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단단하게
옌롄커 지음, 문현선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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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문학은 정치 및 사상적으로 암울했던 80~90년대를 지나면서 그 경험에 대한, 혹은 그 경험을 통한 문학의 한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중국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평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옌렌커의 [물처럼 단단하게]를 읽게 됐습니다.


제목에서 쓴 것처럼 이 책은 독특합니다. 말 그대로 '혁명로맨스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 12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6장 제목은 '혁명 낭만주의'입니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혁명에로문학으로도 불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한국에 번역된 책은 상당부분이 수정되거나 삭제되거나 표현의 수위를 낮췄다고 하니 옌렌커가 처음 쓴 그대로의 책이라면 '혁명에로문학'이라 해도 어색함이 없었을 겁니다. 그만큼 청강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나 군대를 제대한 한 젊은 청년, 가오아이쥔의 혁명에 대한 열정은 도시에서 시골로 시집 온 저돌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샤훙메이를 향한 욕정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근대 소설의 인물들이 그러하듯이, 가오아이쥔 역시 절대 평면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작가는 가오아이쥔의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샤훙메이에 향한 뜨거운 욕정과 또 출세를 꿈꾸는 세속적인 욕망 모두를 그려냅니다. 그래서 이 작자는 오로지 출세하고 싶어서 혁명을 하려는 거 아닌가 한심하게 여기거나, 단순히 원하는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 혁명을 그저 유혹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가도, 또 한켠에 혁명에 대한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 또한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가오아이쥔 역시 방금 언급한 모든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작가가 이들의 마음 속을 훤히 읽어내는 시점에서 작품을 썼기 때문에 저희 독자 역시 그 모든 세속적이고, 탐욕적이고, 또한 순수하기도 한 그의 마음 속을 같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혁명로맨스문학인 이 작품은 또한 블랙코미디가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갸오아이쥔은 젊은 혁명가의 자격으로 지켜봤을 때는 한심한 측면이 두드러집니다. 혁명을 지휘하기 위한 중대한 계획을 세운 후 영화의 한 장면에서처럼 바람이 불어 분위기를 더해주기를 바란다던가, 스스로가 쏟아낸 구호와 연설에 누구보다 스스로가 감탄하는 장면들은 말 그대로 코미디입니다. 

이런 가오아이쥔의 모습을 이런 생각을 해보게 합니다. 과연 중국 혁명사에서 위대한 인물로 기록된 그 모든 인물들이, 아니 세계사에 위대한 혁명가로 기록된 그 모든 인물들이, 정말 아무런 권력욕이나 출세에 대한 기대 없이 또 성욕도 없이 순수하게 인민을 해방시키고 세상을 구원하는 100% 순수한 목적의식만으로 혁명을 지휘했을까 하는 겁니다. 저는 꽤 자신 있게 아니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처음엔 순수하게 시작했어도 사람이라면 그 단 열매를 맛 보고 그 맛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처음에는 유치하고 한심하게 생각했던 혁명가로서의 가오아이쥔이라는 인물에 대한 생각은 책을 읽는 후반부로 갈수록 조금씩 감탄이나 심지어 경탄으로 변해가기도 합니다. 그는 실제로 스스로가 감탄할 만큼 언변이 좋고, 머리도 뛰어나며, 한 여자에 대한 순애보를 끝까지 간직하기까지 하는 멋진 남자인 겁니다. 책을 읽으며 마음 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언젠가 가오아이쥔이 샤훙메이를 배신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 초심을 잃고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사람으로 변하지 않을까하고 계속해서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누구보다 과감하고 또 로맨틱하게 그는 혁명을 하고 또 사랑도 했습니다.

주경야독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혁명의 연인, 가오아이쥔과 샤훙메이는 낮에는 혁명을 밤에는 사랑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어느 순간 혁명과 사랑의 경계조차 희미해집니다. 정열적인 사랑을 나눌 때조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혁명가를 들었고, 사랑의 밀담도 마오 주석의 사상과 그의 사를 늘 기반으로 삼았으니까요. 

지금까지는 대체로 혁명이라고 하면 남녀가 함께 하더라도 늘 '동지애'만 강조되어왔습니다. 함께 혁명을 하고 또 그러다보면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들은 늘 혁명을 앞세워 그들의 욕정을 눌러야 했습니다. 문학 속에서 그랬고 실제로도 그 욕망들을 고스란히 표현한 이들보다는 혁명 뒤로 감춘 이들이 더 많았을 거라고 짐작됩니다. 그런 점에서 옌렌커의 [물처럼 단단하게]는 굉장히 신선했던 겁니다. 

책은 무려 700쪽 가까이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입니다. 혁명을 다루고 있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어렵지도 않습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입체적이기 그지 없는 인물을 다루는 옌렌커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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