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 - 2013 제37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이재찬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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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치>는 여고생 방인영이 세상에 한 방 먹이는 내용입니다. 평범해 보일 여고생이 저지른 패륜이라는 것, 그리고도 전혀 반성의 기색 따위 없다는 것 때문에 펀치의 충격은 작지 않습니다.

 

당돌하고 냉소적인 10, 혹은 그보다도 더 어린 화자가 등장하는 소설은 그간 꽤 있었습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이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은희경 [새의 선물], 심지어 여섯 살짜리 화자들이 주인공인 낸시 휴스턴의 [여섯 살] 등입니다.

 

어린 화자가 어린 화자답게 등장하는 다른 작품들도 많지만 앞에 언급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나이에 비해 성숙한, 조숙한 화자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그들은 웬만한 어른보다 세상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진실을 더 잘 꿰뚫어보기도 하며, 그래서 다소 냉소적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삶과 미래에 대해 헛된 희망이나 별다른 기대 따위는 품지 않고 세상과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잣대로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펀치>의 여고생 방인영은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미래에 대한 비관과 주변 사람에 대한 냉소는 비관과 냉소를 넘어 분노와 혐오 수준입니다. 앞에 언급한 어린 화자들보다 나이가 좀 더 많기도 하지만 그들보다 더욱 과격합니다. 아무래도 시대가 또 조금은 달라졌고 방인영은 이제 곧 사회로 나갈 경계의 위치에 서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주변인에 대한 애정과 반성입니다. 방인영은 주변인은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습니다. 보통 미움의 감정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방인영이 부모에 대해 갖는 감정은 미움보다는 혐오나 증오입니다. 물론 그 엄마에 대해서는 연민의 감정도 갖고 있지만 이 애정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혐오가 결국은 비극을 낳고 맙니다. 그래서인지 그 후에는 반성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소설 속 주인공들이 기본으로 갖고 있는 애정과 반성(양심) 모두를 갖추지 않고 있어서 방인영은 낯설고 새로운 인물입니다. 반면, 많은 소설 속 캐릭터들이 여러 가지 변화를 겪고 변화를 보여주는 입체적 인물이라면, 방인영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평면적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물론 지금의 가치관’, ‘현재의 성격(혹은 인격)’을 형성하게 된 배경들을 작가가 틈틈이 보여주긴 합니다.

 

이재찬 작가가 만든 방인영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괴물입니다. 자신의 부모를 청부 살인하는 데까지는 겨우겨우 그럴 수도 있겠다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이후의 행동들을 보면 정말 괴물그 자체입니다. 그렇다면 이 괴물은 누가 낳은 걸까요. 자신의 딸에게 늘 방 변호사로밖에는 불리지 못하는 아버지가 낳은 걸까요, 얼굴은 예쁘지만 머리는 텅 빈 엄마가 낳은 걸까요.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괴물 한 마리를 낳고 방인영이라고 이름 지은 걸까요, 평범한 아이를 낳아 방인영이라고 이름 붙이고 키워보니 괴물이 된 걸까요, 그들이 괴물로 키운 걸까요.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 소개에 의해 정리하면 방인영을 괴물로 만든 것은 가족, 학교, 종교의 변태적 시스템입니다. 정서적 교감 없이 물질적 등가교환만 바라는 아빠, 삐뚤어지고 일방적인 모정을 보여주는 엄마, 목적도 기능도 모두 잃은 학교, 이 모든 변태적인 시스템과 가장 멀어야 하지만 오히려 가장 집약적으로 변태된 교회, 그리고 이 모든 시스템에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적응하는 주변인들에 대해 방인영은 거침 없이 논평합니다

 

현정이는 어떻게 하고 싶은 일이 두 가지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현정이는 사회가 원하고 사회를 위해 소비되는 노예가 되고 싶다는 거다. 사회가 개인에게 꿈을 주입하고 개인은 자신의 비용을 들여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의 열매는 사회가 가져간다. 개인은 소비 능력을 얻지만 그건 사회에 헌신한 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중학교 때만 해도 현정이는 누구보다 피자를 좋아했다. 그땐 지금처럼 말라깽이가 아니었다. P.29

 

이 발랄한 논평이 특정 행위로 이어지기 전, 말로만 존재할 때까지는 독자로서 굉장히 속시원하고 즐겁습니다. 물론 뜨끔하기도 합니다.

 

문학도 근본적이지 않아요?"
"
문학은 빈곤한 뒷담화야
."
"
미술은
?"
"
미술은 이미지고. 이미지는 허상이지
."
"
성형외과는 왜 의대에 있어요? 미대에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
과외가 침묵했다
.
"
역사는
?"
"
안중근이 어떤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쐈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
안중근은 알겠지
.
"
안중근이 민족을 위해서 쐈는지, 김구한테 잘 보이려고 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폭력성을 위해서 쐈는지 알 수 없어. 하지만 수학은 명백해. 재론의 여지가 없거든. 증명이 되면 그게 바로 정답인 거야. 너도 수학의 세계를 알면 좋을 텐데
."
"
별로 궁금하지 않아요
."
"
그게 너의 문제야.” P.33

 

변태적 사회에 대한 방인영의 극단적 조치와 그로 인한 결과는, 현실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걸리는 부분도 있습니다. 한낱 여고생이 저지른 범죄 행위가 아무리 나름대로 치밀하게 계산되었다고 해도 허점이 있습니다. 특히 사건이 일어난 후의 그녀의 행동은 누가 봐도 충분히 의심스럽습니다. 아무리 우리나라 경찰 수사가 허술해도, 아무리 여고생이 자신의 부모를 청부살해 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렵더라도, 범인을 밝혀내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완전범죄는 아니었다고 보입니다.

 

다만, 끝까지 범인이 밝혀지지 않고 범인은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것에도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는 있어 보입니다. 사회는 그렇게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가정에서 자란 여고생이라면 혐오에 의한 살인을 할 리가 없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살인동기가 없다고, 섣불리 짐작하는 거죠. 또 대신 범인으로 몰려 거짓 자백까지 하고 마는 인물은 충분히 살인의 동기, 살인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 살인을 하기 이전에는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해 그럴만하다는 사회의 인정을 받는 셈입니다. 개별적 존재가 각각 가진 개성,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바, 부족한 것을 얻기 위해 감수하는 것과 포기하는 것에 대한 인정이 없는 겁니다.

 

방인영은 나름대로는 남부러울 것 없을 듯한 환경에 있다는 것이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이지만 그녀는 개별적 존재로서 불행합니다. 가질 만큼 가졌는데도 또 어떤 부분에서는 1등급이 아니라서 좌절하고 분노한다는 점에서는 또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1등급이 아니고 앞으로도 모든 것이 1등급인 사람과는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좌절감 자체가 한 개인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하는 가정의 사랑이나 학교의 교육이나 교회의 위안 중 그 무엇도 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분명 변호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방인영이 이 변태적인 사회 속에서 자신이 속한 현재를 꿰뚫어보고 독야청청 인간성을 유지하는 고고한 인물이거나 자신이 비판하는 시스템이나 인간의 전형과 반대에서 세상에 경고를 날리는 선구자적 인물인가 하면 둘 다 아닙니다. 그녀 역시 분명 그 변태적 시스템 속에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안착할 만한 기회와 그럴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앞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자 또 다른 형태의 변태가 되어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런 지점에 소설 [펀치]가 갖는 진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인물이 옳고 그르다는 논쟁이나 판단 이전에, 실제로 이토록 충격적이고 폭력적이며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이 충분히 존재 가능하며 앞으로는 더 많이 등장할 가능성을 예고한다고 할까요. [펀치]가 정말 아픈 것은 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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