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3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밖에서 친구를 만나고 돌아왔는데 선생님의 연락이 와 있었습니다. 집으로 이성복,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었는데 누나가 없어서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는 겁니다. 확인을 해보니 핸드폰에 음성메시지가 남겨져 있었습니다. 나 이성복이다, 학교로 한 번 찾아오너라. 내 연구실 전화번호는. 이라는 비교적 짧고 간결한 메시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제 심장의 쿵쾅거림은 길었습니다.
여름방학, 비교적 한산한 캠퍼스를 지나 선생님의 연구실로 갔습니다. 응 그래 와서 앉거라. 저는 긴장된 마음으로 소파 끝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았던 걸로 기억합니다(10년 전의 일을 적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문장 뒤에는 '...으로 기억합니다'라는 문장이 들어가야겠지만, 거추장스러우니 이제부터는 생략하겠습니다) 맨날 머리모양이나 바꾸고 농땡인 줄 알았더니 너 과제를 꽤나 잘 했더라?라고 운을 떼십니다. 뛸듯이 기뻤지만 저는 수줍어 얌전을 빼고 앉아있었습니다. 그 때도 지금과 비슷한 말습관을 갖고 있었다면 아마도 '정말요?'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당시 선생님이 내어주신 과제명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저는 기형도 시인의 <위험한 가계 1969>와 이성복 선생님의 <1959년>이라는 두 시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조금만 손보면 당장 발표할 수도 있겠다는 엄청난 칭찬을 해주셨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직접 가르친 제자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그 글을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점심시간 직전 선생님의 수업이 있는 날이면 채식을 시작하신 선생님이 즐겨가시던 학교 후문 근처 비빔밥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은 워낙 이성복 선생님 이전의 이성복 시인을 좋아했던 터라 그네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가끔 약속이 있거나 해 저를 부르지 않으시면 그것이 더 마음이 쓰였습니다.
선생님은 제 이야기를 많이 물으셨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하게 됐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한 살 위셨던 선생님은 아버지처럼 생각하라는 고마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물론 워낙 대시인이고 존경하는 스승이라 아버지만큼 편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아버지처럼 의지가 됐습니다. 졸업식 날 찾아가서 받은 꽃다발을 드렸더니 그 때 준비해두셨던 봉투를 꺼내 제게 주셨습니다. 졸업 축하한다며 정말 아버지처럼 용돈을 넣어주셨던 겁니다.
선생님은 늘, 모든 꽃이 장미일 수는 없지만 장미가 아니라도 세상에 예쁜꽃은 얼마든지 많다며 늘 저를 격려해주셨습니다. 글을 쓰기를 바라셨습니다. 스웨덴에 공부하러 가서 예정된 6개월만에 돌아오게 됐을 때도 너무 빨리 오는 것 아니냐며 좀 더 남아서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고, 졸업 전에는 졸업하면 어떻게든 서울로 올라가서 많은 사람들 만나며 자극받아 글을 쓰라고 조언해주셨습니다. 졸업 후 취업을 해서 일하고 있을 때도 공부는 계속 하고 있는지 궁금해하시고 몇 번이나 선생님 지인과 제자들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일년에 한 두 번 연락을 드리고 찾아뵈면서 어쩌다보니 서울에 와서 일을 하게 됐고 어쩌다보니 서른이 넘어버렸습니다. 공부하지 못하고 돈벌이만 하며 사는 모습이 부끄러워 마음과는 달리 연락도 자주 드리지 못하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 동안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습니다.
작년에는 만나뵙기로 한 날 선생님께 다른 일이 생겨 만나지 못하게 됐습니다. 곧 다시 찾아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채로 1년 가까이 또 시간은 갔습니다. 그러다 얼마 전 선생님의 10년 만의 시집 출간 소식을 듣고 전화를 드렸는데, 선생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두 번 해도 받지 않으셔서 문자를 남겼습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전화를 금방 받으시고, 문자 답도 금세 해주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어디 멀리를 가셨나, 시집을 내시고 인터뷰로 바쁘신가 했습니다.
며칠 후 다시 전화를 했을 때 선생님은 화가 많이 나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 선생님이 화가 나신 줄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 두어 번의 메일을 주고 받았고 저는 다시 선생님께 연락드릴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를 귀이, 예삐 여겨주시고 신경써주시던 선생님께 실망을 안겨드리고 저는 조금이라도 빨리 선생님을 다시 뵙고픈 마음 대신에 선생님의 [래여애반다라]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지금도 천천히 82편의 시 한 수 한 수를 다시 읽고 있습니다. 어떤 시를 읽을 때는 선생님이 그대로 떠올라 웃음이 터지고 또 어떤 시를 읽을 때는 선생님이 그대로 떠올라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저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하고 섬세하신 분이 이렇게 한 순간 한 순간, 하나하나를 다 보고 느끼며 기억하며 사시는구나 생각하니 그것 또한 마음이 아팠습니다. 시인의 숙명이라고 해도 선생님은 제게 아버지같은 선생님이니까요.
저는 그 전에도 그랬듯이 이렇게 선생님의 글을 읽고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늘 선생님이 제 곁에 계시다고 생각해왔듯이 그렇게 조금은 여유있게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곧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