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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게임 - Perfect Gam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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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원과 선동열.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라이벌로 묶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단지 뛰어난 야구실력만으로 이야기되기에는 그들의 배경이 너무 흥미로웠던 것이다. 롯데와 해태. 경상도와 전라도. 고려대와 연세대. ‘무쇠팔최동원과 고무팔선동열은 야구사를 통틀어 총 3번 맞붙었고, 이 영화는 연장 15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19875월의 마지막 대결을 그리고 있다. 이 정도의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기대되는 영화였는데 막상 보고 나니 생각보다 더 멋진 영화였다.

 

두 선수의 맞대결만으로도 충분히 뜨거웠겠지만, 이 경기가 더욱 폭발력이 컸던 이유는 야구 외적인 열망들이 주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이 열망들을 영리하게 포착해낸다. 정치로부터 국민의 눈을 돌려 생명을 연장하려는 권력, 구체적인 적대감의 근원을 숨긴 채 제멋대로 춤추는 지역감정, 더 화끈한 기삿거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언론. 이 세 가지 힘이 열심히 불어넣는 각자의 열망들 덕분에 최동원과 선동열의 야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상당히 왜곡되고 만다.

 

경기의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관중의 지역감정도 불이 붙고, 국민의 시선도 875월 한창 위태로웠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이 한 경기에 쏟아지고 있었다. 권력의 의도대로, 지역감정과 광기가 활개치는 듯 했다. 하지만 어깨의 통증에도, 손가락의 상처에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두 선수의 열정 앞에 드디어 모두 정신을 차린다. 단 한 경기를 향한 두 선수의 전력투구는 모두에게 감동을 줘 롯데 관중은 선동열의 이름을 외치고, 해태 팬들은 최동원을 연호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너무나도 멋있어서 그만큼 비현실적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완성된다. 이 장면을 보면서 이렇게 외치고 싶어졌다. ‘우리 누구도 그들에게 놀아나지 않았다.’라고. ‘우리는 그렇게 쉬운 사람들이 아니야!’라고.

 

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야구는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9명이 하는 스포츠다. 투수 혼자 아무리 잘해도 내야수와 외야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결코 멋있는 경기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최동원이나 선동열이더라도 9회 내내 삼진으로만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는 없다. 어려운 타구를 병살로 연결하고, 넘어가는 공을 펜스 앞에서 잡아내는 것은 나머지 선수의 역할이다. 최동원의 경기가 최동원만의 경기가 아니고, 선동열의 승리는 선동열만의 승리가 아닌 것이다. ‘나는 롯데의 4번 타자가 아니라 최동원의 1루수다라는 말이 듣기에는 멋있게 들리지만 두 영웅에 시선을 쏟느라 나머지 선수의 역할은 너무 축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최동원과 선동열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이 두 선수의 열정에 각성되어 자기 능력 이상을 발휘한 기타선수들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야구에 대한 열정을 다했을 뿐이다.

 

끝으로, 영화에 더욱 힘을 불어넣는 것은 배우들의 호연이다. 각각 최동원과 선동열을 연기한 조승우와 양동근은 연기파 배우라는 그들의 명성이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만년 2군 포수 박만수 역으로 출연한 마동석은 눈빛만으로도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최동원과 동기이지만 늘 최동원에게 가려 열등감에 차있는 롯데 타자 김용철을 연기한 조진웅과 성기영 감독역의 이도경도 코믹한 연기로 영화의 맛을 더한다. 사족이지만 박만수와 강현수 등은 가상의 인물이라 별개로 치더라도, 성기영 감독이나 김용철 선수는 자신이 영화 속에서 코믹하게 변형된 것을 과연 어떻게 생각할지 새삼 궁금해지기도 한다.

 

퍼펙트게임은 생각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이다. 나처럼 그 시대를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는 감동을, 그 현장에 있었던 아버지세대에게는 추억을 선사해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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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간이 - 3 Idiot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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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엎치락덮치락 이야기가 격동하고 반전을 거듭하면서 미친 듯이 이야기가 내달린다면? 동시에 주인공들이 결혼식장에서 도망치고, 미워하다가 사랑하고, 죽었다가 깨어나고, 싸우다가 화해하고, 포악했다가 인자해지는 변신을 거듭한다면?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50부작 대하드라마가 아닌 ‘딸랑’ 120분짜리 드라마에서 펼쳐진다면 어떨까? 여기까지만 듣고 그 드라마를 평가해보라고 한다면 백이면 백 모두 ‘막장 드라마’라고 말할 것이다. 앞서 말한 사례들은 모두 ‘세 얼간이’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이렇듯 ‘막장’의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극장에서 목격한 관객들은 모두 한 발짝 뒤로 물러서 비판하기보다는 그저 영화와 함께 뒹굴며 웃는데 더 열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낯설고 거칠며 산만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 영화가 왜 이런 설명하기 힘든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일단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영화는 인도의 한 공과대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배우들이 우리말만 잘 구사할 수 있다면, 카이스트 혹은 한국의 대학으로 배경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학점과 취업의 노예가 되어 진짜 ‘공부’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대학생들, 그리고 학생이 아니라 ‘기계’가 되도록 강요하는 사회구조와 교육시스템. 이것은 비단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도 목도하고 있는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사회이슈화 되었던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과 카이스트 총장님의 경쟁지향의 학사운영방식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례들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이 이야기가 남의 뒷담화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한다. 이야기의 거칠고 성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한 동시에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매우 낯선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은 우리나라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할리우드와 우리나라 주류의 영화에서는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서사방식을 취한다. 이야기의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노래와 춤과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심각한 주제에 힘을 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저 낯섬과 독특함을 즐기면서 웃다가 보면 금새 영화 안으로 빠져들고 만다.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의 화려함이나 대스타의 연기에서 풍기는 아우라는 없지만 소극장의 연극에서 느낄 수 있는 소박하고 뜨거운 열정과 활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야기의 뻔한 전개와 너무 급격한 흐름에 날선 비판의 칼끝을 세우다가도 낄낄거리고 훌쩍거리다보면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즈음에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대학총장 비루(보만 이라니)가 란초(아미르 칸)에게 펜을 건네주는 장면일 것이다. 경쟁과 효율 위주의 현재의 교육시스템을 옹호하는 비루가 비판적인 란초를 인정하는 동시에 란초에게 ‘너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토로하는 장면은 인간과 인간, 제도와 제도 간의 화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두 방식 모두 각각의 유용함이 있다. 공부의 지난함과 암기의 늪을 건넌 후에야 학문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반대로 학문이 즐겁지 않다면 공부의 지난함과 암기의 늪을 건널 인내와 힘을 얻을 수 없다. 암기냐 창의냐, 경쟁이냐 방임이냐. 전혀 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독초가 약이 되기도 하고 홍삼이 독이 되기도 한다. 적당한 것을 적절한 시기에 쓰는 것이 명의다. 우리 교육에는 이런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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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드레서 - The Hairdress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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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는 ‘다양함’에 대한 찬가(讚歌)다. 이 찬가는 총 3악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우선 1악장은 뚱뚱함에 대한 예찬이다. 주인공 카티(가브리엘라 마리아 슈마이더)는 엄청난 비만이다. 세상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아름답지 않은 ‘뚱땡이’에 불과하지만 카티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요새 우리나라에서는 예능 프로그램까지 나서서 시청자들의 살을 빼는데 혈안이지만 카티에게는 정말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카티의 지론은 말하자면 이렇다. 날씬한 사람이 있으면 뚱뚱한 사람도 있는 법이고,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이라고 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다양성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하나하나씩 구별 짓기 시작하면 다양성은 소멸하고 만다. 한편, 있는 그대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자학과 차별이 발붙일 데가 없다. “내 있는 그대로 가치 있는 데 남들의 시선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카티는 뚱뚱함마저도 다양성의 하나로 파악하고 자신이 가진 그대로 만족하고 긍정한다.

  2악장은 다문화에 대한 예찬이다. 영화는 카티가 베트남 출신 불법 체류자들의 입국을 도와주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설정하여 다문화사회에 대한 예찬을 노래한다. 최근에 노르웨이에서 벌어진 참극과는 달리 카티와 그녀의 딸 율리아(나타샤 라비주스)는 베트남인들과 그들의 문화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섞이는 것을 즐기는 듯 보인다. 영화는 카티와 베트남출신 청년 티엔(김일영)의 러브스토리에 이르러 절정을 맡는다. 독일인 여자와 베트남 남자, 뚱뚱한 여자와 홀쭉이 남자, 그리고 아줌마와 젊은 남자 사이의 이 극적인 결합은 감독이 지향하는 사회를 완벽히 형상화한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에는 부합할지는 몰라도 드라마의 흐름에는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뜬금없는 베트남인들과의 좌충우돌은 영화중간에 어중간한 분량으로 삽입되어 영화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이야기의 집중도 상당히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3악장은 카티의 머리 색깔로 표현된다. 카티가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손님들에게 강권하는 헤어스타일은 빨주노초파남보의 브릿지가 들어간 짧은 머리다. 이 헤어스타일은 그 자체로 다양함에 대한 예찬의 시각적 상징으로 보인다. 사람 취향의 차이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 관점으로는 그런 헤어스타일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의 다양성에 대한 예찬의 상징으로서는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헤어드레서는 세상의 기준으로는 우울하고 구질구질하게 살 것만 같은, 하지만 실제로는 박력 넘치고 긍정적인 여성 카티를 전면에 내세워 다양함, 무지갯빛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다만 아까 말한 것처럼 영화의 중후반부에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쳐 약간의 지루함과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쉽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유쾌하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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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8-01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함에 대한 찬가로 보신 점 동감이에요.
그 베트남 남자는 실제로 우리나라 배우라고 하더군요.
여자가 느끼는 행복(순간이라 해도)을 여실히 보여주는 그 장면.^^
후반(결말) 부분이 좀 바쁘게 맺는다싶었지만 경쾌하게 끝나서 다행이었어요.
헤어디자이너가 아니라 헤어드레서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카티.^^
근데 그말이 뭐가 다를까요?

송도둘리 2011-08-01 18:34   좋아요 0 | URL
글쎄요...저도 궁금했어요. 그게 무슨 차이일지...
어감에서 풍기는 손님과 미용사의 접촉의 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카티의 유쾌한 미소와 씩씩한 걸음걸이가 다시 생각이 나네요.^^
프레이야님의 감상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어베러월드 - In a Better Worl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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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대륙. 반군들에 의해 다른 부족민들은 끔찍한 피해를 입기 일쑤다. 그 끔찍한 폭력과 야만성 앞에 피해자들은 “저 놈들은 인간도 아니에요.”하고 욕을 퍼붓는다. 덴마크에 거주하면서 종종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펼치는 안톤은 그곳에서 일상적으로 폭력이 행해지는 모습을 발견한다. 하지만 폭력은 아프리카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안톤은 덴마크로 돌아와서도 폭력의 뿌리를 곳곳에서 발견한다. 학교와 집 앞 공터. 이빨이 튀어나오고 조금 어수룩해 보이는 안톤의 아들, 엘리아스는 또래들에게 ‘쥐새끼’라고 놀림을 받는다. 또 다른 날, 아이들끼리의 싸움을 말리던 안톤은 다른 꼬마의 아버지에게 뺨을 맞는다. 나의 잘못 없이 가해진 폭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영화는 문명화된 세계의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비문명화된 지구 반대편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실체를 교차하며 보여준다. 그리고 그 두 폭력의 속살은 결국 같으며, 과연 우리는 폭력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엘리아스의 친구 크리스티안은 놀리는 아이에게 본 때를 보여주어 다시는 얕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뺨을 때린 아저씨에게도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복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복수의 밑바닥에는 정의감이 있다. 하지만 안톤은 그렇게 되갚으면 폭력이 끊이지 않는다고, 그렇게 복수하면 결국에 내가 그 사람에게 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아이들은 이런 안톤을 겁쟁이라고 생각한다. 안톤 자신도 자신이 겁쟁이로 비추어지는 것에 괴롭다. 이유 없는 폭력에 대한 수치심과 모멸감 그리고 분노가 몸을 휘감고 돈다. 하지만 안톤은 결국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아스와 크리스티안에게는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아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 또다른 경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결국 아이들은 스스로 그것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폭력이 행해질 때, 억울함과 정의감이 복수에 힘을 실어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폭력에 의한 복수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겁쟁이로 비춰질 것 같은 두려움에 등이 떠밀리는 과정도 보여준다. 영화는 오도된 정의감과 ‘쪽팔림’을 이겨내면서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 동시에 대화와 교감을 통해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여전한 의문은 남는다. 자신의 잘못을 전혀 반성하지 않는 거대한 악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도덕적 우월감으로 그들의 폭력을 비웃으며 내 갈 길로 간다고 그것으로 끝인 것일까?

  영화의 반군지도자의 사례를 보자. 안톤은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휴머니즘을 발휘하지만 그 사람은 그래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 안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캠프에서 내쫓으려고 하고, 결국 반군지도자는 성난 군중들에게 맞아 죽는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이 장면을 어떻게 봐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반성 없는 거대한 악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안톤은 처음에는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지켰지만, 나중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가 맞아죽도록 방치했다. 일단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지 않은 것인가? 결국 거대한 악은 신이 처벌하는 것인가. 피해자들인 군중들이 가해자 반군지도자에게 행한 집단폭력은 폭력인가, 폭력이 아닌 신의 뜻인가? 영화에서는 반군지도자의 죽음으로 아프리카에서의 폭력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반군들이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하려고 달려들지는 않을까? 그렇게 되면 다시 폭력은 끊이지 않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반군지도자를 그대로 캠프 밖으로 걸어 나가도록 두었다면 그는 또다시 악행을 저지를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인간의 오래된 딜레마가 아닐까 싶다. 대화와 교감이 폭력을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면서도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것이 대화와 교감이 불완전한 비법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화와 교감은 훌륭한 대응책이나 그것이 결실을 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제각각이라 인간의 인내로는 그것을 기다리기 힘들 때가 많은 것이 문제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명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지만 인간으로서 결코 피할 수 없는 문제 앞으로 인도한다. ‘미션 클리어!’의 개운함은 없지만,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다음 탈락자는 누구일지에 대한 고민보다 훨씬 가치 있는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이며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는 영상과 줄거리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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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베러월드 2011-06-3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인어베러월드 공식 블로그입니다. 좋은 리뷰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과 나누고 싶은데, 혹시 저희 블로그로 퍼가도 될런지요? 감사합니다^^

송도둘리 2011-07-02 14:03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써니 - Sunn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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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뻔했다. 유치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판단이 들기 이전에 나는 웃었고 때론 울컥했다. 이 영화는 재미를 주는데 성공한, 그리고 관객들 각자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 잘 만든 상업영화다. 80년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여학생들의 우정을, 지금은 누군가의 아내와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잊고 지냈던, 그 추억을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까딱하면 뻔해보일뻔 했던 이야기를 돋보이게 만든 것은 배우들의 좋은 연기다. 아역배우부터 성인연기자까지 그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연기를 보여준다.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특히 유호정의 아역을 맡은 심은경과 소녀시대 리더역을 맡은 김신아의 연기는 특히 돋보인다. 어쨌든 이 영화를 흥행으로 만든 것은 배우들의 힘이 크다. 강형철 감독은 모든 아역배우들에게 거하게 한 턱 내야할 것 같다.   

  다소 길게 느껴지는 시위대와 전경 속에서 펼쳐지는 써니와 소녀시대 간의 격투신은 이 영화의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민주화 운동은 다소 코믹하게 그려지는데 극중 나미(유호정, 심은경 분)의 오빠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지만 입만 살아있고 능력은 다소 부족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또 나미의 어머니의 입을 통해, 40대가 된 지금은 '직원들의 월급을 가지고 도망'가는 타락한 신세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연장선 상에서  시위대와 전경 속의 코믹한 격투신을 보아야 할 것이다. 강형철 감독은 80년대 엄혹한 독재의 시대, 민주화라는 커다란시대적 과제 속에서 개인의 청춘을 내던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10대와 20대의 청춘의 꽃같던 시절을 보낸 사람도 많았음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즉, 엄청난 시대적 과제 속에서 잊혀지기 쉬운, '민주화 투사'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찬란했던 청춘의 시절을 조명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 속 시위 현장에는 강경대와 김귀정은 없고, 써니와 소녀시대의 코미디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지워내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하지만 '써니'에게 '화려한 휴가'를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강경대와 김귀정은 다른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하고, 나는 이 영화에서 우리 삼촌과 고모들의 청춘을 본다. 민주화 운동과는 전혀 관련을 맺지 않고 그 시절을 살아왔던 내 가까운 얼굴들을…. 그리고 이유없이 웃고 이유없이 즐거웠던 나의 중학교 학창시절을 건네다 본다. '사총사'니 '오총사'니 소수정예의 비빌언덕을 만들어 그 안에서는 누구보다 자유롭고 행복했던 그 때를 추억해본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무수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향수를 자극하는데 성공한, 관객들의 웃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 잘 만든 상업영화다.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영화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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