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감동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증보판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구판절판


교회가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숨어 계시는 예수님을 외면한 채, 그분이 누우실 구유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22쪽

내 삶이 독립된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이곳 사람들의 삶도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삶들의 조화로운 섞임이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것을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천사의 양식'이라는 성가를 들으며 깨달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진작 깨달았으면 이 먼 곳까지 오지 않았어도 되었건만, 머리 나쁜 중생에게 이 간단한 깨우침을 주기 위해 이곳 아프리카까지 보내셨으니 머리가 나쁘면 수족이 고생한다는 말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인가 보다.-41쪽

골통들은 운동선수들이 다리에 차고 뛰는 모래주머니 같은 아이들이다. 매고 달릴 때 힘이 들긴 하지만 계속 달리다 보면 모래주머니가 종아리에 알통이 배게 하듯 우리의 인내심에 알통이 배게 하는 인물들이 바로 요놈들이다. 잘만 하면 이 알통 덕에 나도 골통도 천국이 있는 곳까지 끝까지 함께 뛰어 같이 천국 문으로 골인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57쪽

주의하라! 그 골통은 '너'도 될 수 있지만 '나'도 될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60쪽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멋진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는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상대방의 영혼이 우리의 진실한 삶을 통해서, 우리의 진실한 눈빛을 통해서 예수님을 느끼거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에 작은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96쪽

세상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원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 그 좋은 예가 아닐 듯싶다. '내 탓이오!' 하면서 나 자신의 마음가짐만 조금 바꾸면 모든 것이 쉽게 풀려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체면이나 위신 또는 자존심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 즉 타인에게로 돌리려 한다. -172쪽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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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감동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증보판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뭐 볼 만한 영화 없을까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울지 마, 톤즈’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평점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너무 감동적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울먹였고, 새삼 ‘이태석’이라는 이름을 계속 떠올렸다. 2010년 1월 14일. 분명 내가 보는 신문 부고 면에 짤막한 기사라도 실렸었을 텐데, 나는 영화를 볼 때까지도 이태석이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신부님을 모르고 있었다니 때늦은 아쉬움이 들었다. 정말 후회가 막심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 미안함에 대한 속죄의 표시이고, 영화에 대한 나만의 되새김질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또는 책에 담긴 사진들을 보면서 가졌던 생각은 신부님의 미소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정말 지상에서 본 최고의 미소가 아닐까 싶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얼굴에서 미소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슬픈 운명에 대비되어 그 깊이가 더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신부님의 미소는 연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생애의 고고함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향기 같은 것은 아닐까. 이 책도 펜이 아닌 그 분의 미소로 쓴 것 같았다. 생에 대한 긍정과 깨달음이 산을 이루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이 강을 이뤄 완만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해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나와 너의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이태석 신부님에게 톤즈 사람들은 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몸과 같았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신부님에게 있어 톤즈에서의 삶은 ‘희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마치 감기에 걸렸을 때 내 몸을 쉬게 하고 배가 고플 때 내 배를 채우듯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내 삶이 독립된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이곳 사람들의 삶도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삶들의 조화로운 섞임이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것을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천사의 양식’이라는 성가를 들으며 깨달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본문 40-41쪽)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이 신부님의 삶을 흉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신부님은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이방인의 삶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였는데, 나는 우리나라에 소외받고 어려운 이들의 삶을 내 삶과 연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아니다. 이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정책의 우선순위에서는 항상 배제되고, 국익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 한 없이 쪼그라드는 그 소외받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 같이 잘 살자!’는 다짐은 어떨까. 그리고 ‘다 같이’의 영역이 내 가족, 내 나라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될 때, 세상은 이 신부님이 바랐던 그런 좋은 세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무늬만 신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가톨릭에 적을 두고 있는 터라 불편함이 덜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영화는 몰라도 책은 종교적인 거리감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신부님에게 종교가 중요하지 않았듯,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삶을 이해하는데 종교적 표현들이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신부님의 삶을 되짚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너무 늦게 그분의 이름을 찾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 (본문 19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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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j7074 2011-01-23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너무 잘쓰셔서 퍼가요. 꾸벅꾸벅..

송도둘리 2011-01-24 08:53   좋아요 0 | URL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조광조 -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증보신장판)
정두희 지음 / 아카넷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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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가 또는 이상주의자. 조광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무척이나 단편적이다. 그리고 그의 개혁정치는 너무 이상적이었고 과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아니 그 이상의 관심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사실 조광조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역사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엄격하고 완벽해서 가까이 가기 힘든 이미지이다. 이 책은 조광조의 인간적인 면을 밝혀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실록과 <정암선생문집> 등 접근 가능한 사료들을 분석하여 조광조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조광조가 이상주의자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조광조의 개혁이 과격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당시 시대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중종반정으로 무너졌지만 반정세력들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중종은 반정세력들의 ‘바지사장’일 뿐이었고, 반정의 주역들은 몰염치하고 무능했다. 그들은 연산군 조정의 신료들이었고, 그들도 연산군의 정치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그런데도 별 공도 없는 친인척들을 정국공신 목록에 올림으로써 공분을 자아냈다. 한마디로 정권의 도덕성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황이었다.

  조광조는 이러한 국정파탄의 원인을 ‘국가의 근본’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국시인 성리학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겼다고 본 것이다. 그는 왕에서 조정의 대신들에 이르기까지 ‘명도근독(明道謹獨)’, 즉 성리학의 정신을 따르고 홀로 있을 때조차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국가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면에서 조광조는 극도의 이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조광조는 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기 먼저 솔선수범하여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사림들의 대표가 되고 조정에서도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개혁이 과격하지는 않았다. 과거제를 대체하는 현량과, 즉 추천제 임용을 제안하면서도 대신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절충안을 채택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과거제를 운용하되 별시를 현량과로 운용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그리고 이런 정도의 개혁은 조선의 체제에서도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국공신들은 크게 위협을 느꼈고, 조광조 일파를 급습해서 개혁을 무위로 돌려놓는다. 조광조는 정치를 알지 못했다. 이상을 실현하는 데는 혁명이 아닌 이상에야 정치가 필요함을 몰랐던 것 같다. 군권을 장악한다든가 완급을 조절한다든가의 대비가 전혀 없었다. 어쩌면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그가 현실 정치에 발을 붙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 자체가 비극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유능한 정치인이 행동으로 보이고 조광조가 뒤에서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더라면 개혁의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조광조가 하려고 했던 개혁은 민생과는 조금 거리가 먼 작업이었다. 그리고 조광조가 원했던 나라는 이후에 실제로 도래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의 성리학이 유일한 학문으로 자리 잡은 조선은 그리 이상적인 사회는 아니었다. 어쩌면 조광조의 개혁은 지금의 관점에서 본다면, 민초들의 삶과는 무관한 지배층 내부의 노선투쟁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조광조 본인도 유력 가문 출신이었고, 그가 주장하는 성리학 사회가 되면 민초들의 삶이 거대한 이데올로기 속에 갇혀 더 부자유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개혁이 갖는 가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 때문일 것이다. 아는 것을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조광조는 배운 것을 토대로 사회의 불의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현재 정국의 문제점을 간파해 당시 지배층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현실 정치에 들어와서도 꼿꼿한 지식인의 모습을 유지했음은 물론이다. 지금 조광조와 같은 지식인의 전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에도 폴리페서라고 불리는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이 많고,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데도 끊임없이 정치참여의 요구를 받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정치와 학문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도 각자의 할 일이 따로 있는데, 우리나라 정치와 학문은 각자 서기에는 너무나도 취약한 것 같다. 조광조가 살던 시대에는 정치와 학문이 분리되지 않았던 때라 정치에 휩쓸려 조광조가 실패를 맛볼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실천적 지식인이 사회의 민주주의적 토대를 닦고, 현실정치인은 그 토대 위에서 수준 높은 정치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시대는 언제쯤 가능할까.

  이 책은 지나치게 학술적이지도 않고, 대중적으로 치우치지도 않았다. 때문에 누구나 읽어도 좋은 책이다. 또, 조광조라는 한 인물이 살았던 시대의 전후를 모두 추적하면서 자칫 인물중심으로 흐를 수 있는 시선에 균형을 잡았다. 절판된 것이 무척이나 아쉽지만 찾아서 본다면 후회하지 않을 책이다. 16세기 조선사와 조광조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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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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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정말’이라는 수식어로 부족하다면 개인 취향에 따라 요즘 어린 학생들이 입에 달고 사는 ‘XX'라는 단어를 그 앞에 추가해도 좋다. 하지만 지하철을 타면서 보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표지에 이름 모를 문학상이라도 수상했다고 되어 있다면 멋지게 보일 수도 있으련만, 피식피식 터지는 웃음과 출몰하는 B급 단어들이 오히려 사람을 좀 모자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잘난 척, 배운 척 못하게 하는 웃기는 소설이다.

  더군다나 이 소설은 막장드라마이다. 우선 등장인물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주인공 인모는 40대 후반의 영화감독인데, 쫄딱 망해서 70대 노모의 집으로 숨어든다. 그런데 그 집에는 이미 강간 전력에 전과 5범인 형 한모가 신세를 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미연까지 조카딸을 데리고 합세한다. 불륜으로 두 번째 이혼을 당한채로 말이다. 70대 노모의 집에 장성한 삼남매가 모두 의지하는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막장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 막장드라마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인간망종’ 오한모가 아니라 오히려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은’ 인모다. 그는 ‘도대체, 이놈의 집구석엔 멀쩡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투덜대지만 사실 지저분한 짓은 인모가 다한다.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다 걸린 조카에게 엄마에게 이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삥’을 뜯는 것은 애교다. 미용실 여주인을 꾀어서 겁탈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한다. 이건 경찰에 걸리지 않았을 뿐이지 한모보다 더 한 구제불능이다.

  배운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걸까? 인모는 ‘감정은 메마르고 사랑을 믿지 않는 괴물’이 되어 있었다. 사실 세상에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배운 사람들이다. 좀 배운 사람들은 ‘이성’과 ‘대의’라는 이름으로 마음의 소리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들이 배제하려고 애를 쓰는 ‘감정’이란 사실 ‘인간다움’의 다른 이름인데 말이다. 대규모 국책 사업이라는 이유로 서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뺏고, 산천의 동식물의 보금자리를 훼손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것은 굳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더라도 명철한 이성에 기대어 비용-편익 분석만 제대로 해도 알 수 있는 일인데 말이다.

   
  최근에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나는 언제나 특별한 혜택을 받고 살았다. (중략) 그들은 늘 나를 배려해줬고 무엇에서든 우선권을 주었다. (중략) 순전히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를 지지해줬지만 나는 고생 없이 평탄하게 살아온 덕에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들을 무시하고 경멸했으며 그들을 부담스러워하기까지 했다. 나에 대한 기대가 부서져 산산조각난 뒤에도 그들은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 자신이 나를 포기한 뒤에도 그들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본문 252-253쪽)
 
   


  어쨌든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서, 이들 남매를 구원하는 것은 엄마였다. 현실적으로 생계를 노모에게 의존하고 있기도 하지만 여기서 ‘구원’이란 더 높은 차원의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에서만 완성되어’가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기실 엄마의 모습이기도 했다. 사회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아들딸들을 아무 말 없이 거두고 고기반찬을 가득 내어주는 그 삶 자체가 하나의 경전이었던 것이다. 자식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 사실들을 깨달아간다.

   
  그래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 끼니를 챙겨주는 것뿐이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고기를 해먹인 것은 우리를 무참히 패배시킨 바로 그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몸을 추슬러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우라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본문 198쪽)
 
   


  이 책은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해피엔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삼남매 모두 지금은 형편이 좀 나아졌지만 모두 나중에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을 하나씩 안고 있다. 만약 이 소설의 속편이 나와서 또다시 실패한 이들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이다. 내일이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각자의 구덩이에서 빠져 나왔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그곳에서. 그것도 각자 깨달음을 한 아름 씩 안은 채로 말이다. 작가는 어쩌면 가장 막장인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보여주며 우리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각자 지금의 삶에 귀 기울여 보라고, 남루해 보이는 그 삶의 보따리에서 반드시 희망의 노래가 들릴 거라고’ 말이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암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본문 286~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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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와 한서 - 중국 정사正史의 라이벌
오키 야스시 지음, 김성배 옮김 / 천지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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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 과제로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사기>와 <한서>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들을 비교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했다. 사마천과 반고의 관점을 교차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한서>번역본이 없었다. <한서>의 열전만 몇 편 추려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약간 실망하면서 좀 더 검색을 해보니 <사기>와 <한서>를 비교해놓은 책이 이미 출간되어 있었다. 바로 이 책이었다. 반가웠다. 

  읽어보니 논문 2편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책이다. 앞부분은 <사기>와 <한서>의 특징 비교와 시대별 평가 추이를 정리해놓았고, 뒷부분은 <사기>와 <한서> 중에서 한 편을 꼽아 비교, 설명해준다.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기 보다는 일반학계의 기존 연구성과들을 잘 정리해놓은 것 같았다. 물론 <사기>와 <한서>에 관심이 많다면 그에 얽힌 이야기들과 상식들을 얻는 잔재미가 충분하다. 하지만 일반 독자의 관심을 당길 만한 포인트는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2편에는 <사기>와 <한서>에서 직접 한 편을 뽑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언부언과 같다. 왜냐하면 1편에서 이미 <사기>와 <한서>가 각각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설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슷한 주제의 논문 2편을 읽는 느낌이라고 말했던 이유이다. 

   일본에서도 <사기>완역은 많지만 <한서>의 제대로 된 번역본은 없는 모양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일본의 학풍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시대별로 <사기>나 <한서>에 대한 각각의 평가가 달라지듯이 현대는 <사기>의 시대인 것일까?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중국문학 연구의 거장인 요시카와 고지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의 고전산문을 연구하려면 <사기>와 <한서>, <후한서>, <삼국지> 즉, 전사사(前四史)는 읽어야 한다'고 말이다.  

  아마도 일제가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준비로 대대적인 투자와 지원을 했던 탓에 그렇겠지만, 중국사의 저명한 학자들 중에는 일본인들이 많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가 밟아온 자취를 들여다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고, 한 나라를 알기 위해서 그 역사를 연구하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의 각 영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과거나 지금이나 매우 크다. 그리고 앞으로도 점점 커질 것이다. 최근 외교부에서 '중국연구센터'를 발족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시점에 <한서>를 비롯한 전사사의 번역이 이뤄진다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중국사에 대한 관심을 대중적으로 고취시킬 수 있고, 그 기반 위에서 우리나라에도 저명한 중국사 연구자가 많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 <한서>의 제대로 된 완역본이 없는 상황에서 <사기>와 <한서>의 차이점을 살펴보자는 것은 사실 좀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느낌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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