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대중들이 널리 알고 있는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라, 굳이 등장인물의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었나 싶다. 박용각, 곽상천, 김규평 등 극중 인물의 이름이 귀에 착 감기지 않는다. 성이라도 실존인물과 일치시켰으면 좋았을 텐데, 마지막까지 ? 누구?’ 하면서 보았다. 등장인물의 이름이 혼란스러울 뿐, 스토리는 정돈되어 있고, 영상은 꽤 차분하게 흘러간다. 2시간 가까이 되는 러닝타임이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극장 안에 사람이 가득 차 있었지만, 너나없이 조용했다. 영화는 꽤 흡입력 있다.

 

   다만, 나이 든 어르신 중 몇 분은 정치적인 이해가 다른 때문인지, 지루해서인지 종종 휴대전화 화면을 껐다 켰다 했다. 같이 보았던 아내도 살짝 졸았다고 하니 생각보다 재미없다는 평가도 꽤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성민은 '박통'에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고, 곽도원, 이희준도 제 몫을 다한다. 이병헌도 종종 구설에 많이 오르지만 왜 이병헌인지를 증명했다.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 대사만 지켜봐도 흥미로운 영화다.

 

   이 영화는 사실 정치적인 이상보다는 한 인간의 비애를 담고 있다. 정의감과 사명 의식에 움직이는 인간보다는, 믿음과 배신, 경쟁과 공포, 기대와 선망, 그 안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 그 인간의 비애를 담고 있다. 권력은 비정하고, 승자도 정의도 없다. ‘임자 하고 싶은 대로 , 임자 옆엔 내가 있잖아.’라는 무한한 신뢰와 응원의 말이 실제는 책임회피이자 함정임이 밝혀질 때, 그 비참함과 환멸을 극복할 수 있을까.

 

   결국 승자는 누구인가. 혼란의 와중에 박통의 금괴를 들고 사라졌다가 화려하게 복귀하는 '전두혁'일까. 참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세상은 점차 나아질까. 우리 조직의 생리가 조폭과 같다면, 우리는 여전히 남산의 부장들이 살았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아직 주변 곳곳에서 그 잔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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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논쟁(?)의 중심에 있던 그 책은 아직 읽지 못했다. 어떤 이야기가 풀어질지 너무 분명해서 불편했고, 내가 거기에 취할 입장이 어떤 것일지 불안하기도 해서였다. 그 책이 영화화됐다고 아내가 보러 가자고 했지만, 호기롭게 그러마고 대답하지 못했던 이유다. 하지만, 막상 보고 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영화였다.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질 만큼 공감했다. 연기자들의 연기도 하나같이 훌륭했다. 어디서 이런 배우들을 데려다 놨는지 놀라웠다. 물론, 이야기가 너무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워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영화 속에서 김지영이 하는 집안일들의 대부분을 내가 하고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는 내가 바로 김지영이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집안일의 분장이 김지영이 겪고 있는 고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등등의 말은 자주 들어왔던 말이다. 공공화장실에서의 불안 등 갖가지 형태의 불안도 모두 현실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불안과 차별이 얼마나 많을 것이고, 그런 크고 작은 차별들이 행동과 사고를 얼마나 제약할지 생각하면 정말 슬픈 일이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결혼의 문제, 육아의 문제도 엄연한 현실이다. 육아 때문에 희생되는 여성의 삶, 딸만큼은 자기처럼 살게 하지 않으려고 딸들의 어머니들이 짊어지는 육아의 고통, 개인의 삶에 너그럽지 않은 회사, 육아휴직을 내지도 안 내지도 못하는 남자들의 고민 등. 어디 하나 가짜가 없다.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허상이 아니다. 우리 세대라면 남자든, 여자든 충분히 공감할만한, 그리고 공유하고 있는 세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논란이 되고, 별점 테러를 당하는 것을 보면, 00년생 김철수가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들에게는 분명 이와는 다른 고민과 고통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00년생 김철수의 세상과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를 비교하여 누구의 고통이 더 무거운지 비교할 이유는 없다. 왜 우리는 내 고통이 더 크므로 네 고통은 별게 아니라고 꽥꽥 소리를 지를 만큼 각박해졌을까. 82년생 김지영의 세계를 개선해야 00년생의 세계가 행복해진다. 그 세계는 이 세계의 연장이므로. 누가 불행해지는 만큼 내 이웃이, 내 가족이 아픈 것이므로. 00년생 김철수의 고통은 다른 무대에서 심도 있게 다뤄져야 한다. 82년생 김지영의 무대에 난입해서 주장할 이유는 없다.

 

  아직 책은 읽지 못했지만, 영화가 책보다는 부드럽게 다뤄졌다고 한다. 일단 남편의 모습이 공유로 형상화 되어 현실성을 많이 잃기도 했고. ㅎㅎ 사실 내가 가장 마음이 쓰이는 인물은 지영이 아버지였다. 그라고 딸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차별할 마음이 있었겠는가. 하지만 자기가 경험한 지식과 경험 때문에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준다. 우리는 오랜 세월 그렇게 자라왔다. 그 결과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제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았으면 바뀌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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