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헤르타 뮐러 | 저지대

 

이런 책을 읽으면 특히 세계의 모든 언어의 네이티브이고 싶다는 욕망이 강렬해진다. 헤르타 뮐러의 작품은 스토리이기보다는 상황이다. 시적인 묘사 속에 이야기가 숨어있어서 집중해 그 상황을 그려내지 않으면 이야기가 선명하게 보이질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명확한 형태로 이야기를 숨겨놓은 것 또한 아니다. 

단편집 <저지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저지대’ 역시 헤르타 뮐러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었다면 그저 너무 지루하고 가난해서 끔찍한 한 마을의, 한 여자아이의 삶을 그렸다는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했을지 모른다. 왜 루마니아 독재 정부가 그녀의 작품을 싫어했고 출판을 금지했고 그런 작품을 썼다는 이유로 그녀를 괴롭혔는지 잘 모르거나, 독재 정부이기 때문에 너무 민감했던 거라고, 그 정도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누구 때문인지 말하지 않아도, 그 원인제공자가 너무나 명확한 경우에는 그저 그렇다고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비난이 될 수 있다. 헤어진 직후 자신의 힘든 상황을 공개적으로 토로하는 것 자체가 남들에게는 전 연인에 대한 비난으로 비춰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헤르타 뮐러가 독재에 대해 저항하고 이야기하는 방식은 참으로 고상하고 멋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이렇게 끔찍한 상황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이, 작가 개인의 삶과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도 좋은 작품의 요건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 요즘 같은 정보홍수 속에서 유명한 작가의 유명한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더 불가능한 일이지만, 사전정보 전혀 없이 오로지 작품만 읽었을 때도 ‘저지대’는 훌륭한 작품인가? 

대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상황만 알려주는데 사람들의 심정이 올라오고, 묘사만 하는데 이야기가 드러난다는 것은 이 작품이 언제 어디에서 읽혀도 독자에게 끔찍하고 황량한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해준다. ‘저지대’ 속의 삶은 말 그대로, 그냥, 별 일 없이도 끔찍하다. 너무 지루해서 끔찍하다. 

 

<저지대>에는 아주 짧은 이야기에서부터 ‘저지대’ 같은 중편까지 많은 단편이 실려 있다. 그 중 제일 먼저 실린 ‘조사’ 역시 아주 인상 깊었다. 어떤 잘못을 했던 사람도 죽고 나면 살아있는 사람의 평가는 관대해지기 마련이다. 죽음 직후에는 그 사실에 대한 애석함이 그 어떤 감정보다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 속 문상객들은 그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다. 여전히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그의 삶을 평가한다. 

그 평가가 아주 단편적이라는 한계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입사 시험에서 압축된 방식으로 사람을 평가해 합격자를 정하듯, 한 개인의 삶에 대한 평가 역시 어쩔 수 없이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여러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단편적인 평가들이 모아졌을 때,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평가가 되는 것일 거다. 그런 점에서 남겨진 유족에게는 문상객들의 태도가 잔인한 것일 수 있지만 또 가장 진실일 수 있다는 점을,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실제로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나 또한 그렇게 냉정하고 객관적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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