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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감동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주인공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이야기, 증보판
이태석 지음 / 생활성서사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뭐 볼 만한 영화 없을까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울지 마, 톤즈’라는 영화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평점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별 고민 없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너무 감동적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울먹였고, 새삼 ‘이태석’이라는 이름을 계속 떠올렸다. 2010년 1월 14일. 분명 내가 보는 신문 부고 면에 짤막한 기사라도 실렸었을 텐데, 나는 영화를 볼 때까지도 이태석이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신부님을 모르고 있었다니 때늦은 아쉬움이 들었다. 정말 후회가 막심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그 미안함에 대한 속죄의 표시이고, 영화에 대한 나만의 되새김질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또는 책에 담긴 사진들을 보면서 가졌던 생각은 신부님의 미소가 정말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정말 지상에서 본 최고의 미소가 아닐까 싶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말기 암 판정을 받은 후에도 얼굴에서 미소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슬픈 운명에 대비되어 그 깊이가 더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이 신부님의 미소는 연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 생애의 고고함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오는 향기 같은 것은 아닐까. 이 책도 펜이 아닌 그 분의 미소로 쓴 것 같았다. 생에 대한 긍정과 깨달음이 산을 이루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사랑이 강을 이뤄 완만하게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해달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나와 너의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이태석 신부님에게 톤즈 사람들은 남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몸과 같았기 때문에 그들의 아픔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신부님에게 있어 톤즈에서의 삶은 ‘희생’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마치 감기에 걸렸을 때 내 몸을 쉬게 하고 배가 고플 때 내 배를 채우듯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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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독립된 나 혼자의 삶이 아니라 이곳 사람들의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이곳 사람들의 삶도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그리고 시공을 초월한 각기 다른 삶들의 조화로운 섞임이 십자가 위에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었다는 것을 아프리카의 한 작은 마을에서 ‘천사의 양식’이라는 성가를 들으며 깨달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본문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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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이 신부님의 삶을 흉내 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신부님은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이방인의 삶도 자기의 삶으로 받아들였는데, 나는 우리나라에 소외받고 어려운 이들의 삶을 내 삶과 연결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아니다. 이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정책의 우선순위에서는 항상 배제되고, 국익이라는 거대한 이름 앞에서 한 없이 쪼그라드는 그 소외받은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고 그 아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다 같이 잘 살자!’는 다짐은 어떨까. 그리고 ‘다 같이’의 영역이 내 가족, 내 나라를 넘어 전 세계로 확장될 때, 세상은 이 신부님이 바랐던 그런 좋은 세상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무늬만 신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가톨릭에 적을 두고 있는 터라 불편함이 덜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 영화는 몰라도 책은 종교적인 거리감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신부님에게 종교가 중요하지 않았듯,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삶을 이해하는데 종교적 표현들이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부디 많은 사람들이 이 신부님의 삶을 되짚었으면 좋겠다. 나처럼 너무 늦게 그분의 이름을 찾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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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며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데에 그들이 가톨릭이나 개신교면 어떻고 이슬람교면 어떤가? (본문 194-1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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