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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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는 엄마의 연애 같은 책이었습니다. 듣고 보면 조목조목 너무 맞는 말인데 듣기 전에는 어색한 일. 엄마도 여자니까 연애도 하고 그러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야 하지만 우리 엄마를 엄마로만 생각하는 동안에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것처럼 피로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피로한 것이 당연했던 겁니다.

 

피로는 우리에게 멈춰서서 이 모든 것이 그럼직한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아주 중요한 기어 같은 것이었습니다.

 

면역력도 마찬가집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면역력을 기르기 위해 프로폴리스를 먹어보고 있습니다. 아픈 게 싫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단순히 아픈 것보다는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싫은 겁니다. 한 두 번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지만 자주 그러기가 싫은 겁니다. 직장인에게는 몸이 약한 것도 일종의 무능력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뭐 이래 하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은연 중에는 항상 정력적이고 건강한 직장인이 되고 싶은 소망이 있었나봅니다. 그래서 실제로 몸의 어떤 곳에 확실히 '아프다'고 할 만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이상은 '아프다'는 말을 잘 쓰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이염을 앓고 있는 것을 누가 알고 아프냐고 묻거나 아파서 어떡하냐고 걱정을 하면 '아픈 게 아니라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거나 '아프지는 않고 그냥 좀 불편한 것'이라고 말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아플 때 더 많은 영감이 떠오르는데 말입니다. 냉동실에 넣고 인위적으로 얼린 얼음이 사르르 녹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많이 아프지만 않으면 그냥은 쉴 수 없는 회사를 쉴 수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거의 항상 늘 피곤하고 그래서 언제든 휴식이 필요한데 말입니다.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으면서 이렇게 건강과 면역력에 집착하는 저의 깊숙한 내면을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1층에서 작동을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깊숙이 깊숙이 내려가본 거죠. 그리고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그리하여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나 자신을 자꾸 채찍질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만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습니다. 이것은 분명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자신이 저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겁니다. 

 

   세계의 긍정화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낳는다.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내재적 성격으로 인해 면역 저

   항을 유발하지 않는 것이다.

P.21

 

한병철이 정의한 '새로운 폭력'은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경쟁과 근면을 종용하는 면역학적 타자에서 나오는 '꽤 오래된 폭력'과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는 '새로운 폭력' 두 가지 모두에 시달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책에서 지적한 대로, 그런 성격 때문에 '면역 저항'조차 유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인식하지도 외치지도 못하는 정서적 불구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니라면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며 몰락이며 탈진이다.
P.48

 

그러니 이렇게 꾸짖는 말이, 꾸짖음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고맙고 반가울 수 밖에요.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보이지 않는 채찍을 휘두르고 또 그 나머지 사람들이 앞에서 지팡이를 내밀며 어서 잡고 오라고 하는데 늦추고 멈추라고 합니다. 그리고 즉각 반응하는 것이 천박한 일이라고 일갈합니다.

고맙고 반갑습니다. 죽비처럼 내리치는 이 말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모릅니다. 이제 나는 잘 모르겠는 일은 판단을 유보하고 좀 더 생각해봐도 됩니다. 관습적으로 반응해왔던 익숙한 자극들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여도 됩니다. 그게 뭐든지, 이래도 되나 생각했던 것들을 다 그래도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게 더욱 좋습니다.  

 

 

소셜 네트워크 속의 "친구들"은 마치 상품처럼 '전시된 자아'에게 주의를 선사함으로써 자아 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할 따름이다.
P.96

 

솔직히 이런 구절을 읽으면 좀 당혹스럽긴 합니다. 소셜 네트워크를 무엇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저로서는 한병철의 거의 모든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이것까지 쉽게 인정해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나름의 강박을 가지고 있어서 이 말에 동의하면 왠지 소셜 네트워크 자체를 멀리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합리화의 달인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구절에 대해서는 또 한병철이 요구하는, 멈칫하고 중단하는 태도를 취하면 조금은 편해집니다. 페이스북에 제가 제 자신을 전시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친구가 상품처럼 제 자아감정을 높여주는 소비자의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은 그런 구실만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앞으로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면 저는 기꺼이 속도를 늦추고 필요하면 멈추겠습니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ㅡ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P.112


아아 이번엔 니체의 권위까지 동원해 우리의 부지런함을 꾸짖으시는군요! 우리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라는 명쾌한 정의를 내려주시는군요! 물론 이를 그저 제 맘을 편히하는 도구로만 악용해서는 안 되겠지요(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역시 아직 저는 긍정성의 폭력에 저를 버려두고 있다는 증거일까요?). 그저 저는 기다릴 것은 기다리고 게을러야 할 때는 게으를 것입니다.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조금 더 너그러운 시선으로.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중략)......단순한 생명기능으로 환원된 삶은 무조건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하는 삶이다.
P.113

 

건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보다는 몸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꽤 분명해보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니요. 이건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단순히 생명기능으로만 환원되었다니요. 이건 좀 아깝지 않습니까. 우리는 숨쉬고 몸을 가꾸는 것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많고 하고 싶은 게 많은데요.

 

한병철이 제시한 피로사회와 우울사회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피로하고 우울한 사회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피로하고 우울한 게 정상이라는 거죠, 그게 이상하지 않다는 거죠. 그렇다면 왜일까요. 그건 한병철 님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해주셨지만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의 생각할 몫입니다.

 

책을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나서 제가 써놓고도 정확히 무슨 의도로 쓴 건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런 메모가 있네요. [피로사회]에 있는 엄청난 반전은 자아의 피로는 바로 치유적 피로라는 것이라고. 제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써놓은 건지는 다시 한 번 책을 읽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더 모르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만요.

 

[피로사회]는 피로할 때마다 꺼내 읽는 박카스나 우루사나 뭐 그런 것과 같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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