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흐름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예문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별 정보 없이 이 책을 집었을 땐 [여름의 흐름]이라는 제목 자체에 끌렸습니다. 시원한 파란색 표지는, 돌이켜보면 한국인의 여름이란 언제나 덥고 끈적끈적한 계절인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다른 기대를 하게 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어떤 상쾌하고 가벼운 글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낚인 겁니다.

 

[여름의 흐름] 안에는 표제작 <여름의 흐름>을 비롯해 총 6편의 작품이 실려 있습니다. <여름의 흐름>, <좁은 방의 영혼> 등 중편 2편과 <만월의 시>, <바다>, <흔들다리를 건너다>, <한낮의 피리새> 등 4편의 단편입니다.

 

<여름의 흐름>은 사형집행간수의 이야기입니다. 두 아이의 아빠인 사사키와 아직 사형집행의 경험은 없는 신입 간수 나카가와, 그리고 사사키의 동료인 호리베는 사형수들을 수감하는 형무소에서 일합니다. 사사키는 일이니까 사형집행을 돕고 호리베는 어느 정도 죄인을 직접 벌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사형집행을 돕습니다. 아직 경험이 없는 나카가와는 선배 간수들의 조언과 배려에도 불구하고 결국 첫 경험을 포기하고 맙니다. 처음이 무섭지, 한 번 하고 나면 그 역시 선배 간수들처럼 무심해지거나,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될 것이 보였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셋째를 임신한 사사키의 아내는 가뜩이나 전부터 그 일을 그만두기를 바라왔습니다. 거기다 후배가 그렇게 갈등하고 결국은 그만두기로 결정하는 것을 지켜보며 사사키 역시 새삼 자신의 일에 대한 생각이 많아집니다. 날은 끈적이고 더운 비는 쏟아붓고 아이들은 자랍니다. 아이들이 자라면 곧 그들도 나카가와처럼 질문을 하겠지요.

 

갈등의 양상이 폭발해서 술에 취하거나 술에 취해 사사키가 실은 사형을 즐기는 거라며 비난하거나 결국은 관둬버리는 나카가와와 달리 사사키의 갈등은 겉으로 크게 드러나거나 폭발하지 않습니다. 식상한 비유지만 마치 물 위의 오리 같다고 할까요. 멈추지 않고 헤엄치기 위해서 물 아래의 발은 바쁘지만 물 밖에 드러난 모습은 아무렇지 않아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회의와 고뇌와 갈등을 이어갑니다.

 

두려워하는 나카가와를 달래려고 동료인 호리베와 셋이 낚시를 가는 장면을 떠올리면 짙은 풀냄새와 물비린내가 함께 느껴집니다. 그들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숨기고 물고기를 낚습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가질 취미가 많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취미가 낚시라는 점도 아이러니합니다. 낚시 역시 일종의 사형집행이니까요. 형무소에서의 사형집행은 진실여부를 떠나 죄의 유무를 가리는 과정을 거치지만, 물고기를 낚을 때는 그러한 과정이 생략됩니다. 그저 찌를 무는 놈을 잡아올려서 이 놈을 살려줄지 말지는 낚시하는 사람들이 그때 그때 결정합니다.

 

<여름의 흐름>에 이어지는 두 번째 작품은 <좁은 방의 영혼>입니다. 장이 바뀌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됐는데, 전 몇 장을 읽는 동안 <여름의 흐름>이 끝난 걸 모르고 사사키가 병에 걸려 입원을 하게 됐나 생각했습니다. <여름의 흐름>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 아니라 여름이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흘러간 겁니다. 영화기법으로 치자면 점프컷이 아닌 페이드아웃인 거죠. 끝났는데도 엔딩크레딧이 올라오지 않으면 끝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영화들처럼 그렇게 끝이 납니다. 그렇죠, 우리의 인생도 언제나 그렇게 흐르니까요.

 

<좁은 방의 영혼>은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그 무슨 중병에 걸려 요양병원 2인실에 입원해있는 어린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아버지가 있고 매일 그를 돌봐주는 친절한 간호사가 있고 같은 방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또 다른 중년의 환자 동료(?)가 있습니다. 그는 친구가 필요하지만 그 중년의 남자 같은 친구는 아니며, 그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그 중년의 남자가 습관처럼 중얼거리는 비관의 말들이 아닙니다.

 

담담한 척 하지만 그는 굉장히 외롭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물고기나 나비가 되어 병실 밖을 나섭니다.

 

상대방은 그 물이끼를 조금씩 먹었다.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큰마음 먹고 말했다.
"친구라고?"
상대가 되물었다.
"그냥 아는 사이라도 괜찮아."
"아는 사이?"
다시 되묻는다.
"함께 있는 것 말이야. 다른 누군가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긴 시간."
"긴 시간?"
"그래."
"시간이라니?"

_ <좁은 방의 영혼> 중

 

자유롭게 세상을 보고 자연과 하나가 되지만 결국 그의 몸이 누인 곳은 좁은 2인 병실입니다. 버릇처럼 아내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거라든가, 자기는 곧 죽을 거라는 말을 하는 옆침대의 중년 남자가 지긋지긋합니다. 가뜩이나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고 외로움과 싸우는 주인공에게 그 남자의 말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아내는 한 달에 한 번 계속해서 남자의 병문안을 오고, 남자는 그러는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으므로 주인공에겐 양치기 소년과 같은 존재가 되고 맙니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면, 그래서 이 이야기의 비극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입에 달고 살지만 죽지 않아서 그냥 들어넘겼던 그 말이 진실이 되는 순간이 오고야 마는 거죠. 잘은 모르지만 귀찮았던 존재인 남자의 죽음은 그 병실 안에 홀로 남겨진 주인공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남깁니다.

 

<만월의 시>는 아르바이트로 봐주고 있는 집에서 이상한 일을 겪는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매주 그 집을 봐주는 하루만 술과 음식, 그리고 여유를 즐기는 청년은 침실에 걸린 그림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합니다. 그림 속 나체의 여자들과 음탕한 한 때를 보내기도 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다른 남자를 죽이기도 하면서요. 그런 그를 현실로 자꾸 불러들이는 것은 옆 방에서 걸려오는 이상한 전화입니다. 그 이상한 전화의 유혹은 그가 그림을 보면서 하는 상상들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그는 현실에서의 일탈은 끝끝내 선택하지 않습니다.

 

<바다>는 이 작품집 중에서 가장 별로였던 작품입니다. 어릴 적에 글짓기를 할 때, '친구집은 부자고 내가 그렇게 갖고 싶던 피아노도 있지만 친구는 친엄마와 살고 있지 않아서 결국은 가난하지만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 있는 내가 사실은 더 부자인 것 같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물론, 남자의 심리묘사는 제가 어릴 적 쓴 글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결국 같은 맥락처럼 느껴져 좀 유치하고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흔들다리를 건너다> 역시 <바다>처럼 메시지가 굉장히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흔들다리 너머의 저쪽 세계의 그와 이쪽에서 흔들다리 너머의 그쪽을 동경하는 나의 이야기입니다. <만월의 시>에서 청년이 보는 그림을 묘사하고 그를 통해 환상적인 느낌을 드러내는 것처럼 <흔들다리를 건너다> 역시 이쪽에서 그쪽을 보는 남자의 동경이 더해져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점은 매력적이지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인상적인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한낮의 피리새>에서는 마루야마 겐지 특유의 개성이 많이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평온하고 따뜻하게 느끼는 시골, 혹은 작은 마을의 선생님의 시각에서 이야기는 흐릅니다. 하지만 <한낮의 피리새> 속의 시골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현대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로 무관심하고 삭막하기까지 합니다. 자신에게 유독 애정을 느껴서 피리새를 선물한 제자와 피리새를 대하는 태도 역시, 문학 속의 여느 선생님과는 다릅니다. 차갑고 무심해서 약간은 공포스럽기도 합니다. 보통 문학 속에서 선생님이 묘사되는 방식은 크게 2가지인 것 같습니다. 타인의 시각에서 본 교사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선생님이거나 혹은, 일인칭에서 서술되는 교육과 제자들에 대한 무한 사랑과 책임감을 갖춘 선생님을 주로 보아왔다면, <한낮의 피리새>에서는 교사인 주인공이 스스로 자기의 이야기를 하지만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자신과 주변에 무관심하고 심드렁합니다. 교사로서의 의무감이나 죄책감도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체 작품들 중에 가장 차가웠습니다.

 

마루야마 겐지의 작품은 이 책에서 접한 6편이 전부입니다. 주변에 마루야마 겐지의 팬도 있고, 팬은 아니지만 여러 작품을 읽었다는 분도 계신데, 이후의 작품을 좋아하든, 초기의 작품만을 좋아하든 간에 [여름의 흐름]이 좋은 작품이라는 데에는 대부분 이견이 없었습니다. 제 경우에 [여름의 흐름] 안에 실린 여섯편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 <한낮의 피리새> 같은 작품에서 그가 사람과 자연과 관계를 그리는 방식은 지금 평가해도 굉장히 독특하고 개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내면의 서늘함을 그야말로 서늘하게 보여준 작품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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