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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평점 :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예전엔 이런 소설을 굉장히 재미있어 했었던 것 같긴 한데, 굉장히 재미있어 했었던 게 이런 소설이 맞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이런 소설이 어떤 소설인지를 먼저 말해야겠죠.
일단은 굉장히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너무 매력적이다보니 비현실적입니다. 미스터리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가 좀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나요? 암튼, 그런데 그 주변 인물들도 다 그렇습니다. 너무 완벽하고 모든 걸 알고 있고 늘 한 발 앞서 있습니다. 그래서... 좀 재미가 없습니다. 너무 완벽한 인물들만 등장하면 오히려 이야기가 예측 가능한 뻔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측면이 있달까요. 솔직히 말하면 모든 걸 작가가 쓴대로 예측하고 그러지는 못하지만 막상 흘러간 이야기를 돌아보면 뻔하게 느껴진달까요.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왕국]은 전형적인 일본의 장르물의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완벽하고 매력적인 주인공들 역시 일본 장르소설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특징이고, 이야기가 흘러가는 방향이나 묘사 방식 역시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은 이유로 어둠의 세계에 들어선 유리카와 그녀를 조종하는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든 야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기자키와 갑자기 나타난 것 치고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너무 깊이 유리카의 인생에 관여하고 있고 또 야다와도 여러가지로 얽힌 관계는 미스터리를 구성하기 위한 가장 전통적인 요소입니다. 거기다 갑자기 나타나 기자키의 존재에 대해서 경고를 던지는 남자의 등장은 작품에 서스펜스를 더하고, 유리카가 거의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지만 죽고 마는 쇼타의 존재는 드라마를 강화하지만 역시 너무 전통적인 방식이라 통속적입니다.
[왕국]과 짝꿍이라는 [쓰리]를 읽어보지 못한 영향일까요. 물론 작가는 [왕국]과 [쓰리]는 짝꿍이지만 둘 중 무엇을 먼저 읽어도 되고, 다만 하나를 읽고 나머지 하나를 읽으면 더 재미가 있게끔 썼다고 했기 때문에 하나를 읽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하나의 재미나 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닐 듯 싶습니다.
분명히 이런 전형적인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을 겁니다. 실제로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유수의 상을 받았고 다양한 언론으로부터 찬사도 받았고 베스트셀러에도 올랐고 많이 읽히고 있는 작가니까요. 다만 저는 너무 완벽하기만한 주인공보다는 어딘가 모자라는 것이 있어 인간적인 주인공에게 끌리고, 계속해서 허를 찌르는 데에만 집중하는 이야기보다는 반전의 묘미는 좀 떨어져도 인생의 묘미가 엿보이는 이야기가 좋을 뿐입니다.
이 서평의 도입부에서 이 책이 마치 별로 재미 없었다는 듯 시작한 것 같기도 한데 사실은 단숨에 읽었습니다. 재미는 분명 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고 계속해서 주인공은 궁지에 몰리기 때문에 과연 상황은 어떻게 흘러갈지, 무슨 일이 생기고 우리의 주인공은 그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지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인류 최초의 직업이 매춘부라는 점에 기인해서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됐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유리카는 매춘부가 아닙니다. 자신의 성적인 매력을 충분히 이용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매춘의 단계까지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물에 대한 공감이 덜 갑니다. 드라마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제 아무리 악한이라도 마음 속에 나도 모르게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인데, 유리카나 야다나 기자키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쓰고 보니 계속해서 반복이네요.
다른 이야기를 좀 해 보자면 이 작품은 유리카의 성적 매력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과 성에 대한 묘사가 적지 않게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도 남자작가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주의해서 읽으면 또다른 읽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여자작가라면 그렇게 묘사하지 않았을 것 같은 남성중심의 묘사가 많고 강합니다. 그런 특징에 대해 남성중심적 시각이네 어쩌네 비난하거나 비판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고 다만 그런 점을 인지하고 읽어보면 분명한 차이가 느껴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읽는 방법에 대한 제안이라고 생각해준다면 좋겠습니다. 저도 작년에 읽은 오기 오가스와 사이 가담의 [포르노 보는 남자, 로맨스 읽는 여자]라는 책을 읽은 후에야 이러한 차이를 비로소 인지할 수 있게 됐거든요.
[왕국]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실 굉장히 허망한 곳입니다. 그 왕국의 주인이고 지배자인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조차 사실은 그 왕국에 제대로 속해있지 못하고 전혀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달성했다고 해도 당신은 허망함을 느낄 뿐이야."
"넌 아무것도 모르는군."
기자키가 돌연 웃는다.
"그때는 허망함을 즐기면 되잖아.......그것이 이 세계의 대답이야."
말로는 허망함을 즐긴다고 하지만, 그래서 굉장히 쿨하고 시크하고 멋있어 보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허망함을 즐기는 것은 정말 즐거운 것을 즐기거나 행복한 것을 즐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현대의 유행어와 맥락이 비슷합니다. 피할 수 없으니까 즐기(려고 노력해보)는 거지, 어쩔 수 없으니까 즐기(려고 애써보)는 거지, 그게 정말 즐거워서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 허망함은 처음부터 추구하거나 이루고자 했던 목표도 아닙니다. 기껏해야 그저 어떤 것을 이뤘는데 뒤따라오는 것이 허망함이라면 그것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좋게 봐준 겁니다.
실제로 인생은 허망합니다. 허망할 때가 있습니다. 허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소설 속의 삶은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는 또 달라서, 우리는 전혀 완벽하지 않고 한 치 앞도 모르고 유리카처럼 모든 상황에 순발력 있게 대처하지도 못해서, 그러니까 앞서 제가 단점으로 언급했던 이 소설의 비현실성 덕분에, 그래도 오히려 조금은 위로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다 쓰고 보니 그렇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