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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별히 착하다거나, 똑똑하다거나, 예쁘다거나, 부자라거나, 늘씬하다거나, 하는 명확한 특성을 가졌다기보다는 그저 묘해서 묘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딱히 어떻다고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왠지 기억에 남고 눈길이 갑니다.
요 몇 년 새 한국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고 있지만, 배수아라는 작가의 유명세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이번에 읽은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는 처음으로 읽은 배수아 작가의 책입니다. 그녀와 그녀의 작품에게 받은 첫인상은 묘하다는 겁니다. 특유의 분위기도 있습니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왠지 책을 덮은 후에도 그녀가 내뿜은 어떤 기운이 여전히 느껴집니다.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도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의 잔향과 잔상이 남아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푹푹 찌는 여름입니다. 등장인물은 오디오극장에서 근무했던 김아야미와 극장장과 제약회사 영업사원 부하킴과 여니와 볼피입니다. 또 김철썩이라는 시인과 눈 먼 소녀와 고등학생들도 있습니다.
여름은 작년의 여름이 그랬고, 재작년의 여름도 그랬었고, 또 내년의 여름도 그럴 것처럼 푹푹 찝니다. 반복입니다. 그런 여름을 서로 다른 이들이 느끼고 묘사하지만 언어로 발화되는 문장은 같습니다. 이렇게 늘 비슷하게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똑같은 여름 속에서 인물과 문장들도 반복됩니다. 묘사되는 여자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녀들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같습니다.
김아야미는 누군가에게는 시인 여자이고 누군가에게는 김아야미이며, 때로는 눈 먼 소녀이고 또 어떨 때는 스스로 여니가 되기도 합니다. 여니는 극장장이 소개해준 독일어 선생이고 오디오극장에서 공연되는 작품의 성우이며 제약회사 직원이 늘 약을 배달하는 고객이기도 하고 운전하며 오디오극장을 지나는 중년 여자이기도 합니다.
김아야미가 본 것은 다른 때 부하킴이 본 것이기도 하고 김아야미가 땀에 젖은 유일한 옷 대신 입은 옷은 눈 먼 소녀의 옷이기도 합니다. 누가 언제, 혹은 먼저 그것을 보았는지 그것을 겪었는지 그것을 느꼈는지 그것을 말했는지, 독자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늘 극장장이 맞이하고 배웅하는 음향기사의 버스도 흰 버스이고, 어느 날 사고가 나는 것도 흰 버스이고, 그 사고나는 흰 버스의 사진을 김철썩이라는 이름의 시인이 찍습니다. 그 흰 버스는 같은 흰 버스인 것같이 보이긴 하지만 누구도 명확히 그것은 모두 같은 버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겁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습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로 그렇습니다. 분명 이것과 저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 사람과 저 사람은 서로 같지만, 연결되어 있는 이것과 저것 중 무엇이 먼저이고, 서로 같게 보이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은 정말 같은 사람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이 모든 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소설 속에는 이처럼 무수한 반복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읽어 낯익은 그 문장은 때로는 누구의 것이었는지 기억 나기도 하고 때로는 기억이 안 나기도 합니다. 친절하게도 이 작품의 해설을 붙인 소설가 김사과가 중요한 문장들은 이 책 속에서 총 몇 번 나왔는지 세어놓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읽은 소설에 붙은 해설 중에 가장 재미있었던 이 믿음직한 김사과 나름의 풀이를 보면서도, 과연 김사과가 문장이 등장한 횟수를 제대로 세었는가, 실수는 없었을까 의심이 드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특정 문장이 총 4번 나왔다고 했지만 왠지 그것보다 더 많이 나온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꿈에 빗댑니다. 입구도 출구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고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없고 가능한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는 꿈 같이 그렇습니다.
저는 특정 꿈을 반복해서 꿀 때가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 꿈에서 깨고 나면, 이 꿈을 꾼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 어떤 꿈이었는지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희미하게 느낌이나 인상만 남아 있어서 도무지 설명할 수 없지만, 다시 꾸게 되면 그 꿈이 전에 꾸었던 그 꿈이라는 건 알 수 있는 그런 타입의 꿈입니다.
유치한 표현이지만 이 소설은 마법 같기도 합니다. 반복되는 문장들은 배수아가 거는 주문 같습니다. 아야미는 시각장애인 소녀가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초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아야미는 부하킴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초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저는 배수아의 주문 같은 문장들이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초대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초대하고 있다는 생각'이라는 이 문장 자체는 하나도 독특할 것이 없지만 이 말조차 반복해서 읽거나 말해보면 알게 됩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저도 기꺼이 초대에 응하고 싶어졌습니다. 과거의 받지 못한 초대장까지 찾아 모조리 응해볼 작정입니다. 거기가 식당이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식당일 것이고, 거기가 극장이라면 화면 없이 소리만 나오는 오디오 극장일 것이고, 거기가 여니의 동네라면 이상하게 인적도 없고 불빛도 없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