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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그간의 간격을 생각해보면 최근 김연수 작가의 신보 발간 간격은 상당히 짧아졌다. [원더보이] 이후에도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과 또 다시 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이 거의 연달아 나왔으니까.
그래서인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을 읽은 후 쓰는 글이긴 하지만 최근작들 전부를 한꺼번에 생각해보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올해 나온 책 세 권은 내게 출간된 날짜 순서대로 점점 나빴다.
정말 좋아하는 작가이다 보니 기대가 너무 커서 그런 건지, 다음 작품을 애타게 기다렸다가 읽는 반가움이 모자라서 그런 건지, 자꾸 읽으니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예전 작품들을 읽은 후의 마음들을 돌아보면 최근 작품들은 뭔가 김연수 작가가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동시에 오랜 팬인 나에게서는 조금 멀어져 간 기분이다. 순전히,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긴 하지만 김연수 작가만이 갖고 있던 신선함이 다소 바래고 독자를 감상적으로 만드는 기술이 주로 발휘된 것 같다. (이런 말을 쓰는 것조차 왠지 마음이 아프다. 김연수 작가는 이 글을 보지도 않겠지만 죄송하기도 하고 TT)
최근 보고 읽은 영화나 소설은 대체로, 장르적인 성격을 기본적으로 띠고 있었다. 결말을 궁금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스터리 장르 기법은 기본적으로 관객이나 독자를 놀라게 만들고 충격을 주는 반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늘 반전이 등장한다. 그렇다 보니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듣게 되고 또 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반전이 없는 소설이나 영화는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재미도 줄 수 없게 된 걸까. 물론 기막힌 반전이 곁들여지고, 다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하나 둘 베일을 벗으면서 발견하는 즐거움이 큰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추리소설을 좋아하고 범죄 관련 미드를 즐겨 본다. 하지만 모든 소설과 모든 영화와 모든 드라마가 다 그렇게 반전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그저 조금씩 조금씩 사실이나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도 좋고,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그러하듯이 그저 아무 것도 명확해지지 않아도 좋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좋은 글들을 읽을 때 기대하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르고 멋진 시각, 나보다 더 많이 보고 듣고 생각한 사람들의 시선들인 것 같다. 독자를 놀라게 하기 위한 이야기보다 내가 그 책이나 글을 읽기 전에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고 알지 못했고 어렴풋이 알았으나 그저 어렴풋했던 것들을 시나브로 알게 하는 이야기가 나는 좋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양어머니의 죽음 이후 한국으로 가 자신의 뿌리를 찾는 카밀라의 이야기다. 초반에 등장하는 이런 설정을 보면서, 잘못하면 뭔가 신파나 통속극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소재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절로 됐지만 김연수 작가는 뭔가 다르게 풀었을 거라는 기대 또한 있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끝까지 놓지 않았지만, 결국 아빠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빠가 아니고, 또 저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이 사람일까, 저 사람일까, 고민하게 하고 놀라게 하다가 예상치 못했을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이 식상했다.
카밀라 생모의 내레이션 부분은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와 너무 비슷한 느낌이었다. 세상에 더 이상 완벽히 새로운 것은 없으며 세상의 엄마들 마음이 다 비슷하다고 해도 그랬다.
그럼에도 김연수만의 장기는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래도 이 책을 읽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마 김연수 작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나의 실망이 이렇게까지 표출되는 것 같긴 하다. 책을 다 읽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래 부분을 발췌해 SNS에 올리고, 또 그 아래와 같은 감상을 썼었다.
네게서 연락이 끊어지고 나서, 그리고 더 이상 내게 연락하지 않은 뒤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너의 부재나 침묵이 아니라, 너에게 그런 위로의 말을, 너를 위로하는 행동을, 그렇다고 말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껴안고 입 맞추는 그 모든 인간적인 위로들을 해줄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어. 마음속으로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일 따위는 추모비 앞에선 정치가들에게나 어울리지, 이별을 당한 남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읺는 일이라는 걸 이젠 알겠네. 어느 틈엔가 나는 너를 위로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를 증오하는 사람이 됐지.
_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중
"그렇다고 말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김연수가 내게 대단한 작가인 이유는 바로 이런 문장에 있다. 내게 인간관계에 대한 설명은 딱 이 한 줄로 충분하다. 그렇다고 말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그렇다고 말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다 읽은 후에는 또 이런 글을 썼었다.
[지지 않는다는 말]은 다소 교조적인,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좀 통속적인 느낌이다.
처음 책을 펴들 때의 반가움, 책 속 정수 같은 몇몇 문장이나 문단을 뛰어넘는 작품으로서의 감동이 아쉽다.
작가님, 이젠 좀 천천히 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ㅠㅠ
라고, 나 정도의 충실한 팬이라면 감히 말해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