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19. 일을 지연시키는 단순한 원인인 의심은 우유부다함으로 불리며, 이 우유부단함은 분명 '악 중에 가장 나쁜 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위베르 그르니에 <위대한 도덕 이론들 Grandes Doctrines morales>
우유부담이 왜 최악일까요? 잘못 행동하는 것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편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물음들에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잘못 행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데카르트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면에서 우리는 결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의하면 선택은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방법과 그 선택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끈기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정신은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유한한 것으로 이해력, 즉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한한 것으로 의지 또는 판단력, 다시 말해 긍정하고 부정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이해력은 유한하니까요. 하지만 의지는 무한하기에 모든 것을 욕망할 수 있습니다. [...] 모든 문제는 우리 내부의 이러한 불균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우리 의지는 그것이 '참'이라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긍정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실수의 개연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수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이해하는 것, 이해의 행위)을 확인하는 것(판단하는 것, 의지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의지가 무한하듯 실수를 저지를 개연성 역시 무한합니다. 우리는 이해력이라는 희미한 등불 아래, 어둠 속에서 한없이 빨리 그리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습니다.
p21. 행동의 비결은 바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법서설>제3부에서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두 번째 원칙은 행동할 때 최대한 단호하고 확고한 태도로 밀고 나가야 하며, 아무리 의심스럽다 해도 일단 견해를 취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이 확실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변합없이 계속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여행자들이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처럼,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빙빙 맴돌며 방황하지 말고 한자리에 멈춰 서 있지도 말 것이며, 우연히 어떤 방향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항상 같은 방향으로 최대한 똑바로 걸어가야 하며 사소한 이유들로 절대 방향을 바꿔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확히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딘가에 다다를 것이고, 아마도 낯선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p24. 숲속에서 길을 잃은 더카르트는 어떤 길을 따라갈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그것이 가장 합당한 선택인 양 자신의 선택을 집요하게 밀고 나간다. 그처럼 확고한 태도로 자기가 선택한 길을 충실하게 따라감으로써 그 우연한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든다. - 알랭, <관념>
p269. 매그니토는 공공의 안전을 위한거라고 주장하면서 캠페인의 선두에 서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상원의원을 납치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따져 의원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를 자화시켜 돌연변이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교환을 지켜봅니다. 한편에는 힘을 받는 의원, 다른 한 편에는 교환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힘을 잃어가는 매그니토.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침에 따라 매그니토 자신은 녹초가 됩니다. 그 작업은 에너지를 소진시키니까요. 그는 자신에게 해를 입혀야만 그에 비례해서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오의 본질입니다. 증오는 '우리 외부'에서 행하는 것을 '우리 내부'에도 행합니다. 그래서 매그니토의 힘은 결국 고갈됩니다. 증오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p271. '나는 인간의 신체가 오직 시체로 변한 경우만 죽었다고 인정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경험은 그 반대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라고 하기 주저될 정도로 심한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정리에 대한 주석>
p325. 인간의 문제는 현재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어떤 점에서 자신이 완전한지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가 더 나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현재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즉 희망은 현재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희망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희망이란 현재에 대해 절망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환멸로부터 동시에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망을 잃는 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느 ㄴ것을 보기 위해 우리에게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더 현재적이 됩니다. 말하자면, '현재에 대해 더욱 현재적'이 된다는 얘기지요. 현재의 것, 그리고 현재의 완전함을 이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음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p334. 철학은 이성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성이 곧 사랑이라는 의미지요. 이성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누구에게도 금지되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똑같은 거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똑같이 갖기 위해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온전하게 자기를 내어주니까요. 더욱이 이성의 영역에서는 타인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그가 이성을 갖길 바라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성을 갖고 있고 능동적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역시 가능한 한 능동적이며 그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것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성적인 인간은 오히려 이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신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동시에 신을 알 수 있다. 모든 선 가운데 오직 진리만이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거실 수 있다. - 알랭, <스피노자>
p349. 많은 능력을 발휘하는 신체를 가지게 되면 정신 역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체가 다른 신체보다 동시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능력이 우월할수록, 그 신체의 정신 역시 많은 것을 동시에 지각하는 능력이 우월하다. 그리고 어떤 신체의 행동이 오직 그 신체에만 좌우되며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신체와 경쟁하는 다른 신체의 수가 적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판명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그만큼 더 증대된다. - <에티카>, 제2부, 정리 13, 주석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고 다양한 것들을 만나 적합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능력은 동시에 발달합니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논문에서 입증한 결과입니다. 그는 신체와 정신은 단일한 것이며, 두 가지 관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신에서도 일ㄹ어납니다. 우리가 신체와 정신을 갈라놓을 수 없는 이상,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효과나 결과 또는 반향이 정신에 일어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반향이 아닙니다. 반향이란 원래 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응하는 효과로 상정되니까요.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정신의 생각에 해당합니다. 신체에 일어나는 일은 동시에 우리 정신에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정신까지 부여받은 인공적 존재의 신체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면, 그 존재의 정신은 더한층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의 신체가 능동적으로 됨에 따라 그의 정신은 "직접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