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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쇼와 전집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28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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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부엌이 지저분하면 엄마가 아프대 ㅡ엄마가 아프면, 부엌이 지저분해지는 거겠지 ㅡ......죽기 전에, 할머니가 그랬어, 할머니는 엄마 때문에 지지리 고달픈 인생을 살았지, 뜨거운 피를 물려받아서, 엄마는 집안일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대, 뭐랄까, 굉장히 사회적인 여성이랄까, 암튼 동부에선 꽤 알아주는 골든 바의 매니저였지 ㅡ지금은 뭘 하시는데? ㅡ뭘 하긴, 나 때문에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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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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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고달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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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박한 시골 처녀여 나에게 손을 흔들지 마오 내가 탄 마차가 지나가면 당신은 흙먼지를 뒤집어쓴다네
(중략)
거짓으로 사랑하였으나 목 놓아 울었네
이 계절이 다 가도록 세느 강에 똥물이 흐른다 해도 세느...... 이 아름다운 발음을 멈출 수는 없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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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마차를 향해 순진하게 손 흔들어봤자 마차가 지나가고 나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거짓으로 사랑한 자의 울음소리가 가장 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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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의 당신은 난생처음 보는 해변을 지나고 있었고 커다란 물고기가 모래사장에 올라와 펄떡이는 것을 보았지 프랑스에서였다 당신은 모래밭으로 달려가 죽어가는 물고기를 바다에 던져 넣었고 당신은 꿈에서 깨어났지 한국에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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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물이 흘러도 아름다운 발음을 멈출 수 없는 바로 그 세느강이 있는 해변의 꿈을 꿔봤자 현실은 이 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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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우리의 죽은 손을 움직여 가렵지 않은 얼굴을 긁게 만들 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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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침묵에, 뭐라도 해야 해서 가렵지도 않은 얼굴을 긁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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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이 없다면 산을 깎아서라도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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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없다면 산을 깎아서라도 절벽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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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 끝에 나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교회의 종탑에 올라가 뛰어내렸습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지요. 이마가 깨졌고 어금니 두 대가 부러졌으며 한쪽 어깨와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채,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내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의 놀라고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투신이라니...... 이 조용한 마을에서, 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나는 더럽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피범벅이 된 얼굴로 부서진 다리를 질질 끌며 더러워진 정원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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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뛰어내려봤자 죽지도 못하고 살아남아 더럽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으로 나 때문에 더렵혀진 정원을 직접 치워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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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쓰면 안경알이 보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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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쓰면 안경 너머 세상이 더 잘 보이는 게 아니라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안경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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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여주고자 하였지요, 다양한 각도에서의 실패를, 독자들은 보았을까, 내가 보여주고자 한 실패, 보지 못했지...... 나는 결국 실패를 보여주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쓸모없는 독자들이여,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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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렇게 인식하고 있는 시인은 이런 세상을, 그리고 다양한 실패를 보여주고 했지만 결국 실패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마저 실패하고,
독자들에게 쓸모없다 욕을 퍼붓고, 어디에 있었냐고 원망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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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도시 사람답지 않게 순박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요 내가 좁은 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끄적거리고 있을 때면 여자는 차와 간식이 담긴 쟁반을 건네며 덜떨어진 미소를 짓고는 했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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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역설이 있다해도 어쨌든, 순박하고 정이 많은 여자가 짓는 것은 덜떨어진 미소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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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우릴 막아서지 않아 우리가 악몽의 주인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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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삶에서 오직 악몽만을 가진 악몽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황병승 시인이.
또 쓸데 없는 생각이지만, 황병승 시인의 이름은 필명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의도한 바가 있었을 거라고. 각설하고.
현실을,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삶을, 냉정하게 지독하고 끔찍한 현실이라고 말하고 있는 황병승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으면서도 저는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은 시인이 이 세상을, 이 삶을 엄청나게 애정하는 것 같다는. 시인은 철저하게 세상을 외면하거나 완전히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포기해버린 것도 아닙니다. 아직 애정이 남아서 아직 그것을 버리지 못했기에, 그것이 더욱 세상을 향한 냉정한 표현과 냉소를 불러온 것 같습니다.
사랑했고, 사랑받고 싶었고, 그러나 그것이 내게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들을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을 처절하게 겪어봤을 겁니다. 사랑한 대상에게 원하는 만큼 사랑을 돌려받았다면 황병승 시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겠죠. 그리고 삶은 언제나 받은 사랑을 똑같이 돌려주지는 않으니까 계속해서 황병승 시인과 같은 작가들이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육체쇼와 전집'은 뜨겁습니다. 차갑다는 느낌보다는 표지의 저 선명한 선홍색처럼 팔팔 끓고 있습니다. 때로는 숨도 안 쉬고 이 세상에 욕을 퍼붓는데, 무섭기보다는 애잔합니다. 왜 욕을 하냐고 뭐라고하기보다는 토닥여주고 싶습니다. 그게 그저 '쓸모없는 독자'인 저는 그렇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황병승의 시를 읽고 있으면 오히려 내 고통과 분노와 억울함과 설움은 제쳐두고 그의 등을 쓸어주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그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별로 상처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쓸모없는 독자'라고 욕해도, 손을 뿌리쳐도, 그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듣고, 그가 쓰는 글자들을 읽고, 어디에 있었냐고 다그치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곁을 지키고 싶습니다.
만약에 시인이 싫다는데 왜 그러냐고 정말로 화를 내도, 제가 눈치가 없어서 그런 거라도, 저는 눈치가 없으니까, 그냥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황병승 시는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