를 감켜버리려 할 것이다. 그놈은 바로 지루함ennui이다! 독자여, 눈물이 고인 듯이 축축한 눈을 가진 그놈은 물 담배를 피우며 처형대를 꿈꾼다." (보들레르 <악의 꽃> 서문)

p207. 지루함에도 종류가 있다. 가령 외부의 대상에 대한 지루함이 있을 수 있다. 가령 우리ㅡㄴ 영화나 소설을 보면서 지루함을 느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마도 내면에서 올라오는 지루함이리라. 삶 자체가 쳇바퀴처럼 돌고 있다는 느낌. 물론 지루함이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 지루함은 휴식과 반성의 계기를 제공하며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끈다. 하지만 그 어떤 삶의 행위로부터도 의미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절대적 지루함은 인간을 보들레르가 말한 "처형대"로 이끌 수 있다. 자살에 반드시 처절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p210. 삶에 의미란 게 있을까? 그런 것은 애초에 없을지 모른다. '의미'란 것은 근원적 지루함을 망각하기 위해 억지로 지어낸 '서사'에 불과하며, 삶의 '서사'란 그저 삶의 근원적 무의미를 감추기 위한 뻔뻔한 허구일지 모른다. 실제로 몇몇 종교에선 그렇게 가르치지 않던가. 하지만 종교에 귀의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당에 올라가 영원히 예수의 설교를 듣거나, 해탈하여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것보다는 차라리 현세에서 영원히 재방송을 보는 게 덜 지루해 보인다. 종교가 인간을 유한성에서 구할지는 몰라도 지루함에서 구해줄 것 같지는 않다.

삶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크게 세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범죄, 창조, 자살이 그것이다.  먼저 '범죄'는 산문적 삶 속에 인위적으로 영웅적(?) 서사를 도입한다. '예술'은 창작을 통해 삶에 시적 리듬을 부여해 그것의 지루함을 견디게 해준다. '자살'은 문제의 궁극적 해결책으로, 삶이라는 지루한 산문에 그냥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길은 서로 합류할 수도 있다. 가령 총기 살인범들은 대개 범죄를 자살로 마감하고, 연쇄살인범들은 종종 범죄를 예술로 착각하며, 널리 알려진 것 처럼 미시마 유키오는 자살을 일종의 예술로 연출했다.

하지만 진정으로 영웅적인 것은 이 절대적 지루함을 분과 초 단위까지 충만하게 견뎌내는 인내심에 있지 않을까? 어느 에세에이에 나오는 발터 베냐민의 말이 혹시 답이 될지 모르겠다.

 

p211. "파괴적 성격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감정이 아니라, 자살이 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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