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87~190
(지옥문 9행에 대해....) 문학적 표현 또는 의미론적 표현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문자 그대로 번역해 보았다.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멸망해 가는 무리 곁으로.
정의가 나의 최고의 창조주를 움직였다.
성 삼위일체, 곧 신의 권능으로서의 창조주,
말씀이며 로고스인 신의 아드님, 최고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또 아버지 신과 아들 신 사이에 오가는 스피라치오, 즉 최초의 사랑인 성령, 이 삼위일체가 나를 만들었다.
영원한 것 외에는, 나보다 앞서 창조된 것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너희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그곳에 남겨 두어라.
버리기 어렵더라도 모든 희망을 그곳에 남겨 두어라. 희망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지옥문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희망을 그곳에 남겨 두는 일이다. 지옥문 입구에서 버리고, 그곳에 남겨 두고 가야 할 것은 '희망'이다.
단테의 지옥의 정의(定義)와 교훈
단테는 이 9행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지옥의 정의(定義)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지옥이란 일체의 바람,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러한 지옥이 우리의 지면과 같은 높이의 땅에 문을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문 밖에 모든 희망을 남겨 두어야만 한다. 지옥이란 절망의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정말로 절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하로 떨어지지 않아도 관계없다. 단테 생각으로는 모든 희망을 남겨 두고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희망을 모조리 잃어버린 기분에 휩싸인다면 그것은 살아 있다 해도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처럼 『신곡』을 통해 지옥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옥은 도처에 있는 게 아닐까.
좀 더 생각해 보면 '나를 지나(통과해), 사람은 고뇌나 슬픔의 세상으로 간다(PER ME SI VA NELLA CITTA DOLENTE)'이다. '슬픔과 고뇌의 세상(CITTA DOLENTE)', '영원한 고통, 고뇌(ETERNO DOLORE)', '버림받은 무리, 멸망해 가는 무리가 많이 있다(LA PERDUTA GENTE)', 이 세 가지가 지옥의 모습이다. 그리고 지옥의 성립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며, 게다가 '사랑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신의 창조 계획 속에 지옥이 있다는 말이다. 단테의 초상화를 보면 매우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단테에게는 죄를 꺼리는 엄격함, 악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있었다. 단테는 그러한 마음으로 신과 악과 죄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를 지옥에 넣는다고 말한다.
지옥은 차조 때부터 만들어졌다. 게다가 '영원히 나(지옥)는 지속한다(IO ETTERNA DURO)'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든 희망을 문 밖에 남겨 두어라, 이 안에는 희망이 전혀 없다(LASCIATE OGNI SPERANZA)'고 지옥문은 말한다.
단테는 지옥을 그렇게 설명했다. 지옥이란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의 장소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절망은 아니라도 희망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지옥에 가까이 다가가는 셈이다. 만약 완전히 절망한다면 살아 있어도 지옥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죄인가'라고 묻는 의미도 잘 알 수 있다.
아주 평범한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단테를 읽으면 현세에서도 '희망을 버리면' 스스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희망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심리학적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라는 술어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술어와 같으며 '희망'은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증거이며 존재론적 상징이다. 그것을 상실했을 때, 인간은 아귀도(餓鬼道)에 빠진다고 할까, 아무튼 신과의 연대가 끊어져 버리는 것이다. 신이 창조한 피조물인 우리는 땅에서 지하로가 아니라 분명 천상을 향하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지옥에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은 희망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희망은 덕목이다. 단테는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시적 결정이라 일컬어지는데, 그에 못지않게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tura)의 사고에서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우구스티누스 무렵부터 성 바올로가 성서에 서술한 내용, 즉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덕이 신에 대한 덕, 즉 '대신덕(對神德)'이라 불렸는데, 여기에서 그것을 다시 떠올려 봐야 할 것이다.
p191~192
PER ME SI VA NELLA CITTA DOLENTE,
PER ME SI VA NELL '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나를 지나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 사람은 망자에 다다른다.
이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 낭송하다 보면, 지옥문이 말하는 '나'가 암송하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을 내 말이나 행위로 고뇌의 도시로 보낸 일은 없었을까. 남에게 좌절을 안겨 준 일은 없었을까. 선생이라는 신분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준 일은 없었을까.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여 다른 사람이 불행에 빠진 일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일이 연이어 떠오른다. 이것을 시의 ambiguite(단의성)이라 한다. 단테는 이것이 시의 특색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옥문의 1인칭 단수를 『신곡』을 읽고 있는 개개인의 1인칭 단수로 옮겨 읽는 방법은 올바른 것이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여러 번 반복해 이 글귀를 읽기 바란다. 눈앞에 검고 커다란 지옥문을 상상한다. 거기에 적힌 문제를 떠올린다. 그곳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모든 희망을 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방치하면 그대로 희망을 버리고 지옥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 뭔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또한 나로 인해 남을 좌절한 일은 없는가, 남에게 조금이라도 슬픔을 준 일은 없는가, 그것 자체가 남을 지옥에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일이다. 이 시는 우리에게 '지옥문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게다가 단테는 이 지상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지면 위에 지옥문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까. 그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Per me는 '나를 통과하여'도 되지만, 또한 '나로 인하여'라고 읽을 수 있다. 영어의 through와 마찬가지다.
Queste parole di colore oscuro
vidi'io scritte al sommo d'una porta; (Inf. Ⅲ. 10-11)
'검은 색깔의 그 말(Queste parole di colore oscuro)', '나는 보았다. 싀어 있는 것을(vid'io scritte)', '한 문 맨 꼭대기에(al sommo d'una porta)'라고 되어 있다. '문(porta)'에 정관사가 아니라 부정관사를 붙였다. 요컨대, 문법적으로 생각하면 유일하게 그것 하나뿐인 문이기도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불특정 다수의 문 중 하나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지옥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자기는 눈치 채지 못한 채, 지옥문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의미론적으로도 문법적으로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의미 깊은 시이다.
p475~476
[......] 그리스도교에서 죄는 크게 네가지로 나뉜다.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지만, 기본은 '생각(cogitatio)', '말(verbum)', '행위(actio)', '태만(omissio)'에서 비롯된다. 평범하게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행위' 면에서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경우가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저란 자식은 실컷 패 주고 싶다'라고 생각했다면, 이는 '생각'의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죄에 해당한다. '말'은 육체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니지만, 겉치레 말은 상대방을 방만의 죄에 빠지게 할 수도 있으며, 더욱이 남을 슬프게 하거나 남에게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죄이다. 더 나아가 그리 적극적인 죄라고 보이진 않더라도 '태만' 역시 죄가 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나쁜 일도 안 하는 것이므로 죄가 없다고 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태만은 죄가 된다.
이 상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반성해 보면 인간은 정말로 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래 구조는 원죄의 가능성을 가진, 원죄의 현상 형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이 네 가지 중 어느 것인가에는 반드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을 가진다. 그러한 상태가 원죄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결단으로 잘못된 일을 하는 경우도 이들 네 가지 죄 중 어딘가에는 해당하며 그런 경우는 자신의 죄, 자죄가 된다. 자죄도 이 네 가지로 분류되며 이것이 고해의 기준이 된다.
p500.
'신이 인간에게 내려 주신 최대의 선물은 자유의지이다'라고 단테도 말하고 있습니다만, 언젠가 가브리엘 마르셀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마르셀은 저에게 "그런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있지. 그게 뭔지 아려나?"라고 물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서른네다섯 살로 아직 젊었고, 게다가 어려보이는 편이라 가브리엘 마르셀도 꽤 짓궂은 말투로 '알려나'라고 물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잘 듣게, 인간이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대 선물은 좋은 추억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물건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작별을 고하러 갔을 때 들려주신 말씀인데, 그 자체가 저에게는 정말로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