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이스트리가 된 기분이다. 겹겹이고 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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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ㅇ’은 아음(牙音)이니 ‘업(業)‘자의 첫 발성과 같다. 나는 종성에만 남은 ㅇ의 음가를 옛사람처럼 초성에서 내보려고 업, 업, 업, 반복했지만 아무래도 잘 되지 않았다. 그때 가게에 나와 있던 설아씨가 내 수업 교재를 넘겨보고는 도움을 건넸다. "잉어, 할 때의 ‘어‘처럼 하시면 돼요." 잉어. 잉어. 나는 일러준 대로 해보았고, 그렇구나, 그냥 ‘어‘가 아니고, 닫힌 문이 열리는 것 같은 ‘어‘. 내가 찬탄을 하자 그는 어머니가 베트남 사람이라고 알려주었다. "베트남어에는 그 비슷한 발음이 있어요." 나는 설아씨의 목소리에 메아리가 내장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꼭지 이응의 꼭지가 그 메아리의 조절 밸브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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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성암을 앓고 있었다. ‘토성암‘이라 적고 보니 무슨 돌이 떠오른다. 화강암이나 현무암 같은. 그런데 土星癌이다. 췌장암이나 자궁암 같은. 토성은 하늘에 떠 있었다. 크고 창백하고 고리가 없었다. 고리는 어디 갔지?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위장이나 콩팥에 병이 든 것처럼 토성의 부위가 아팠다. 아파서가 아니라 아픈 데를 움켜잡을 수 없어서 눈물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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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정거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터트렸던 웃음을 나는 얼굴에서 깨끗이 지워내기 어려웠다. 지운 웃음과 남은 웃음이 뒤섞여 광대뼈를 건드리고 입 주변의 근육을 일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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