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 개정판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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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작가는 등단한지 꽤 오래됐는데도 얼마 전 나온 소설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두 책이 출판된 시간차가 무려 13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두 책의 느낌이 사뭇 달랐던 것도 당연합니다. 같은 엄마 두 자식, 이랄까요. 아직 읽어보지 못하고 들은 풍문에 의하면 이 두 책 사이에 나온 책들은 또 다르다고들 하더군요. 쉽게 말하자면,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가 전작들에 비해 많이 읽기 쉬워진 편이라고 말이죠. 어쨌든, 이런 정보들과 함께 가장 최신작을 읽은 후 접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생각과 좀 달랐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을 읽을 때는 저도 어떤 무언가가 슬슬 지겨워지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주인공 유경과 나이도 꼭 같고 말입니다. 그래서 작가가 제기한 당돌한 질문, 그리고 반항, 또는 남들 다 하는 연애나 가족제도에 편입되기 위한 그렇고 그런 일에 청춘의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겠다는 선언, 그저 그렇게 남들처럼 살고자 하는 친구들을 향한 냉정한 시선들이 크게 신선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지금 이 시기의 저에게는 현실이기도 하고, 이 나이쯤 되면 소설 속 주인공의 가치관이나 생각이 지금의 나와 꼭 같지 않더라도 그런 생각’, ‘이런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학습해온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당돌한 생각들은 10년 전에 비하면 훨씬 보편적인 생각들이 돼버리기도 했습니다. 만약, 이 책이 나왔을 무렵, 딱 스무 살이었던 그 때, 그리고 아직은 결혼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들이 훨씬 더 많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을 때, 그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또 달랐을 것 같긴 합니다.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때는 항상 새로운 시도, 그 전엔 쓰여지지 않은 것들을 쓰고자 하는 것을 읽어내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출판된 그 당시의 관점으로 읽자면, 배수아 작가는 꽤 도발적인 신예였을 것 같습니다. 유경이 진정 하고 싶은 건, 어서 빨리 나만의 왕자님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동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멋지지만 스스로도 그걸 잘 알고 있는 남자에게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하고 말하는 것이라니 말입니다.

 

유경이 길과 교진 사이에서 나름의 갈등을 하는 부분도 재미있습니다. 길은 미래의 남자고 교진은 과거의 남자입니다. 둘 다 현재의 남자가 아니기 때문에 갈등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길 같은 남자가 미래의 남자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는 모든 걸 갖춘 매력적인 남자지만 앞으로가 너무 뻔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교진 역시 다시 한 번 연애를 해볼 수도 있지만 이미 과거에 만났다 헤어진 남자이므로 과거의 남자입니다. 과거도 새드엔딩, 미래도 새드엔딩인 거죠. 이럴 때 보통은 더 맹렬히 현재의 남자를 찾을 겁니다. 그러다 안 되면 둘 중 세게 당기는 쪽으로 끌려가겠죠. 여자들은 남자에 의해 선택 받는 것에 익숙하니까요. 그렇지만 유경은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습니다. 길과 쿨하게 연애하자고 마음 먹은 것도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유경은 그저 연애를 하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으로 길과의 즐기는 관계에 뛰어든 유경이 결국은 울고 불고 길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지 어떨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배수아 작가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결국 유경이 둘 중 일단 급한 대로 아무나 한 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탈연애를 본인의 의지로 선택했다는 점인 듯 합니다. 지금 와서는 탈연애라는 말도 다소 치기 어리게 느껴지긴 하지만, 서른 셋의 시집 안 간 여자가, 어쨌든 자신이 좋다면 자신을 좋아할 남자 두 명 사이에서 그 어느 누구가 아닌 어떤 개념을 선택한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작가의 근작은 미로와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서 뭔가 빨려 들어가듯이 사람을 매혹하는 매력이 있다면, 초기작인 이 작품은 어쨌거나 시원시원한 매력이 있습니다. 과거의 남자와 직장 내 유부남,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촌 등의 등장인물이나 유경의 다양한 친구들은 다소 빤하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써내려 갔기 때문에 읽는 사람들도 쭈빗대지 않고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녀가 중간중간 심어놓은 질문과 고민들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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