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의 침묵 블랙 캣(Black Cat) 11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미정 옮김 / 영림카디널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그렇습니다. 저는 이런 추리소설이 좋아요!


[무덤의 침묵]은 한 꼬마의 생일잔치에서 발견된 뼛조각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뼈는 레이캬비크 외곽의 그라파르홀트 언덕배기에 있는 공사장에서 주워온 것입니다. 그곳에는 발견된 뼛조각의 나머지 뼈들이 묻혀 있습니다.

형사 에를렌두르는 뼈를 발굴할 수 있는 조사단을 부릅니다. 고고학자인 스카르페딘은, 빨리 그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를 밝혀내고 싶은 에를렌두르의 마음과 달리 느긋하기만 합니다. 급하게 서두르다가는 유골과 그 주변환경이 훼손될 수 있다는 거죠.

만약 [무덤의 침묵] 1시간짜리 미드였다면, 그 즉시 각종 첨단과학장비로 뼈와 주변환경을 분석한 후 어렵지 않게 그 유골의 신원과 뒷이야기들을 밝혀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고고학자 스카르페딘과 아주 성격이 비슷합니다. 

"인내는 미덕이죠. 그 점을 명심하세요."

스카르페딘이 에를렌두르에게 자주 하는 말은 인내하라는 겁니다. 이것은 곧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작가가 독자에게 하는 말로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스카르페딘은 답답할 정도로 신중하고, 마침 병리학자는 스페인으로 짧지 않은 휴가를 떠났습니다. 어차피 서둘러 유골을 파내어봤자 그것을 분석해줄 사람이 없으므로 에를렌두르는 부하들과 함께 자신들의 방식으로 꼼꼼히 사건을 조사합니다.

이야기는 크게 세 덩어리로 진행됩니다. 에를렌두르 반장, 엘린보르그, 올리가 사건을 조사해나가는 과정, 고집 세고 무뚝뚝한 에를렌두르의 불행한 가족사, 그리고 초반에는 누구의 언제적 이야기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한 처참한 가족의 이야기가 그 세 얼개입니다.

장르소설을 읽고 감상을 쓰면서 너무 줄거리를 자세히 언급하면 이것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아직 읽지 않은 독자의 즐거움을 빼앗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줄거리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마 장르문학 팬이라면, 앞에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만 봐도 대략의 줄거리와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짐작이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무덤의 침묵]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골 혹은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바로 그 마지막 순간에 모든 재미와 초점이 몰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가 균형적으로 의미를 가진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그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보더라도, 그 유골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죽임을 당한 것인지 다 알고 이 책을 읽는다해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고통을 겪었고 또 이를 수사하는 에를렌두르 이하 조사팀이 어떻게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였는지를 보는 재미와 가치가 훨씬 큽니다. 뭔가 대단한 반전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장르소설을 즐기는 분들에게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 과정도 굉장히 흥미진진했습니다.

에를렌두르와 전 부인 할도라, 자신을 망가뜨린 채 아빠를 원망하는 딸 에바와 모든 것에 무관심한 아들 신드리의 이야기와 유골과 얽힌 과거의 이야기들, 그리고 수사 중에 만나는 사람들 간의 관계나 그들의 증언을 따라가다보면, 점점 더 궁금해집니다. 단순히 유골은 누구의 것일까 하는 것보다는 그 사이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한 거긴 하지만요. 그리고 동시에 그 유골이 특정인의 것만은 아니기를 하는 바람도 저절로 생겼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았든, 불행한 삶을 살았든, 모두 결국 죽긴 하지만 적어도 그 언덕에 그렇게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묻혀 수십년 후에 우연히 발견되는 형식의 죽음은 아니었기를 바라게 되는 거죠.

작가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점을 두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가정'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정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이 가정폭력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정폭력'이라는 네글자로 그 모든 고통과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직접 겪은 이에게는 이 단어가 결코 자신이 겪은 그 고통과 불행을 설명하거나 지칭하지 못합니다.

"이혼했나 보군요." 여자는 에를렌두르의 허름한 차림새를 보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그렇습니다. 부인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가정폭력 사실에 대해서 묻고 싶은데요."에를렌두르가 말했다. 
"영혼을 살해하는 범죄를 일컫는 편리한 말이죠. 그게 진정 어떤 일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쓰는 순진한 말 말예요. 평생 동안 영원한 두려움에 떨며 사는 인생이 어떤지 아세요?"


가정폭력의 가해자는 알고 보면 대부분 가정폭력의 피해자였고, 가정폭력의 피해자는 또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의 순환에 대해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어 찬찬히 하나하나 다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관습을 통해 맺어지는 '가정'이라는 것에 대해 작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 또한 꽤 흥미롭습니다. 이미 결혼한 두 가정, 그러니까 에를렌두르 반장과 악마 (토르)그리무르의 가정은 결과적으로 결혼을 통한 행복한 가정 이루기에 실패했습니다. 결혼에 대한 논의(?)는 진행되고 있지만 결국 결혼에 이르지는 못한(않은) 두 가정, 벤자민과 그의 약혼녀, 그리고 올리와 그의 애인 베르그토라 역시 결혼하는 데 실패합니다. 

먼저 결혼한 두 부부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할도라와 결혼한 에를렌두르가 결혼할 당시 명확한 결혼관이나 의지나 확고한 사랑의 감정 없이 어쩌다보니 결혼하게 된 것처럼,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리무르의 아내(책 마지막 장까지 이름 없이 '엄마'로만 등장하는 이 여성) 역시 남편과 결혼할 당시 에를렌두르가 결혼하게 된 과정이나 동기와 비슷하게 어쩌다보니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올리는 반대로 사랑하는 것은 명확하지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 애인과 갈등을 겪습니다. 베르그토라는 결혼과 아이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다보니 이것을 터놓고 이야기하지도 못합니다. 쉽게 터놓고 할 수 있는 성격의 논의가 아니기 때문이죠. 근데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면 둘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결혼을 통한 안심과 확인이냐, 지금 느끼는 감정에 대한 충실함이냐를 막상 이야기해보면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이 결국은 같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과거의 연인인 벤자민과 약혼녀의 경우도 결국 결혼은 하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만큼은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명확했습니다. 그리고 이 커플의 경우 전혀 다른 외부의 요인이, 어떻게 보면 또 다른 가족으로 인해 불행한 결말을 맞고 맙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직접적으로 가족을 때리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언어폭력은 단순한 구타보다 더 나쁘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태서 작가는 '그저 해야 될 것 같아서 하는 결혼을 하는 것' 또한 다른 식구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에를렌두르는 그 결혼으로 인해 본인은 물론 헤어진 아내, 딸, 아들 모두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본인도 또다시 고통을 받게 됩니다. 영혼 없는 청혼을 받아들인 과거 이야기 속의 '엄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결혼을 결정했다고 해서 그런 고통을 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식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원해서 하는 결혼'과 '필요해서 하는 결혼', 혹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결혼'은 분명 다른 겁니다. 작가는 그렇다면 과연 '결혼'은 무엇이고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꼭 누구를 탓한다기보다는 여러 가족의 이야기를 여러 형태로 들려주면서 말입니다.

"기특하게도 벤자민은 언니에게 잘해 줬어요. 연애편지 같은 것도 썼고. 그 당시에 레이캬비크 사람들은 약혼을 하면 긴 산책을 나가곤 했어요. 평범한 구혼과정이었죠." p. 170

이 얼마나 아름답고 로맨틱한가요. 약혼을 하면 긴 산책을 나간다니. 그것이 평범한 구혼과정이라니. 그러니까 약혼과 본질은 바로 이런 데에 있다고 역설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그래서 아직 결혼하지 않고, 죽지도 않은 올리 커플을 통해 어느 정도는 작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사랑과 결합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역시 수많은 경우와 형태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겠지만요.

이 소설의 또다른 장점은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의 매력 또한 느끼게 해준다는 겁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전형적인 시나리오야. 우리는 이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지. 날씨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나빠지는지, 또 그 사람의 경우와 비슷한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누구도 그런 일을 의심하지 않아. 그런 곳이 바로 아이슬란드니까." p.124

에들렌두르는 그라파르홀트로 가는 길에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실종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욘 아우스트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욘 아우스트만은 1780년에 블론두길에서 얼어죽었다. 그의 말은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지만 욘의 유해는 손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손은 파란색 니트 벙어리장갑 안에 들어 있었다. p. 127

그러면서 동시에 장르소설에서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수법, 그러니까 맥거핀-헷갈리게 하기- 등을 활용함으로써 독자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듭니다. 워낙 오래된 사건이고, 아이슬란드에는 인구자체가 많지 않으며, 날씨도 변덕스럽다는 점을 통해 아이슬란드라는 나라도 보여주고, 추리 그 자체에도 독자를 개입시키는 거죠. 

이제 저는 며칠 후면 아이슬란드로 갑니다. 비록 짧은 열흘 동안의 일정이지만, 아이슬란드를 가기 전에 단순히 여행책보다는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아이슬란드 작가가 아이슬란드를 배경으로 쓴 소설을 찾아보다가 우연히 이 작가를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연대기상으로는 이 [무덤의 침묵]보다는 [저주 받은 피]를 먼저 읽고 [무덤의 침묵], [목소리] 순서로 책을 봤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점은 다소 아쉽지만 이 책을 읽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레이캬비크 중심부보다는 외곽 위주로 진행되고, 배경도 주로 1940년대이긴 하지만 뭔가 관광지로서의 아이슬란드보다는 생활터전으로서의 아이슬란드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고 할까요.

제가 무지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연합군이 아이슬란드에까지 파병을 했는지는 몰랐는데, 처음에는 영국군이, 영국군이 떠난 후에는 미국군대가 레이캬비크에 주둔했다는 사실 또한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버무려서 조급해하는 독자를 진정시켜가며 천천히, 하지만 꼼꼼히 삶과 사람들의 본질을 짚어가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멋있습니다. 글 잘 쓰는 작가, 재미있게 쓰는 작가는 많지만, '멋있게 쓴다'는 느낌을 주는 작가는 흔치 않은데,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이 제게 그랬습니다. 이제 사흘 앞둔 아이슬란드 여행이 더욱 설레는 이유입니다. 인드리다손 작가는 레이캬비크에 살고 있나요?

+ 잡설을 한 가지 더 풀자면, 저는 이런 우연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편인데, 이 책 말미에 '파과병'을 앓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두산백과에서는 '파과병[hebephrenia, 破瓜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감정과 의지의 둔화가 눈에 띄고 치매화(痴呆化)한 것 같은 병세를 나타내는 일이 많고 예후가 불량하다. 매우 서서히 시작하고 어린이처럼 명랑해지고 허튼웃음을 웃거나 혼잣말 등을 볼 수 있으며, 무위하게 지내는 일이 많아지고 드디어는 고도의 정신황폐에 빠진다. 20세 전후의 파과기(破瓜期)에 발병하는 일이 많아서 성별에 관계없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영어명은 청춘(청년의 마음)이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왠지 최근에 읽은 구병모 작가의 [파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구병모 작가가 이렇게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결론은 破果입니까, 破瓜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할 수 없듯이 제가 억지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이 '파과'를 둘러싼 우연에 대한 해석도 쉽사리 만들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서 인생은 더 재미있고, 좋은 문학작품을 접하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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