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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개월의 새 ㅣ 황석영 중단편전집 3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10월
평점 :
절판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그래서 어떤 사람들의 속까지 어지러워질수록, 곳곳에서 '나'를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커지는 모양이다. 무진에 간 윤희중이 역에서 만난 미친 여자에게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하인숙에게서, 자살한 술집 작부에게서도 자신을 발견하는 일과 몰개월에서 '나'가 '빠꿈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들은 모두 자신이 다른 육체 속에서 발견한 자신을 결국은 버리게 된다.
그것은 버림받는 당사자들이 더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버림받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늘 가슴 아픈 이별을 새롭게,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며, 떠나는 이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는 "몰개월의 똥까이"들의 이별 준비가 그렇게도 완벽하고 철저한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보상으로 "일년 치를 앞당겨 받은 봉급을 침 발라 헤는 병사들"과 같은 특교대의 병사이다. 출전 전 마지막으로 군장 검열이 끝나고서 몰개월에서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추장을 만나고, 추장을 만난 것으로 인해 "시궁창에 하반신을 담그고 엎드린 여자", 미자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미자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공연히 자신이 "먼 벽지나 부둣가의 어둠 속에 콱 처박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아마 미자와의 만남이 자신에게 남기게 될 흔적의 성격에 대한 예감이었을 것이다.
미자는, "어디서 흘러왔는지도 모를 작부들이 집마다 두세 명씩 기거"하는 몰개월 갈매기 집의, "전국에서 가장 깡다구가 센 년들이란 소문이 자자"한 '똥까이'들 중 하나이다. 그 몰개월의 똥까이들은 모두 쓸개가 빠져서는 "모두들 애인 하나씩 골라서는 편지질"을 하지만, 그 상대편은 죽어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제대하고 가면서 몰개월에 찾아와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는 매정한 놈들뿐이다.
'나' 역시도 제대하면 그만이더라는 다른 놈들과 결국 다를 바 없겠지만, 갈매기 집의 온돌방에서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을 느끼고, 처음에는 기억도 하지 못하던 미자를 애인 삼는다. 그런데 분명 '나'가 첫 애인이 아닐 미자는 마치 처음 연애를 하는 여자처럼 '나'에게 순정을 다 바친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일만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연애를 몇 번이나 하고도 늘 처음 하는 것처럼 열심히 할 수 있는 것이 '몰개월의 똥까이'들인 것이다.
그래서 미자를 애인 삼고 미자와 연애를 하면서도 '나'는 미자를 "먹지 못했다." 그들은 그가 미자의 "낯을 씻길 때부터 먹지 못하게 무관한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먹어줄 수가 없는, 먹어서는 안 되는 식구로 느끼게 된 것이다. 식구라 하면 핏줄 당기는 정도 정이지만, 늘 가슴속에 연민을 품게 되는 것처럼 '나'도 역시 자신이 곧 버리게 될 '미자'에게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오히려 미자는 '나'를 가여워한다. 그네는 "사는 게 그냥, 다" 가여운 일이라는 것을 깨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미자를 비롯한 "몰개월 여자들이 달마다 연출하던 이별의 연극은, 살아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아는 자들의 자기표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 인생의 시기와 세상의 시기의 어지러움 속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어리고 철이 없는, 그래서 가여운 수많은 병사들에게 늘 처음처럼 온정을 다 바치고, 헤어질 때가 되면 또 최선을 다해 슬퍼하며 그들을 연민하는 몰개월 여자들은 그들에게 애인이고, 누이이고, 어머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