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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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0~52
 […] 선전관 양호가 내 숙사로 찾아왔다. 그는 도원수를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나에게 왔다. 그는 임금의 교서敎書를 지니고 있었다. 그가 교서를 내밀 때, 나는 그가 사약을 들고 온 의금부 도사가 아닌가 싶었다. 나는 마당으로 내려가 교서 두루마리에 절했다. 양호가 두루마리를 펼쳐서 큰 소리로 읽었다. 임금의 수사는 장려했다.
 […] 지난 번 그대의 벼슬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 종군케 한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거니와, 그리하여 오늘 이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니리오.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니리오 […]
 이것이,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한 죄인에게 임금이 할 수 있는 소리인가. 나는 귀를 의심했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임금은 강한 신하의 힘으로 다른 강한 신하를 죽여왔다.
 […] 이제 그대를 상복을 입은 채로 다시 기용하여 옛날같이 전라 좌수사 겹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노니, 그대는 부하를 어루만지고 도망간 자들을 불러 단결시켜 수군의 진영을 회복하고 요해지를 지켜 군의 위엄을 떨치게 하라. 그대는 힘쓸지어다. 군율을 범하는 자는 장졸을 막론하고 그대의 지휘로 처단하려니와, 그대가 나라 위해 몸을 잊고 나아감은이미 다 겪어보아 아는 바이니 내 구태여 무슨 말을 길게 하리오 […]
 내 끝나지 않은 운명에 대한 전율로 나는 몸을 떨었다. 나는 다시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수군통제사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전라 좌수사였다. 나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수군통제사였다. 내가 임금을 용서하거나 임금을 긍정할 수 있을지는 나 자신에게도 불분명했다. 그러나 나의 무武는 임금이 손댈 수 없는 곳에 건설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건설은 소멸되기 위한 건설이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번역공부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필사를 하게 된 책이 김훈의 <칼의 노래>다. 필사하느라 읽는 속도는 너무 느리기만 하다. 그저 문체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래도 워낙 문장이 좋다고하니 끝까지 해봐야하나 하는 의문을 가지고 일단 다른 책이 없는 한 해보자하는 생각에 그저 묵묵히 했다.

그래서 이제 겨우 50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확~~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윗분들은 그랬나보다. 임금에 대한 이순신의 견해(? 감정?) 너무 공감이 됐다. 물론, 그 시대의 잔인성은 지금 현대에 비할 수 없지만, 그리고 임금에 대한 감정도 조금은 다른지만(현대의 내 입장에서 논한다면, 무섭다고까지는 안할 것 같다. 내 상사가 그정도는 아닐테니.. 나를 곤장치거나 목을 베진 않을테니까여서인지 모르겠지만...) 안쓰럽고 답이 없어 짜증났다 정도랄까.

그리고 결국 자신의 결정으로 다 말아먹어놓은 조직을 니가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너도 답이 없지? (난 이순신처럼 능력자가 아니니까...ㅠㅠ;)라고 동지의식을 느끼는 그런 상사(동지의식이면 그나마 좋게 봐준거다.. 너같은게 나만큼은 할 수 있겠어? 쪽이 더 가깝겠지...) 밑에서 일하다보면, 그런 상사 밑에서 자란 밑의 직원들은 또 판박이다. 답이 없다... 잘난게 없는 내가 보는 못난 이들의 수준은 어찌 되는 걸까?

 

이순신이 임금의 교서를 받아들이며 다짐하는 부분은 정말 가슴이 아리다. 그는 그 길에 답이 없음을... 그게 소멸될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음을 알면서도 택한다. '소멸되기 위한 건설이여야 마땅'하다라니 어느 누가 그런걸 바라겠는가? 나라면 도망갔을 것이다. 더구나 어차피 조정을 능멸하고 임금을 기만한 죄인으로 찍힌 마당에 그런게 무슨 대수겠는가? 그럼에도 그는 어려운 길을 자신이 옳다고(아직은 그가 정말 옳다고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게 내가 책을 계속 읽어나가는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길을 택한다. 옳다라. 도대체 어떤게 옳다는 걸까?

 

p.53

 ['''] 나는 다시 붓을 들어 맨 마지막에 한 줄을 더 써넣었다. 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길 바랐다. 그 한 문장에 세상이 베어지기를 바랐다.

 

....... 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삼군수군통제사 신臣 이李 올림

 

난 감히 말할 거다. '신臣 이李'는 제정신이 아닌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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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5~66. 아들러는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낙천적이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비관주의자가 되어버린다고 지적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패배에 직면해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지독한 비판주의자가 겉으로는 낙천주의자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관주의도 낙천주의도아닌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일까? 낙관주의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해서 무엇을 하든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하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라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바로 그게 낙관주의다. 우리가 일단 지금 여기서 가능한 일을 시도할 때 현실의 사태는 무언가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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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 [삶을 사랑하는 철학]

p32~34.

  니체는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들을 진짜 사랑인지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니체는 예수의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사람들이 수단이나 조건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사랑하라.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다.' 이 말에 따르면 사랑이 곧 천국이라는 결실을 위해 감내해야 할 희생이 되고 마는 거지요.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겁니다. "사랑하라.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니체는 그리스도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도 딴지를 겁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이 아닌 자를 배제하고 억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소유욕, 이기심, 예속, 숭배, 패거리 이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니체의 사랑법은 무엇일까요? 니체는 이런 멋진 말로 표현합니다.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자까지 창조한다." 위대한 사랑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먼저 사랑스럽게 창조하는 행위라는 것이죠. 진리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사랑할 만한 진리를 창조해야겠죠. 세계를 사랑한다면? 먼저 사랑스러운 세계를 창조해야겠죠.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한다면 이 세상이 망가진 것을 볼 수 없을 것예요. 그런 의미에서 혁명가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저는 혁명은 정치나 사회 이론 이기 전에 미학이라고 생각해요.

  니체는 이런 사랑법을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라고 불렀어요. 저는 니체의 사랑법을 조각가에 비유하고 싶어요. 마치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한 것처럼 조각가는 돌 속에 숨은 위대한 형상을 끌어내기 위해 망치로 그것을 부수죠. 그것은 그가 돌을 사랑하는 방식이에요. 철학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도 철학을 부수고 철학으로 부터 떠나죠.

  내 삶에도 다비드가 있어요. 세계에도 있고, 친구에게도 있어요. 사랑이란 사랑할 대상을 만드는 행위이지 이미 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에요. 무엇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사랑스럽게 만들어 보세요.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심리학에 '행동과 태도' 심리학이라는게 있다.  태도가 행동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행동이 태도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행복해서 웃는다'는 전자의 경우이고, '웃으니 행복을 느낀다'는 후자의 경우가 된다.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내가 원하는 상태에 들어서려면 마치 내가 현재 그런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너무나 느끼고 싶은데,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대상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대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나 찍어 사랑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면 정말 그 대상을 사랑하게 될까?

 

p39.

Q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하셨고 너무 사랑해서 뜯어고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누군가를 구속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 역시 폭력이 아닐까요?

 

A. 맞아요. 그럴 가능성이 커여. 하지만 친구를 바꾸려고 할 때, 그 친구는 '그래 날 바꿔 줘' 하고 가만히 있을까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추한 것을 추한 채로 그대로 두고 계속 친구라고 하는 것은 위선이에요. 그 상태로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조각가를 예로 들면, 미켈란젤로는 대리석을 조각해서 다비드상을 만들었지만, 그 행위는 자기를 조각한 것이에요. 대리석을 조각하면서 그는 그의 인생을 조각했던 거예요. 내가 너를 사랑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너를 내 편으로 만들겠다고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각하는 행위예요. 내가 친구에게 던지는 말, 친구에게 하는 얘기는 결국 친구를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이라는 거죠. 저는 이것을 '이중변형'이라고 표현해요. 하나의 마주침에서 '누가 누구를 변형시키는가'하고 주체와 대상을 놓는 것은 잘못된 경우가 많아요. 교육이 그렇지요. 배움의 장에서 둘은 서로를 통해 배우고 성장합니다. 두 사람이 춤을 출 때 박자가 안맞아서 서로 발을 밟으면 박자를 맞추기 위해 두 사람이 동시에 변화합니다. 한 사람만 고쳐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적응하면서 변화해 나가는 거죠. 이건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폭군과는 다릅니다. 상대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은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래서 섬세한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자신밖에 없다고들 말한다. 나 자신이 바뀌면 그에 따라 주변(상대)도 바뀔거라고.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도 이런 얘기겠지. 내가 하는 말에 따라 상대의 반응도 달라진다. 그런데 가끔 내가 바뀌어도 상대가 바뀌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나혼자 바뀌었다고 착각한 걸까? 아니면 아무리 내가 바뀌어도 안바뀌는 상대가 있다는 걸까? 

 

배병삼 [논어에서 배우는 삶의 자세]

p111.

  제자인 자공子貢이 "벗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공자가 대답하길 "진심으로 충고하여 좋은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이 벗이다. 허나 두어 번 충고를 해도 듣지 않으면 그 관계를 끊는 것이다. 친구랍시고 지나치게 안달복달하다가는 도리어 친구로부터 욕을 당하는 수가 있다"라고 말합니다.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친구란 것이 고작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사로운 관계가 아니라, 진심으로 충고를 해 주되, 몇 차례의 조언에도 엇나간다면 칼로 베를 자르듯이 관계를 끊어 버린다는 것이니까요. 공자에게 친구 관계, 즉 우정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이 아니라 도리어 '의식화된 길'을 걷는 데서 비롯되는 만남이라는 차가운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예컨대 정말 노래가 부르고 싶어서 가수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 가수의 길을 가는 가운데, 그와 같은 뜻을 가지고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벗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꾸 방황하면서 옆길로 샌다고 합시다. 그럴 때 충심으로 조언해 줘야 해요. "그렇게 흔들리면서 연습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라고요. 이렇게 두어 번 충고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요? 충고를 멈춰야 합니다. '무자욕無自辱', 즉 스스로 욕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정은 '길'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볼때 공자의 '우정'이라는 것을 단순히 죽마고우로 인식하거나 이해하면 안 됩니다. 공자나 맹자의 눈으로 볼 때, 우정이란 '성숙한 존재들 사이의 만남', 즉 의식적으로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친구가 먼 데서 오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말 즐겁겠죠? 나와 같은 길을 함께 걸어가는 '락樂한 존재', 벗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얻는 가장 큰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벗입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거지만, 같은 길을 가는 '락한 존재'가 와닿았다.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시간은 시간일뿐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좁을 수 있다. (물론, 예전을 향유하는 좋은 시간을 보낼 순 있지만, 서로 먼길을 걸어온 만큼 두 사람이 걸어온 길의 폭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졌을 확률이 높다.) 그럴 땐 현재 나와 같이 가는 옆 사람, 죽마고우만큼 오랜 시간을 보내진 않았지만 같은 길을 걸으며 같은 미래를 보는 친구가 있다면 외려 시간과 상관없이 진정한 친구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친구만한 친구가 없다고들 말하지만, 난 조심스럽게 그 의견에 반대를 표하고 싶다. 시간은 그저 시간일 뿐이다. 단순히 보낸 시간의 길이보다는 교감한 시간의 길이와 깊이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p120.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于學), 30세가 되어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而立), 40세가 되어서는 판단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았고(不惑), 50세가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으며(知天命), 60세가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그 뜻을 알았고(耳順),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벗어나지 않았다(從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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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1.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배우들은 모두 중죄를 범한 수감자들이다. 영화 속에서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연기한다. 살인이나 조직범죄에 연루된 수감자들이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는 장면을 연기한다는 설정부터가 대단히 흥미롭다. (뭔가 이상하다.. 난) 원로원이 배경이지만 시저의 암살은 엄연히 살인이고, 그것도 범죄다. 이들은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독재자 시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 배경은 고대 로마고 원작자는 셰익스피어이며 공연장은 다시 현대 로마의 감옥이다. 영화는 수감자들이 연극을 올리는 과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종의 페이크 다큐에 가깝다. 그러니까, 수감자들은 '교도소에서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리는 수감자들'을 여기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수감자들이 극중 극인 <줄리어스 시주>의 장면들을 연기할 때는 대단히 그럴 듯 한데, 오히려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연기할 때는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 연습을 마치고 자기 감방으로 돌아와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같은 대사를 치는 장면은 브루투스와 시저, 안토니우스를 연기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부자연스럽다. '극중 인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혹은 '극과 현실을 혼동한 나머지' 수감자들이 서로 다투거나 불화하는 장면 역시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수감자 배우들은 시저와 브루투스 역할은 멋지게 해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역할은 잘 해내지 못했다.

[...]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 연기를 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 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예요"

 

나는 이말에 100% 동감은 못한다. 연기를 못하기에.. 하지만 내가 연기를 못하는 이면엔 언젠간 들킬거라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절대 안들킬거라는 확신만 있다면 난 정말 훌륭한 연기자가 될지도 모른다. 내 본모습을 아는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연기할 수 없는 내 결벽만 없다면, 난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천의 얼굴을 가진 연기자가 되고 싶을거다.  (아니면 정말 됐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난 보이고 싶지 않은게 많으니까^^)

 

p123.

조이스 캐럴 오츠는 메릴린 먼로를 모델로 한 역작 <블론드>(올, 2011)에서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생활, 즉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힘겨워하는 메릴린 먼로의 육성을 들려준다. "대디, 난 너무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걸까요?(...)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하죠?"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로 끝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 이다.

'자, 다시 갑시다."

 

난 싫을 것 같다. 다시 가야하나? 정말 싫다. 복구하는게 더 힘들지 모르겠지만, 다시 가고 싶진 않다. 난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얘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래봐야, 그당시로 돌아가봐야 어차피 같은 선택을 할테니까.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지금 깨달은 걸 과거에 도입하려고하는 건 욕심이 아닐까? 그때로 돌아간들 지금의 내가 깨달은 걸 가지고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돌아가면 어차피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도는 결국 같은 선택을 할거다. 난 어차피 나니까. 미래를 아는 내가 아닌 이상 내가 과거로 돌아간들 다른 선택을 할까? 난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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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097

[Gravity: 스톤박사의 ] 잠깐의 임사 체험 이후, 스톤 박사는 마지막 남은 비상연료와 분사력까지 이용해 중국 우주선에 다다르고 그 우주선을 조종해 지구로 귀한한다. 이 영화가 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한 우울증 환자의 심리적 풍경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그녀가 어떻게 이 '정신적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력이 존재하는 지구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프로이트라면 아마도 그녀가 우주 공간에서 비로소 행하게 된 애도 덕분이라고 해석할 것이다. 반면 에피쿠로스라면 동료들의 진짜 죽음(달의 죽음은 전화로 전해들었을 뿐이다)이 그녀로 하여금 죽음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올바르게 통찰하였고, 이를 통해 그녀가 유한한 삶에 대한 갈망을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울증 환자는 매를 먼저 맞기를 원하는 학생처럼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해 그것에 온종일 사로잡혀 있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이 과도한 공포, 살므이 소소한 즐거움마저 파괴하는 이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되는 것일까? <그래비티>의 카메라는 위성의 파편에 얼굴이 관통당한 남자 동료의 시체를 오래 응시한다. 사라진 그의 얼굴 - 소거된 인격 너머로 우주가 보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고작 이게 죽음이라면 에피쿠로스가 옳은 것이다. 얼굴 없는 시체와 조금 전까지 춤을 추고 있던 동료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저 무정한 우주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스톤 박사가 비로소 자신이 떠나온 작은 행성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진짜 죽음에 대한 직면과 통찰이 그녀에게 에피쿠로스적 계시의 공간을 열어준 것이다. 가서 지구의 공기와 물과 중력, 늘 네 곁에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저 찬란하지만 유한한 것들을 죽음이 찾아오기까지 마음껏 즐기라.

  지구에 막 도착한 그녀에게는 에피쿠로스의 이런 말이 이제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삶이 이어지지 않을 죽음 후에는 전혀 무서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에게는 삶 또한 무서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 알랭드 보통 [철학의 위안], 청미래 2012

 

죽음이 두려워 현생을 즐기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을 거다. 죽음이 다가오면 그때 죽음 나름의 매력은 그때 느껴봐도 늦지 않을 듯. 좀 다른 얘기긴 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내가 술 마시는 순간의 즐거움에 퍼마시다가 술이 깨고 (기억이 남아있을 땐 괜찮다. 필름이 많은 부분 편집되어 삭제되었을 때는 특히 ㅠㅠ;)일어난 다음날 시계를 보는 순간의 허무함. 너무 다른 얘기긴 하지만, 어느 순간 죽음이 다가왔을 때, 내가 생을 제대로 못즐기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술로 필름이 끊긴 그 시간 보다 더 아까울 것 같다. 그래도 필름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 술은 줄여야 겠다..쩝

 

p102. 우디 앨런's [Rome with Love] vs. [Bullets over Broadway]

 [로마 위드 러브] '이 정도면 예술로 밥 먹고살아도 되겠다'고 부추기기 시작한다. 당사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자꾸 부추기면 은근히 '하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싹튼다. 그러다 흔히들 하는 말로 '친구가 나 몰래 원서를 넣는 바람'에 오디션에 나가게 되는데, 거기서 보기 좋게 실패한다. 또는, 오디션에는 붙지만 그후로는 운이 따르지 않아 더이상 성공하지 못한다. 즉, 판에 안착하지 못하게 된다. 이때 길은 두 가지로 갈린다. 정신을 차리고 '낙향'을 하느냐, 무대에 샤워부스를 설치해서라도, 즉 자기만의 방식으로 약점을 커버하면서 살아남느냐. 그런데 자기만의 방식으로 약점을 커버하면서 살아남는다는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샤워실 가수처럼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다. 우디 앨런이 샤워실 가수 에피소드로 보여준 것은 '아마추어 예술가도 자기 약점만 극복하면 충분히 프로페셔널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즉 스칼라좌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된다는 것은 노래 실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 거기에는 노래 실력 이상의 뭔가, 예컨대 최소한 담력이라도 필요하다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Bullets over Broadway] 제작비에 쪼들린 제작자는 마피아 보스를 찾아가 제작비를 구걸한다. 보스인 닉은 자기 정부인 올리브를 출연시키는 조건으로 제작비를 대고 올리브에 딸려보낸 경호원 치치(곰처럼 생긴 상남자가 자꾸 문제를 일으킨다.)는 각본과 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자꾸만 개입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자기 각본을 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각본이 은근 괜찮다. 작가 데이비드는 결국 마피아 치치의 말을 받아적는 신세로 전락하는데. 아마추어 예술가인 치치는 연극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발연기'로 자기 '작품'을 망치는 여배우 올리브, 보스의 애인을 죽여버리고 만다.

 이 두 아마추어([로마 위드 러브]의 장의사와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경호원은 닮은 데가 많다.)들은 놀라운 실력을 지녔으나 스스로도 그걸 모르고 주변에서도 인정받지 못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떤 계기가 찾아와 그들의 놀라운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으 닝쯤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아주 소소하게 편집했으나.. 예술가는 아닐지라도.. 사회생활을 못할거라고 했던 내가 지금정도(? 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일진 모르지만.. 헐.. 객관적으로 첫직장 말고는 구직활동 없이 이직할 수 있었던건 나름 잘한 증거라 생각한다..헤~~)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건 능력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다. 알아봐주는 사람과 운이 바쳐줘야 한다는 거. 그런 면에서 난 인덕은 없어도 인복과 시운은 좋았던 것 같다. 감사..

그런데, 그런 와중에 내가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절대 과신하면 안된다는 거였다. 시간이 지나면 인정도 생기겠지만, 일적으론 항상 기본은 일이다. 일이 문제 없음 어쨌거나 띄워줄 수 있다. 하지만 정도를 벗어나면(즉, 업무능력보다 본분을 잊게되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상향곡선은 바닥이 어딘줄 모르는 땅끝(?이란게 있을까?)으로 떨어진다는 거.

 

사회생활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1. 착하고 일 잘하는 사람(거의 0%~10%미만) 2. 못되고 일 잘하는 사람(15% ~ 20%) 3. 착하고 일 못하는 사람 (50~70%.. 착하다는 기준이 넘 다른다..쩝쩝) 4. 못되고 일 못하는 사람 (10%정도?) 5. 무지 착하고 그렇기 때문에 일은 못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 으로 구성되는 듯 하다. 4번의 경우가 가장 쉽다. 걍 쳐내면 된다. 최약의 경우는 5번이다. 뭐라고 못하고 대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이 망친걸 복구하는데 그 사람이 소비한 시간의 배 이상이 든다. 그리고 그 다음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물론, 일을 못하는 정도의 차이다..) 3번이다. 사람 좋음에 쳐내지도 못하고 묻어가는 케이스다. 그래서 경제 원리에 2:8의 원칙이 존재하는 거다!

 

항상 생각한다. 내가 어느 부류에 속하는 걸까? 최소한 차라리 2번은 되고 싶다라는 건 못돼쳐 먹어서 일까?

 

글을 다 읽지 않고 쓰면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ㅋㅋ

 

p106.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샤워를 하지 않아도 노래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한다. [...]

영화사만 둘러봐도 샤워부스와 함께 나타난 인물들은 수도없이 떠오른다. 장 뤽 고다르가 대표적이다. 피경가 출신이었기에 영화의 기술적이 면에 무지했다. 그런데도 그냥 찍었다. 한마디로 막 찍었다(그러고 보면 데뷔작 <네 멋대로 해라>는 제목과 형식이 일치한다). 촬영은 엉망이고 이야기는 비약과 생략이 난무한다. 그런데 그는 그게 '새로운'영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신들이 알고 있던 영화는 이미 낡았다'고 비판했다. 그의 전략은 먹혔다. 몇몇 사람들은 덩달아 고다르풍의 영화를 찍기 시작했고 그런 흐름은 누벨바그라 불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무대에 샤워부스가 설취되었고 그로부터 한동안 샤워하면서 얼마나 노래를 잘할 수 있느냐가 새로운 미학적 기준이 되었다.

세상에 맞춰 자신을 바꿀 것이냐, 세상을 자기에게 맞게 바꿀 것이냐. 아마도 모든 예술가의 고민일 것이다.

 

예술가만의 고민은 아닐 것이다.

 

p108.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트로이전쟁이라는 당대 최대의 이벤트를 소재로 [일리아드]를 지었다. 이게 워낙 반응이 좋았던지 일종의 속편인 [오디세이야]도 만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리아드]의 스핀오프인 셈이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근데 스핀오프와 원판과 어느게 더? 난 모르겠다.

 

p.121~123.

??? 읽어보세요

왜? 그건 읽어보시면 알거예요.. 모르신다면 본인이 철저하게 연기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 쪽이겠죠^^ 가면이 살이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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