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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5~66. 아들러는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낙천적이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비관주의자가 되어버린다고 지적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패배에 직면해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지독한 비판주의자가 겉으로는 낙천주의자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비관주의도 낙천주의도아닌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무엇일까? 낙관주의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해서 무엇을 하든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여하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라는 태도를 갖춰야 한다. 바로 그게 낙관주의다. 우리가 일단 지금 여기서 가능한 일을 시도할 때 현실의 사태는 무언가 변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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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2~113

죽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영원히 잠드는 건 더더욱 그렇다. 얼마나 많은 자살자들이 자신들의 행동이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던가? 실패하기 직전에, 정말이지 바보처럼 죽기 직전에 사람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서 "잘 봐, 난 죽을 거야......"하고 말한다. 그런데 죽을거라 말하면서 당신은 무얼 원하고 있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런 짓을 하는가? 죽으려고 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어찌됐든 언젠가 죽게 마련이지 않은가. 삶을 구하는 건 자살이 아니다.

 

p113

진정 자비로운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죽는 날 아무도 슬퍼하지 않기를 온 영혼으로 열망하는 것이다.

 

p115

이 애늙은이는 아비가 죽고 나서 며칠간 자신이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그 감정이 독수리처럼 영민한 표정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하늘이 내린 선물과도 같이, 어린 그녀에게 광적인 슬픔을 조장했다. 비올레트는 마치 의사로부터 자신이 암에 걸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고 흐뭇해하는 행복한 신경쇠약증 환자처럼 비쳤다. 그렇게 비올레트는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이로서는 영광의 날이었다. 만일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울 줄 알았다면, 거울 앞에서 붉게 충혈된 자기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비올레트의 가식적인 태도는 그 곳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뜻밖의 형벌을 안겨 주었다. 그들 본래의 고통이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p116

'사람들은 방앗간으로 들어가듯 죽음 속으로 들어간다'고 사르트르는 말한다. 죽음은, 사냥꾼들이 쏘아 죽이기 전에 저들끼리 제멋대로 다투는 토끼들과도 같은 포획물이다. 삶에 어떤 의미를 찾는자들은 얼마나 안심이 되겠는가.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으려면 자신을 포획한 자의 손에 자기 시체를 내맡기면 그 뿐이고, 살아남은 자들은 거리낌없이 그 고귀한 의미로 존재의 덧없음을 대신하면 된다. 이때 자유가 잠들어버리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음이나 허무가 아닌, 충만함이며 넘쳐흐르는 기억들이고 찬사들이다. 그 죽음은 살아 있는 자들이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새 비석위에다 쏟아 붓는 자명한 사실일 뿐이다.

 

p126

좋은 생각이란 걸을면서 젖어드는 생각이다......

세상에는 다른 길과 닮지 않은 전혀 다른 길이 존재하고,

당신이 아니면 누구도 헤치고 나아갈 수 없는 길이 있다.

그 길이 당신은 어디로 이끌까? 그런 의문을 품지 말고

그저 그 길을 따라 가라.

- 프리드리히 니체

 

p127

스승이란 무엇인가?

성실한 사람은 전적으로 자신을 의지할 뿐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권한이 있다면 단연 복종을 거부하는데 있다.

 

p130

나는 한 남자를 상상해본다. 그만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여인의 곁에서 한평생을 살다가 정작 그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른 채 죽었을 그녀의 연인을

-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p148

자신에 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을 숨기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p155

자신에 대해 쓴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며, 다른 대상에 대해 쓰는 것 역시 헛된 일이다. [...] 몽상은 자백이나, 자백 또한 몽상이다. 그 누가 글 속에 감추어진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는가. 누가 진실로 여겨지는 고백들 속에 숨겨진 삶을 이야기한단 말인가.

진실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어떤 작가들도 결코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작가는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만큼만 이야기 할 뿐이다. 모든 고백이 고백할 대상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니 모든 창작은 속내 이야기인 것이다. 헤겔은 말한다. "내 사상체계에서 나와 흡사하다고 여겨지는 건 거짓이다." 바로 그와 같다. 따라서 모든 건 거짓이다.

 

p162

결혼은 죽음을 부르는 진정제이자, 아타락시아(마음의 평정)이며, 고통을 줄이는 모르핀이고, 비극을 겪은 후 찾아드는 평온이다. 어떤 사랑도 고통을 피해갈 수 없으나, 어떤 고통도 타성에 저항하지는 못한다. 타성은 아무것도 바구지 않으나, 부지불식간에 사랑하는 존재를 다만 매일 얼굴을 맞대는 존재로 바꾸는 위력을 지닌다. 따라서 결혼은 습관이나 권태처럼 현실에서 부딪치는 일상적인 수련이다. 상대의 옷을 벗기는 횟수가 줄어들수록 상대의 속살은 더욱 잘 알게 되고, 눈가의 그늘이라든가 강박증이라든가 비열함이라든가 나쁜 취향들이 더욱 눈에 잘 띄게 된다. 결혼은 법적인 삶의 거세여서,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지루한 무거움의 위력 앞에서 멀찍이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그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받을까? [......]

괴로원한들 무슨 소용인가? 오히려 둘이 함께 땅에 묻히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p163

결혼식은 백색의 장례식이다. 친구들의 환호 속에 식을 마치고 나면, 요술을 부리 듯 사랑과 욕망은 땅속으로 매장되고 만다. 고통받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여긴 인간은 스스로 목에 족쇄를 채운다. 그러고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 같았던 유년의 고통들에 종지부를 찍고, 축복에 휩싸여 인생의 자잘한 고민거리들이 기다리고 있는 어른의 문턱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앙인이기 때문에 자살이란 감히 생각지도 못할 인생의 금기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결혼할 수 있으리라. 마약은 금지되어 있지만 결혼은 합법적이니, 그 편이 훨씬 낫지 않은가. 감정의 안락사에 매달리지 않고서, 잉걸불에 타들어 가는 재도 없이, 아니 불구덩이 속에 얼음을 간직한 채로 어떻게 결혼을 할 것인가? 그러니 결혼은 시작의 행복한 종말인 것이다.

 

p203

그 창조주(스피노자의? 라이프니츠의?)는 겉으론 의지주의자의 면모를 지니나 자신의 신성한 무관심을 더욱 잘 은폐하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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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7~190

(지옥문 9행에 대해....) 문학적 표현 또는 의미론적 표현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문자 그대로 번역해 보았다.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 사람은 간다, 멸망해 가는 무리 곁으로.

정의가 나의 최고의 창조주를 움직였다.

성 삼위일체, 곧 신의 권능으로서의 창조주,

말씀이며 로고스인 신의 아드님, 최고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또 아버지 신과 아들 신 사이에 오가는 스피라치오, 즉 최초의 사랑인 성령, 이 삼위일체가 나를 만들었다.

영원한 것 외에는, 나보다 앞서 창조된 것은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너희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그곳에 남겨 두어라.

 

버리기 어렵더라도 모든 희망을 그곳에 남겨 두어라. 희망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지옥문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은 희망을 그곳에 남겨 두는 일이다. 지옥문 입구에서 버리고, 그곳에 남겨 두고 가야 할 것은 '희망'이다.

 

단테의 지옥의 정의(定義)와 교훈

 

단테는 이 9행으로 그때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지옥의 정의(定義)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지옥이란 일체의 바람, 희망이 없는 곳이다.' 그러한 지옥이 우리의 지면과 같은 높이의 땅에 문을 세웠다. 그리고 우리는 지옥문 밖에 모든 희망을 남겨 두어야만 한다. 지옥이란 절망의 장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정말로 절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하로 떨어지지 않아도 관계없다. 단테 생각으로는 모든 희망을 남겨 두고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희망을 모조리 잃어버린 기분에 휩싸인다면 그것은 살아 있다 해도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처럼 『신곡』을 통해 지옥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옥은 도처에 있는 게 아닐까.

좀 더 생각해 보면 '나를 지나(통과해), 사람은 고뇌나 슬픔의 세상으로 간다(PER ME SI VA NELLA CITTA DOLENTE)'이다. '슬픔과 고뇌의 세상(CITTA DOLENTE)', '영원한 고통, 고뇌(ETERNO DOLORE)', '버림받은 무리, 멸망해 가는 무리가 많이 있다(LA PERDUTA GENTE)', 이 세 가지가 지옥의 모습이다. 그리고 지옥의 성립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며, 게다가 '사랑이 지옥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신의 창조 계획 속에 지옥이 있다는 말이다. 단테의 초상화를 보면 매우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단테에게는 죄를 꺼리는 엄격함, 악에 대한 격렬한 분노가 있었다. 단테는 그러한 마음으로 신과 악과 죄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를 지옥에 넣는다고 말한다.

지옥은 차조 때부터 만들어졌다. 게다가 '영원히 나(지옥)는 지속한다(IO ETTERNA DURO)'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든 희망을 문 밖에 남겨 두어라, 이 안에는 희망이 전혀 없다(LASCIATE OGNI SPERANZA)'고 지옥문은 말한다.

단테는 지옥을 그렇게 설명했다. 지옥이란 희망이 전혀 없는 절망의 장소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절망은 아니라도 희망을 잃어버리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지옥에 가까이 다가가는 셈이다. 만약 완전히 절망한다면 살아 있어도 지옥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은 죄인가'라고 묻는 의미도 잘 알 수 있다.

아주 평범한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서 지은 죄에 대한 벌로 지옥에 간다고 믿는다. 그러나 단테를 읽으면 현세에서도 '희망을 버리면' 스스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희망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심리학적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 존재론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라는 술어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술어와 같으며 '희망'은 인간 존재의 존재론적 증거이며 존재론적 상징이다. 그것을 상실했을 때, 인간은 아귀도(餓鬼道)에 빠진다고 할까, 아무튼 신과의 연대가 끊어져 버리는 것이다. 신이 창조한 피조물인 우리는 땅에서 지하로가 아니라 분명 천상을 향하도록 만들어졌을 것이므로 지옥에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 방법은 희망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희망은 덕목이다. 단테는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시적 결정이라 일컬어지는데, 그에 못지않게 신학자 보나벤투라(Bonaventura)의 사고에서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우구스티누스 무렵부터 성 바올로가 성서에 서술한 내용, 즉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덕이 신에 대한 덕, 즉 '대신덕(對神德)'이라 불렸는데, 여기에서 그것을 다시 떠올려 봐야 할 것이다.

 

p191~192

PER ME SI VA NELLA CITTA DOLENTE,

PER ME SI VA NELL 'ETTERNO DOLORE,

PER ME SI VA TRA LA PERDUTA GENTE.

 

나를 지나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 사람은 망자에 다다른다.

 

이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 낭송하다 보면, 지옥문이 말하는 '나'가 암송하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을 내 말이나 행위로 고뇌의 도시로 보낸 일은 없었을까. 남에게 좌절을 안겨 준 일은 없었을까. 선생이라는 신분으로 잘못된 가르침을 준 일은 없었을까.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여 다른 사람이 불행에 빠진 일은 없었을까. 그런 생각일이 연이어 떠오른다. 이것을 시의 ambiguite(단의성)이라 한다. 단테는 이것이 시의 특색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옥문의 1인칭 단수를 『신곡』을 읽고 있는 개개인의 1인칭 단수로 옮겨 읽는 방법은 올바른 것이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여러 번 반복해 이 글귀를 읽기 바란다. 눈앞에 검고 커다란 지옥문을 상상한다. 거기에 적힌 문제를 떠올린다. 그곳으로 발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모든 희망을 버리는 일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을 방치하면 그대로 희망을 버리고 지옥으로 가버릴 수도 있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 뭔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또한 나로 인해 남을 좌절한 일은 없는가, 남에게 조금이라도 슬픔을 준 일은 없는가, 그것 자체가 남을 지옥에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일이다. 이 시는 우리에게 '지옥문이 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 같다. 게다가 단테는 이 지상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지면 위에 지옥문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까. 그 점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Per me는 '나를 통과하여'도 되지만, 또한 '나로 인하여'라고 읽을 수 있다. 영어의 through와 마찬가지다.

 

Queste parole di colore oscuro

vidi'io scritte al sommo d'una porta; (Inf. Ⅲ. 10-11)

 

'검은 색깔의 그 말(Queste parole di colore oscuro)', '나는 보았다. 싀어 있는 것을(vid'io scritte)', '한 문 맨 꼭대기에(al sommo d'una porta)'라고 되어 있다. '문(porta)'에 정관사가 아니라 부정관사를 붙였다. 요컨대, 문법적으로 생각하면 유일하게 그것 하나뿐인 문이기도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불특정 다수의 문 중 하나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이 지옥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자기는 눈치 채지 못한 채, 지옥문이 되어 버렸을지도 모른다.의미론적으로도 문법적으로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의미 깊은 시이다.

 

p475~476

[......] 그리스도교에서 죄는 크게 네가지로 나뉜다. 구체적으로는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지만, 기본은 '생각(cogitatio)', '말(verbum)', '행위(actio)', '태만(omissio)'에서 비롯된다. 평범하게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면 '행위' 면에서는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경우가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저란 자식은 실컷 패 주고 싶다'라고 생각했다면, 이는 '생각'의 차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가르침의 죄에 해당한다. '말'은 육체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건 아니지만, 겉치레 말은 상대방을 방만의 죄에 빠지게 할 수도 있으며, 더욱이 남을 슬프게 하거나 남에게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죄이다. 더 나아가 그리 적극적인 죄라고 보이진 않더라도 '태만' 역시 죄가 된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나쁜 일도 안 하는 것이므로 죄가 없다고 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태만은 죄가 된다.

이 상 네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반성해 보면 인간은 정말로 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인간의 본래 구조는 원죄의 가능성을 가진, 원죄의 현상 형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이 네 가지 중 어느 것인가에는 반드시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을 가진다. 그러한 상태가 원죄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자신의 결단으로 잘못된 일을 하는 경우도 이들 네 가지 죄 중 어딘가에는 해당하며 그런 경우는 자신의 죄, 자죄가 된다. 자죄도 이 네 가지로 분류되며 이것이 고해의 기준이 된다.

 

p500.

'신이 인간에게 내려 주신 최대의 선물은 자유의지이다'라고 단테도 말하고 있습니다만, 언젠가 가브리엘 마르셀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마르셀은 저에게 "그런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 있지. 그게 뭔지 아려나?"라고 물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서른네다섯 살로 아직 젊었고, 게다가 어려보이는 편이라 가브리엘 마르셀도 꽤 짓궂은 말투로 '알려나'라고 물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잘 듣게, 인간이 인간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대 선물은 좋은 추억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많은 것들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모든 물건들은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작별을 고하러 갔을 때 들려주신 말씀인데, 그 자체가 저에게는 정말로 좋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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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1~214. 단테 [신곡]

나를 거쳐 고통(슬픔)의 도시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영원한 고통(비탄)으로 들어가고,

나를 거쳐 길 잃은 무리 속에 들어가노라.

정의는 높으신 내 창조주를 움직여,

성스러운 힘과 최고의 지혜,

최초의 사랑이 나를 만드셨노라.

내 앞에 창조된 것은 영원한 것들뿐,

나는 영원히 지속되니,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편, 제3곡 1~9행)

 

Through me the way is to the city dolent;

Through me the way is to eternal dole;

Through me the way among the people lost.

 

Justice incited my sublime Creator;

Created me divine Omnipotence

The highest Wisdom and the primal Love

 

Before me there were no created things,

Only eterne, and I enternal last.

All hope abandon, ye who enter in!

(롱펠로 영역본, 지옥편, 제 3곡 1~9행)

 

여기서 흥미있는 구절은 "나를 거쳐"입니다. "Through me"는 이탈리아어로 "per me"인데, 이 말에는 '나 때문에, 나로 인해'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 분명 지옥문입니다. 지옥문 위에 쓰여 있는 글귀이므로 지옥문이 문 앞에 선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이 '나'를 지옥문의 비명(碑銘)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갑자기 분위기가 묘해집니다. 나 때문에 슬픔의 도시로 들어간 사람은 없는지, 나 때문에 영원한 비탄에 빠져든 사람은 없는지, 나 때문에 길 잃은 무리 속에 들어간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내가 남을 지옥으로 집어넣는 입구가 된 적이 있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지옥문인 겁니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지옥에 들어가려면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지옥은 절망의 장소입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이 문장을 "지옥에 가지 않아도 현실세계에서 희망을 버리면 그곳이 바로 지옥'이란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렇습니다. 지옥은 저 땅 밑에 있는 구체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희망을 버리면 그 순간부터가 지옥입니다. 남의 희망을 빼앗으면 그는 지옥문입니다. 남에게 지옥문 역할을 하는 것만큼이나 큰 죄악은 없을 것입니다.

 

p385. [통치론: 물질주의적 인간관]

 

대부분의 자손들이 죽어야 한다면(모두가 제한된 자연생태계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리고 모든 종의 개체들은 서로 다 다르므로 평균적으로(항상 그런 것이 아니고 통계적으로 봐서) 생존자들은 국지적으로 변하는 환경에 우연히 가장 적합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다. 유전이 일어난다면 살아남은 개체들의 자손은 성공적이었던 부모를 닮을 것이다. 오랜 세월 이렇게 유리한 변이가 축적되면 진화적 변화가 일어난다. <풀하우스>

 

스티븐 J.굴드가 정리한 다윈이론의 핵심입니다. '더 뛰어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우연히' 환경에 적합했던 종이 살아남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종이 미생물보다 뛰어난 존재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종의 기원>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진화는 단지 국지적인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허망할 정도로 뻔합니다. 그래서 진화론을 옹호했던 토마스 헉슬리는 <종의 기원>을 읽고 나서 누구나 아는 이야기라 하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헉슬리의 손자 중에서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와 그의 동생 줄리안 헉슬리가 있습니다. 고상한 생물학자였던 줄리안은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습니다. 여기서 "성공"은 "우연히 적응한"이라는 뜻입니다. 서로 경쟁해서 이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은 '정말로 오랜 세월'을 의미합니다. 우리 삶에서는 겪어볼 수도 없는 세월입니다. 굴드의 설명을 더 보겠습니다.

 

p459~461. [법의 정신: 직업으로서의 정치 - 근대의 정치, 악마적 힘들과 관계맺기]

 

정치를 자신의 직업으로 삼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정치를 '위해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 먹고사는 게 해결된 사람입니다. 반면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사람은 이른바 생계형 정치가입니다.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면 안됩니다. 그들은 정치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는 이에 대하여 경제활동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해, 그 스스로가 직접 지속적으로 자신의 노동력과 사고력을 전부 또는 상당 부분 영리활동에 투여하지 않고도 자신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활동에 묶여있지 않은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생활자입니다. 그는 완전히 불로소득 생활자입니다. 이 불로소득의 원천은, 과거의 영주와 오늘날의 대지주 및 귀족의 경우에서와 같이 지대일 수도 있고 - 고대 및 중세의 노예와 농노의 공납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 유가증권이나 이와 유사한 근대적 금리수입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자는 물론이고 -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 기업가도, 특히 근대적 기업가도 방금 언급한 금리생활자가 누리는 것과 같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한 국가나 정당이 (경제적 의미에서) 정치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정치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에 의해 운영된다 함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지도층이 '근권 정치적'으로 충원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베버는 근대국가에서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을 하나 이야기 합니다. 근대국가에서 여유 있는 사람만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입이다.

 

재산이 없고 따라서 기존의 경제체제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 집단에 속하는 계층이야말로 - 물론 전적으로 이 계층만이 그런 건 아닙니다만 - 가장 철저하고 절대적인 정치적 이상주의의 주창자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히 비일상적, 즉 혁명적 시기에 그러합니다.

 

물론 재산이 없고 기존의 경제체제의 존속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이상주의적인 정치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정상적인 시기가 아닙니다. 모든 정치가에게 청렴결백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근대 정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당 간의 모든 투쟁은 본질적 목표를 위한 투쟁일 뿐 아니라 관직 수여권을 위한 투쟁이기도 합니다.

 

정당들은 관직 참여에서 뒤지는 것을 자신들의 본질적 목표를 배반하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관직을 얻고자 하는 일 역시 근대 정치가 처할 수박에 없느 필연적인 상황입니다. 정당이 정권을 잡으려는 것은 자신들이 내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더욱 구체적으로 관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미합중국의 정당들은 헌법 해석에 대한 과거의 대립이 사라진 후에는 순전히 관직사냥 정당이 되어버렸으며,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핵심적 정강도 득표 가능성에 맞추어 바꾸어 버립니다.

 

근대 정치의 모습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당들을 지탱하던 정치적 이념이 사라지고 순전히 관직사냥 정당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는 근대국가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정치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근대사회에서 정치는 더러운 것입니다. 종교와 도덕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으로서의 정당이 형성됩니다. 정당은 근대국가의 민주주의 제도가 낳은 조직입니다.

 

p502~503 [파높티콘: 내면화되는 감시의 시선]

벤담의 자유주의와 로크의 자유주의는 다릅니다. 벤담 식의 공리주의에 입각하면 토론이 필요 없습니다. 얼마나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효용을 얻을 수 있는지만 따지면 됩니다. 벤담의 공리주의에 근거해서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것은 사회 연구가 아니라 사회 공학이 됩니다. 벤담의 논의를 받아들이면 행정부가 입법부를 대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행정부는 경제성의 원칙에 따라 굴러갑니다. 이러한 행정부의 우위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에 의회를 경시하는 정치지도자는 기본적으로 벤담의 공리주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잘 구현된 조직이 기업입니다. 기업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생산요소나 비용으로 봅니다. 기업 논리를 완전히 받들이면 효용 중심의 인간이 탄생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업이 작동하는 원리와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원리는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업 논리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하면 민주주의 정치도 발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논리의 효용을 믿기 때문에 기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정치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리석다는 말조차 아까운 사람들입니다.

폴라니는 이러한 효율화의 원리에 따라서 세계를 움직인 결과 파시스트가 등장했다고 주장합니다. 자기조정 시장을 믿고 경제 시스템을 운용했는데 그게 잘 안되니까 피시스트적인 해법이 나왔다는 겁니다. 폴라니가 보기에 파시스트 체제에서 인간은 이익을 따지는 존재조차 되지 못합니다. 그저 체제 전체의 부속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p565. [논어: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다]

남이 나를 알아준다는 느낌은 '스쳐도 죽는 독약'과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느낌을 잊지 못하고 이 느낌에 중독되어 버립니다. 이 느낌이 생기면 사람이 오만해지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미디어에 나가면 남들이 알아줍니다. 그런데 미디어에 중독이 되면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걱정은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는 좀벌레이고, 결국에는 그 좀벌레가 자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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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19. 일을 지연시키는 단순한 원인인 의심은 우유부다함으로 불리며, 이 우유부단함은 분명 '악 중에 가장 나쁜 악'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 위베르 그르니에 <위대한 도덕 이론들 Grandes Doctrines morales>

 

우유부담이 왜 최악일까요? 잘못 행동하는 것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편이 차라리 더 낫지 않을까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물음들에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잘못 행동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데카르트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어떤 면에서 우리는 결코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에 의하면 선택은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식으로 선택되었는가 하는 방법과 그 선택을 지속적으로 밀고 나가는 끈기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정신은 두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유한한 것으로 이해력, 즉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무한한 것으로 의지 또는 판단력, 다시 말해 긍정하고 부정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이해력은 유한하니까요. 하지만 의지는 무한하기에 모든 것을 욕망할 수 있습니다. [...] 모든 문제는 우리 내부의 이러한 불균형에서 비롯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우리 의지는 그것이 '참'이라고 긍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긍정할 수 있지만 무엇이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실수의 개연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실수는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이해하는 것, 이해의 행위)을 확인하는 것(판단하는 것, 의지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의지가 무한하듯 실수를 저지를 개연성 역시 무한합니다. 우리는 이해력이라는 희미한 등불 아래, 어둠 속에서 한없이 빨리 그리고 자유롭게 달릴 수 있습니다.

 

p21. 행동의 비결은 바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법서설>제3부에서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두 번째 원칙은 행동할 때 최대한 단호하고 확고한 태도로 밀고 나가야 하며, 아무리 의심스럽다 해도 일단 견해를 취하기로 결심했다면 그것이 확실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변합없이 계속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여행자들이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처럼,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빙빙 맴돌며 방황하지 말고 한자리에 멈춰 서 있지도 말 것이며, 우연히 어떤 방향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항상 같은 방향으로 최대한 똑바로 걸어가야 하며 사소한 이유들로 절대 방향을 바꿔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확히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어딘가에 다다를 것이고, 아마도 낯선 숲속 한가운데에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p24. 숲속에서 길을 잃은 더카르트는 어떤 길을 따라갈 이유를 전혀 발견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그것이 가장 합당한 선택인 양 자신의 선택을 집요하게 밀고 나간다. 그처럼 확고한 태도로 자기가 선택한 길을 충실하게 따라감으로써 그 우연한 선택을 좋은 선택으로 만든다. - 알랭, <관념>

 

p269. 매그니토는 공공의 안전을 위한거라고 주장하면서 캠페인의 선두에 서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상원의원을 납치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따져 의원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그를 자화시켜 돌연변이로 만들어버립니다.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얼굴에서 일어나는 에너지의 교환을 지켜봅니다. 한편에는 힘을 받는 의원, 다른 한 편에는 교환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힘을 잃어가는 매그니토. 상대방에게 영향을 미침에 따라 매그니토 자신은 녹초가 됩니다. 그 작업은 에너지를 소진시키니까요. 그는 자신에게 해를 입혀야만 그에 비례해서 상대방에게 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증오의 본질입니다. 증오는 '우리 외부'에서 행하는 것을 '우리 내부'에도 행합니다. 그래서 매그니토의 힘은 결국 고갈됩니다. 증오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p271. '나는 인간의 신체가 오직 시체로 변한 경우만 죽었다고 인정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경험은 그 반대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이전과 동일한 인간이라고 하기 주저될 정도로 심한 변화를 겪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정리에 대한 주석>

 

p325. 인간의 문제는 현재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어떤 점에서 자신이 완전한지 이해하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비춰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미래가 더 나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미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현재의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즉 희망은 현재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희망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희망이란 현재에 대해 절망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포기하는 것"은 그러므로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환멸로부터 동시에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희망을 잃는 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느 ㄴ것을 보기 위해 우리에게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더 현재적이 됩니다. 말하자면, '현재에 대해 더욱 현재적'이 된다는 얘기지요. 현재의 것, 그리고 현재의 완전함을 이해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음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p334. 철학은 이성에 대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성이 곧 사랑이라는 의미지요. 이성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은 누구에게도 금지되지 않으며 모든 이에게 똑같은 거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똑같이 갖기 위해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은 누구에게나 온전하게 자기를 내어주니까요. 더욱이 이성의 영역에서는 타인이 우리와 똑같은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 그가 이성을 갖길 바라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이성을 갖고 있고 능동적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역시 가능한 한 능동적이며 그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것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성적인 인간은 오히려 이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신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동시에 신을 알 수 있다. 모든 선 가운데 오직 진리만이 모두에게 대단히 중요한 거실 수 있다. - 알랭, <스피노자>

 

p349. 많은 능력을 발휘하는 신체를 가지게 되면 정신 역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체가 다른 신체보다 동시에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능력이 우월할수록, 그 신체의 정신 역시 많은 것을 동시에 지각하는 능력이 우월하다. 그리고 어떤 신체의 행동이 오직 그 신체에만 좌우되며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신체와 경쟁하는 다른 신체의 수가 적을수록, 그 신체의 정신은 판명하게 이해하는 능력이 그만큼 더 증대된다. - <에티카>, 제2부, 정리 13, 주석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고 다양한 것들을 만나 적합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때 우리의 신체와 정신의 능력은 동시에 발달합니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논문에서 입증한 결과입니다. 그는 신체와 정신은 단일한 것이며, 두 가지 관점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정신에서도 일ㄹ어납니다. 우리가 신체와 정신을 갈라놓을 수 없는 이상,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효과나 결과 또는 반향이 정신에 일어나지 않을 리 없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반향이 아닙니다. 반향이란 원래 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상응하는 효과로 상정되니까요. 신체 내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정신의 생각에 해당합니다. 신체에 일어나는 일은 동시에 우리 정신에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만일 정신까지 부여받은 인공적 존재의 신체가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면, 그 존재의 정신은 더한층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그의 신체가 능동적으로 됨에 따라 그의 정신은 "직접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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