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인간의 아름다운 소멸을 말하다 플라톤 아카데미 총서
강영안 외 지음 / 21세기북스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바니타스 양식이라는 회화 기법이 있다. '바니타스'는 인생무상이라는 라틴어로서, 인간의 삶이 덧없고 유한함을 의미한다. 바니타스 정물화에는 대표적으로 해골이 등장하고, 그 옆에는 한창 피어나는 꽃이 있는 경우도 있다. 결국 삶의 뒤도 아니고 생과 동떨어져서도 아닌, 바로 곁에 죽음이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는 우리말로 '죽음을 기억하라'이다. 로마에서 장군이 개선해서 들어올 때 반드시 외치게 했다는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고 있고 접하고 있으면서도 사실 '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본문에서 인용된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소설을 보자. 그는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 한다. 논리학에서 배운,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카이사르는 죽는다.는 사실 카이사르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그것이 나의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죽음을 목전에까지 두고 있다 되살아 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베니타스 정물이 주는 교훈은 삶과 죽음이 지금 이 세계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일깨우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소유한 그 모든 것들은 모래가 손을 빠져 나가듯 사라지지만 어쩌면 '죽음'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한 나만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자세는 더 특별해야 한다. 


군대에서는 전쟁상황을 가정해 머리카락 일부와 손톱, 발톱을 봉투에 남기고 편지를 동봉하는 가상 상황이 있다. 이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이겠지만 의외로 그 때 내가 왜 그런것에 집착했을까 같은 후회도 많이 든다. 잘했던 일들을 생각하기도 촉박했던 시간에도 못한 것, 부족했던 것이 머리속을 꽉 채우는 것은 무척 괴로운 일이었다. 우리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을 객관화 하는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잘못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보인다. 괴로운 일이지만 필요한 작업이다. 이 책에는 이처럼 스스로를 객관화 할 수 있는 강연들이 실려 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인문학의 복원을 위해 주관했던 강의의 주제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주제인 '죽음' 편이다. 이 책의 앞의 네 강의는 어떻게 더 잘 살 것인가이고, 뒤의 네 강의는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앞에서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이제는 전보다 생에 대한 애착을 갖고 살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시적인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허무하고, 수동적인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렇다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운명론'으로 이어져 허무한 결론을 내는 것만이 목적일까. 메멘토 모리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지혜로운 선조들은 그것을 기억하라고 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던 것마냥. 그렇다. 바로 소유했던 것마냥, 우리가 죽었던 것처럼, 항상 그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찌 헛된 인생을 살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가 이 말에는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항상 기억하는 것은 항상 겸손하게 생을 받아들이면서, 현재를 사랑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아 내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답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인생이 비록 부조리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살아 나가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돌 굴리기를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無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거기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우리 자체로서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온전히 실존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있는 방법이다. 마지막 말은 스티브 잡스의 연설 중 한 부분이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진화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점점더 다양해지고 방대해지고 있다. '총,균,쇠'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개인적으로는 '섹스의 진화'라는 책을 통해 더 잘 알고 있는 저자이다. 인간이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에 관여하는 수단에 불과 하다면 그 행태 또한 유전자의 입장에서 분석할 때 답이 쉬워질 것이다. 섹스의 진화는 자존심 상하게도(?) 그 점을 너무 여실히 보여준 책이었다. 이번 책은 성생활부터 시작해서, 노화와 죽음, 그리고 문화, 예술, 성향까지 다양한 접근을 제시해서 기대감을 높여주고 있다. 그런데 표지가 어째... 아무리 봐도 요즘 스타일은 아니다.  














플라톤 아카데미 강연 모음집 인문학 아고라 세트 마지막 권이다. 이전에 '나는 누구인가'는 강신주, 고미숙, 최진석 등 유명한 강사의 강연으로 큰 울림을 주었다. 중간에 '어떻게 살 것인가'에 이어,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로 관심을 끈다.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 환경과 방법은 다를지라도 '죽음'이란 공통점은 숙명이다. 이를 피해야할 어떤 것이라기보단 어떻게 받아들일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삶에 대한 가장 진지한 자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가 11년간 이탈리아 일간지에 기고한 글을 모은 책으로 그의 유작인 셈이다. 제목만으로도 흥미를 끌만한 테마가 다양하다. 강한것이 정의라고 여겨지는 세상은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우리는 옳게 가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에 적절한 책이다.  



알랭드 보통은 내가 덮어 놓고 믿고 보는 작가 중의 한명이다. 그의 책은 한 번도 기대에 어긋난 적이 없다. 덕분에 내 책장에도 그의 책이 제법 쌓여 있다. 그리고 이번에 한 권 더 추가 해야겠다. 이 책은 특히 한국에서 사랑받고 있는 보통이 2015 청주국제공예전 작품집을 내놓았다. 한국 공예 작품에 대한 보통의 해석이 무척 궁금하다. 명화나 유명한 건축물, 서양의 작품을 위주로 그의 글을 읽었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색다른 경험이 될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의 신전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디서 답을 찾을것인가


철학의 과정이 ‘나’를 찾아가는 수순이라고 한다면, 우리 외부에 절대자를 상정하는 일은 철학의 관점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짓일까. 외부의 절대적인 힘이나, 인간의 육신으로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이상향이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이라기보단 신학적인 느낌이 강하다. 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 이런 생각을 접목시켜 보았다. 플라톤은 철학의 최고 목표로 ‘이데아’를 설파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늘 존재하는 이데아는, 우리가 보는 사물과 사물을 흉내 낸 또 다른 사물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되며, 그것에 따른다면 이상적인 사회는 건설될 수 있다. 


정신의 절대적인 기준을 따라 사람이 바른길로 나갈 수 있다면, 정치에서도 위대한 지도자가 우매한 대중을 바른길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철인정치'가 자연스레 도출될 것이다. 이 결론을 확장시키면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고, 생활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절대적 기준인 '선의 이데아'가 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기준을 우리는 언제 찾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서 우리는 바로 '신'의 존재를 떠올릴수밖에 없다. 이렇게 접근할 때 니체가 말한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는 말에 무릎을 치게 된다. 복잡한 논리나 성찰의 과정이 어려운 이들에게, 하나의 기준을 주고 그것에 따르라는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여지는 데 어려움이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런 면에서 신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신답지 못한 신

호메로스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완성해 훗날 그리스인들의 사상의 근본에서 뿌리 깊게 밝혀 있는 지혜의 근원이다. 플라톤 또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글을 암송하고 익히며 배웠지만, 어쩐 일인지 훗날 플라톤은 시인이 사라져야할 존재라고 규정한다. 사상할 수 있는 자유를 그토록 원했던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던 그의 제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이야기의 반대편에 시인을 세워놓고 침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시가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폐기되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것은 '시' 자체가 바로 모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궁극의 '선의 이데아'가 존재하는데, 그것에 다다르지 못한 현실이 있는 것도 모자라서, 시인을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이 사실을 플라톤은 견딜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시인의 추방'을 주장한다. 통제되어야 할 대상인 인간의 감정이 이성적으로 통제 되지 못하고 시인들은 이를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한다.


후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의 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들은 잔인하고, 감정적이며, 제 멋대로 인간을 가지고 논다. 인간은 장난감처럼 그들의 손 안에서 고통과 행복을 느낀다. 이는 사실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의 마음은 정갈한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호메로스는 놓치지 않고 표현해 냈고, 이 부분은 '선의 이데아'를 주장하는 플라톤에게 두고 두고 맘에 걸리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네. 어떤 인간도 진리보다 더 존중되어서는 안 되네.

그리스를 지배하는 호메로스에 대한 질투였는지, 신의 존재를 격하시킨 그에 대한 분노였는지 알 수 없으나 호메로스에 대한 반감은 '국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신전의 대결보다 중요한 것


철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지에 대해 명료하게 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과정은 어렵고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 되어야 하고, 그 후에 얻어지는 전리품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본 모습이다. 그러나 모든 과정의 끝에 결국 하나의 기준이 존재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철학하는 이유를 전도하는 개념이 될 위험도 있다. 니체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의 모습이 인간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런 신을 부정하고 시인을 추방하고자 한 플라톤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아닌, 도덕적 완성만을 위해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을 때 즘이면 저자는 어쩐지 플라톤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책의 중간 중간 그가 플라톤 철학의 맹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은 호메로스를 죽인 플라톤에 대한 반감처럼 느껴진다. 니체 또한 호메로스를 죽인 플라톤에 대해 반발하며 그를 부정했듯이 저자에게도 그런면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을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한 시대의 진리였던 호메로스를 죽이고 새로운 철학을 세운 플라톤, 그리고 그를 부정한 니체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저자에게도 해당되고 우리에게도 진행형인 이야기다. 저자가 플라톤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듯 우리중 누군다도 저자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진짜 철학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책이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고 누군가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읽히기를 저자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시와 철학, 인간과 영혼의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건전한 비판과 열린 토론이 자유스러운 우리 시대를 꿈꾸는 책이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더 잘살기 위한 수단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철학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 말은 곧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의미가,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한발짝 더 다가가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20년대는 현대문명의 편리함과 그것이 인간의 삶을 황폐화 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던 때였다. 카렐 차페크의 '로봇'은 인간이 결국은 그들이 만든 로봇에 의해 멸종되고 말것이라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담은 SF 희곡이다. 1920년대에 발표된 이 작품은 '로봇'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으로도 유명한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책이 훗날 쓰여진 모든 로봇, 인조인간, 복제인간을 다룬 작품의 화두를 선점했다는 사실이다.  책의 뒤 표지에 이런 말이 쓰여있다. 

"현대의 모든 SF 작품들은 차페크의 '로봇'에 신세를 지고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


오직 인간만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그것은 태생부터 비극을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아일랜드'는 부자들에게 장기를 제공하기 위해 복제되어 별도로 관리되는 인간 아닌 인간들이 나온다. 그들이 유토피아라고 알고 있는 곳은 사실은 그들의 신체를 사용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곳이다. 영화는 이를 알게된 복제인간 '링컨'이 '조던'과 그곳을 탈출하는 이야기로 진행된다. '터미네이터'나 '매트릭스'는 지능을 갖게된 컴퓨터 시스템이 인간을 정복한다는 이야기를 테마로 진행된다. 얼마전에 개봉했던 '엑스마키나'도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라는 한계와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 영화들은 '로숨의 유니버셜 로봇'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화두를 다루고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에 대한 철학적인 생각에서부터 무한한 정보를 바탕으로 생성된 인공지능의 인류에 대한 공격까지 '로봇'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지하면서 무척 현실적이다. 


서막은 과학자 로숨과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가며 로봇을 만들고자 했다는 도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들의 방식으로 '로숨 유니버설 로봇' 회사를 운영하는 이들은 도민과 그의 동료들인데, 헬레나라는 인권운동여성이 그들은 찾아 온다. 그녀는 로봇을 감정없는 존재로 다루고, 목적에 맞지 않거나 오류가 생겼을 때 파쇄하는 행위에 분노하며 이를 당장 멈춰줄 것을 요청한다. 부스만은 로봇의 경제적인 효과를 강조하며 필요성을 내세우고, 도민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류는 이제야 비로소 자아실현을 할 수 있을것이라며 자신만만해 한다.  1막에서는 도민과 결혼한 헬레나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믿으며 끝없이 바꾸려는 시도가 그려진다. 종종 지능을 가진 로봇들이 생산되는데, 라디우스는 그 중 대표적으로 곧 파쇄될 위기에 있으면서도 주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도발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 한편, 헬레나는 로봇 제조에 핵심적인 설계도를 불에 태워 버린다. 3막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알퀴스트가 로봇의 생산을 종용받는 장면이다. 그러던 중 헬레나와 프라무스가 그동안 로봇에게 없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보며 막을 내린다. 


자본이 필요로 하는 노동자


도민은 헬레나에게 로봇의 제작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데 그 중 로봇이 어떤 목적에서 만들어졌는지 말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우선 로봇은 욕구가 적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노동 이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어야 한다. 이는 로봇의 이야기가 아니라 노동을 하고 있는 모든 현대인에게 자본가가 바라는 모습이다. 결국 인간의 욕구가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영혼 없는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다. 지적 능력은 뛰어나지만 창조적인 생각, 불만 따위는 없는 면에서 로봇은 완벽한 존재이다. 인문학적 소양이나 철학적 사고가 뒷받침 되지 않고, 공학 계산에 천재적이거나 회사를 위한 방대한 지식을 가진 인간의 모습은 사실 로봇의 투영에 지나지 않는다. 인문학을 선택과목으로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회계학을 필수과목으로 정하려는 한 대학교의 이런 시도는 오직 회사에 필요한 지식을 가진 로봇같은 인재(?)만 필요하다는 명확한 의사 표시이다. 


로봇은 감정을 느낄 수 없으므로 당연히 사랑 또한 할 수 없다. 이를 대하는 인간의 심리는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갈 박사는 가장 아름다운 로봇 헬레나를 가리키며 하느님도 그렇게 아름다운 피조물은 만들 수 없을 것이라 자부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할 수 없다. 현실에 없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헬레나를 보는 것은 오히려 더 괴로운 일일 것이다. 갈 박사는 그녀를 보며 그렇게 아름답지만 쓸모 없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소름 끼쳐 한다. 로봇이 오직 고유의 기능만을 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들에게 감정의 전이를 바란다면 그 때부터 로봇은 그야말로 불필요하고 무능한 존재가 된다. 그것을 만들어낸 조물주에게조차도 저주 받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로봇, 그리고 우리 이야기 


이 책은 곳곳에 섬뜩한 사고들이 숨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권력자가 피지배자를 조종하는 방법들이다. 로봇이 폭동을 일으키자 도민은 로봇의 국적을 다르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처음부터 모두 다른 로봇을 만들게 되면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해서부터 죽는날까지 상대를 미워하게 된다. 인간이 하는 일이라곤 편견을 조장해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개인간의 유대이다. 모든 권력은 유대를 끊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고, 시대가 변할수록 그 방법이 교묘해졌을 뿐이다. 이 작품은 군데군데 이러한 인식을 심어놓고 은밀한 비판을 하고 있다. 로봇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흉내내며 폭동을 일으키는 것도 우연이 아닌것이다. 로봇의 폭동은 인간과 로봇의 구도가 아니라 감정을 저지하고, 연대를 끊으려 했던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봐야할 것이다. 


결국 로봇의 행동들은 문명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자연스레 대체될 수 있다. 기계 부속품처럼 개성과 가치를 상실하는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로봇이라는 작품이 갖는 의미는 후에 다양한 관점에서 인간 아닌 존재를 생각하게 했지만, 사실 그 근간에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누구의 이야기인지 판단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REBBP 2015-09-2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닉에서 하나 찍었는데 맞췄네요. 사지선다 답안지에서 찍는 것도 이렇게 잘 맞췄으면 좋았을 걸.. 그래도 누가 좋아요 눌러주는 사람도 있었네요. 아마도 좋아요 알바

CREBBP 2015-09-24 12:59   좋아요 0 | URL
그리고 북플을 쓰세요. 신세계야요

고군분투 2015-09-28 00:42   좋아요 0 | URL
북플이 먼가요. 알라딘에서는 첫 댓글이네요. 이것도 적반하장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선정이 된 이후라서 헤깔릴까봐 그냥 뒀어요. 꼭 좋아요 알바라고 해야 하나요? ㅋ
 
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별을 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진 철학자 탈레스를 보고 하녀가 비웃으면 말했다. 

"탈레스는 하늘의 것을 보는 데는 열심이면서 발치 앞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장자'에 보면 제나라 환공과 윤편의 이야기가 이와 비슷하다. 수레바퀴를 깎는 윤편이 환공에게 무슨 글을 보고 계시냐고 묻자 환공은 성인의 말씀이라고 한다. 윤편은 그들이 살아 있느냐고 묻고 환공은 이미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에 윤편은 '왕께서 읽는 것은 그저 찌꺼기입니다.'라고 말한다. 환공이 화를 내며 이유를 묻자. 

'수레바퀴 깎는 일마저도 많이 깎으면 헐거워지고, 덜 깎으면 빡빡해서 굴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뿐 입으로는 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제 자식에게도 이 일을 물려주지 못하고 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성인들 또한 핵심적 깨달음은 책에 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철학이 철학적일 뿐이라면 철학은 영원히 철학 그 자체로 남을 수밖에 없다. 철학이 현실로 내려와 세상 바퀴의 굴대에 맞추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뜬구름 잡는 형이상학에 불과할 것이다. 철학을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책은 수도 없이 나온다. 그중에 가장 보편적인 스타일은 바로 일상이나 쉬운 주제에서 철학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철학자와 하녀'는 현장 인문학자인 저자가 유식한 철학이 아닌 일깨우는 철학을 위해 쓴것으로, '수유너머'라는 연구 공동체 생활을 하는 그의 현장 철학이 짙게 배어나는 책이다.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을 다시 한번 철학적 눈으로 돌아보면서 철학이 우리에게 어떻게 의미 있는 것이 되어가는 지를 보여준다. 니체 전문가인 저자가 니체의 글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철학자들의 글을 끌어와 현실을 재해석 하지만 어렵지 않고 흥미롭기까지 하다. 


최근 노숙자를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연이 늘어나고 있다. 결과가 얼마나 과장된 것인지 모르지만, 실제로 인문학 강의를 듣고 노숙자 생활을 접은 채 일상으로 돌아간 사람도 많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선지 무척 궁금했다. 여태까지 내가 내린 결론은, 시선을 나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 내 과거 내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나를 부끄러워 하게 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에서 가장 필요한 자세라는 것이다. 그런 자세를 갖게 된 사람이 여전히 길바닥에서 자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어떤 철학자보다 더 깨달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그가 그곳을 박차고 나와 다시 시작해보겠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다른 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철학과 인문학이 누군가에게 유성처럼 박히는 경험이 된다는 것은 철학하는 사람에게나 본인에게나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경험이다.  


책의 서문에는 노들장애인 야간학교 엠티 중에 한 학생이 별을 보다 눈물이 쏟아져 나올뻔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것은 어떤 천문학자나 철학자가 본 별보다 아릅답고 완벽한 존재로서의'별'이었다. 그 학생은 그 별을 보고 그녀가 살아야 할 방향을 다시 깨달았다. 저자는 철학이 바로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보거나 듣고 정신을 확 깨뜨리며 스스로를 다그칠 수 있는 것, 카프카의 말처럼 우리 안에 꽁꽁 얼어있는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 같은 철학이 진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이 철학자의 것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야 말로 가장 슬픈 일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생에 쫓기면서 책 한권 읽을 여유 없는 사람들에게 각성하라고만 쓴 책은 아니다. 어쩌면 그들에게 철학이 없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삶을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는 불편함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위정자나 리더계층에서 철학이 없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직 시키는 일이니 했다는 '아이히만' 같은 이에게 없던 것은 '능력'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저자의 이런 생각은 제목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사소한 것은 사소하지 않다', '저항하는 존재는 말소되지 않는다', '바로 잡아주는 사람과 깨뜨려주는 사람', '천국에는 철학이 없다' 등등이다. 나는 특히 마지막 순간에 다들 용서하는 선한 이들과 달리 루쉰이 '죽음'이라는 잡문에서 남긴 글귀가 맘에 들었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에 대해 확신이 있는 것 만큼 스스로의 삶에 당당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종국에 가서는 타협하고 인정하면서 좋은게 좋은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닌 당당한 자세가 특히 지금 우리에겐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