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된지 두달 이십일이 지났다.

어젯밤엔 조금 일찍 자보려고 했다. 마침 크로스핏을 등록하고 맛보기지만 운동을 시작한 첫날이어서 놀란 근육들이 잠을 보챘다. 하지만 눕자마자 내 두뇌는 잡생각을 꺼냈고, 한 번 시작된 잡념은 오랜 세월 단련해온대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억지로 잠자기를 포기하고(백수만의 특권이다) 서재(엄마가 이사한 후 같이 살지도 않으면서 엄마집의 방 한 칸은 내 책과 음반들로만 채워넣고 내 맘대로 내 서재)로 갔다. 책은 많지만 그 중엔 읽지 않은 책도 많아 잠시 책장을 남의 책장인 양 구경하다 [#한밤중에잠깨어]를 발견했다.

[한밤중에 잠깨어]는 정약용이 유배시절 쓴 한시들을 한학자 정민이 옮겨쓰고, 한자 그대로 뜻풀이하고, 그걸 다시 에세이식으로 풀어쓴 책이다.

사두고 읽지 않다가 마침 한밤중에 잠깨어 그 책이 눈에 들어와서 읽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한시들에 대한 기대도 기대지만, 한자까막눈이라 무엇보다 정민 작가의 한시재해석에 기대가 컸다.

앞에 실린 열 편의 시를 읽었는데 이게 정약용이 쓴 것인가 의심될 정도로 칭얼칭얼 찡찡인 거다. 유배되어 간 낯선 곳에서 한밤중에 쓴 글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다시 봐도 칭얼칭얼 찡찡.

그 중 한 편 맛보자면 이렇다.

나를 비웃다
뱀 비늘과 매미 날개

초초한 옷차람이 결국 너를 속여서
십 년을 내달려도 피곤함뿐이로다.
만물 모두 안다면서 어리석어 답 못 하고
일천 사람 이름 알아 비방이 따라오네.
고운 얼굴 박명탄 말 그대는 못 보았나
예로부터 백안시는 친지에게 달린 것을.
뱀 비늘과 매미 날개 끝내 어이 믿겠는가
우습구나 내 인생 간데없는 바보로다.
---------------------------
10년간 나라 일 하다며 분골쇄신 애를 썼지만 남은 것은 전 피곤뿐이다. 저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해놓고, 막상 제 처지 하나 감당하지 못했다. 명성은 늘 비방을 달고 다녔다. 미인박명이라더니 꼭 날 두고 한 말이었다. 가깝던 벗들이 내게 먼저 등을 돌린 것이 가장 뼈아프다. 나는 그들에게 그런 존재일 뿐이었구나. 고작 금방 벗어버릴 뱀 허물과, 얼마 못 가 바스러질 매미 날개 같은 재주를 믿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였구나. 바보 같은 놈!

`나를 비웃다`라는 제목 아래 쓴 열 편의 한시에 정민 작가가 핵심 단어를 뽑아 직접 부제를 붙인 것 같은데,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이렇다.

진창에 갇힌 물고기
뱀 비늘과 매미 날개
살 맞은 새
고꾸라진 용
바다를 못 만난 큰 물고기
술이나 마시자(이 대목이 가장 인간적이었다!)
꿈 깨니(술 마신 후부터는 다소 진정되는 듯하다)
장자의 봄꿈
낡은 책 일천 권
십 년 전 꿈

억울해하고 원망하고 그 와중에 겸손을 잃고(스스로를 주로 어떻게 비유했는지를 보면 숨기려 해도 드러난다) 자책하고 자포자기하면서도 스스로를 변호하는 모습이 멋있진 않아도 친근했다.

하지만 그뿐 그밤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외로운 남자의 일기를 계속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진 않아 책을 덮고 다시 자리에 누웠더니 금세 잠이 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