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13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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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 이라는 에세이집 에필로그에서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1991년 5월 그가 천착했던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그러니까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면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소망과 꿈과 희망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그래서 그 일련의 죽음들이 내게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소설가의 일)

 

1991년 많은 이들의 죽음에 대해 누군가는 그 배후를 의심했고그들이 믿었던(?) 어떤 시인은 의미 없는 죽음을 그만두라고 호통쳤다그저 단순히 불온세력의 꼬임에 빠진 것이라고 믿어버리기에는 우리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고 그는 말했다그래서 그가 쓴 소설이 작가 세계문학상을 받게 된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였고또 하나는 바로 이 작품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다.

 

그는 그리고 말미에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맨 앞장에 인용된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적는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 소설은 어쩌면 그 열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그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은 하나의 밀알에 대한 이야기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초반부는 정민과 나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된다. ‘대뇌와 성기 사이에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대학 시절은 시대적 소명과 대의명분에 묻혀 연애의 감정이 사치처럼 느껴지던 시기였다이는 자연스레 그와 정민의 가족사와도 연결되는데그의 할아버지와 정민의 삼촌은 역사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체제가 내리치는 폭력의 영향권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할아버지는 기미년의 만세 행렬에서 태어나태평양전쟁한국전쟁, 4.19, 5.16 등을 거쳤고삼촌은 자신이 전혀 예기치 못했던 폭력에 희생되며 기이한 형태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화자인 나 역시 1991년 명지대 강경대 학생이 시위도중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고난 후 빠져나올 수 없는 역사의 굴레로 영입된다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비겁한 자신에 분개하며 스스로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한다그러던 중 그는 방북 예비 대표로 베를린에 가게 되고 거기서 우연히 한 비디오를 보게 된다강시우라는 인물의 이야기는 그가 들었던 어떤 이야기보다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광주에 내려간 이길용은 한기복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그를 믿고 따르던 중 그의 분신을 예기치 않게 옆에서 목격하게 된다이후 그는 이길용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버리고 강시우의 삶을 살게 되는데 여기에는 역시 시대의 폭력과 개인의 나약함이 사슬처럼 엮여있다이 모든 것은 소설의 후반부에 강시우가 기자회견을 하면서 밝혀지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할아버지와, 정민의 삼촌, 강시우, 한기복, 상희 등 모든 인물들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조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상희의 사랑을 두고 '압도적인 폭력의 시기를 만나서 생기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감정이라고 한 것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누구든 그러한 시기를 거친 인물에 대해 연민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권력에 희생된 미약한 존재에 대한 동정일 것이다. 이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느냐면 또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강시우는 그렇다고 그렇게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존재였다. 작가는 그 속에서 개인 개인의 이야기와 개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소설의 초반에 나온다. 무한한 우주에 무한하게 존재하는 K라는 가상의 존재가 있다. 전 우주에 K는 수없이 존재하고 그들은 서로 실시간으로 문자를 주고 받고 다른 별의 K가 뭘하고 사는 지도 알 수 있다. K는 무한한 우주속에 무한히 존재하므로 외롭지 않다. 하지만, K 앞에 한 여인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K는 더이상 무한한 우주에 무한히 존재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 눈앞의 이 여인을 사랑하는 K는 오직 지구에만 있고 지금도 유일하고 앞으로도 유일해야 한다. 어쩌면 작가가 격랑의 시기에서 개인을 구해내는 방법은 그런 것일 지도 모른다. 무수한 익명의 군중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개별적으로 아파하는 것. 그들이 오직 개별자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처음에는 그저 역사에 묻혀버린 개인의 이야기로 읽히다가 글을 다 읽을 때 즘이면 그들이 유니크한 캐릭터로 각각 살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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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맥 매카시 지음, 임재서 옮김 / 사피엔스21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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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시는 그 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진짜라는 것을. 나는 그가 한 일을 보았다. 한때 나는 그 자의 눈앞에서 걸어 다녔다.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다. 두 번 다시는 내 운명을 걸고 그 자를 만나러 가지 않겠다. .........  

당신이 목숨을 걸지 않으면 그들도 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알아차린다. 어쩌면 당신은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영혼을 내맡길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그러지 않을테다.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p.12,13)


장담컨데 제목만 보고 이 책을 고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무슨 따분한 제목이란 말인가. 실제로 나도 이 책을 보기 전까지 이는 경로효친 사상 혹은 사회복지를 새삼 강조하고자 하는 코맥매카시의 메시지가 아닐까 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더 로드'를 먼저본 터라서,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 하는 책을 썼으니 이번엔 아마도 아들이 아버지를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일거라 지레 짐작하기도 했다. 

성격 급하게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 책의 제목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는 사실 노인을 위한 암시라기보단, 노인을 향한 경고에 가깝다. 

[사진은 영화의 스틸컷을 첨부했습니다]


'노인'이 갖는 상징성


노인을 향한 경고라는 것은 나이든 사람이 아니다.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그것은 장밋빛 뺨, 양두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의 싯귀를 읽고 나서 다시 맨 위의 보안관 벨의 독백을 보자. 그는 보안관이지만 안톤 시거 같은 살인마와 다시 마주치고 싶어하지도 않고 영혼을 걸지도 않겠다고 한다. 그는 노련하기 때문에 모든 사태를 쉽게 파악하고, 넘치는 지식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자신의 영혼을 내건 모험을 하지도 않으며, 적극적으로 시거를 잡으려 하지도 않고 다만 가만히 서서 상황이 호전되기만을 기다린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는 것은, 그저 많이 알고 사태를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행동하지 않는 이에게 던지는 일종의 경고 같은 말이다. 노인은 늙은 사람이 아니고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겁만 먹고 두려워하는 우리 대부분의 모습을 표현한 단어이다.


꿈에서 나는 아버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서 그토록 춥고 어두운 세상의 어딘가에서 불을 피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언제든 닿으면 아버지가 거기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p.339)



벨 VS (쉬거 혹은 모스)


소설의 전체 대결구도는 물론 시거와 모스이다. 모스는 쫓기는 사람이고 시거는 쫓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둘은 또 벨 보안관과 대조를 이룬다. 그들이 한 편에 서서 벨과 대조를 이루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모스는 우연한 기회에 거액의 돈을 손에 넣는다. 이 돈은 마약상들의 거래 과정에서 우연히 모스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모스는 돈에 대한 열정으로 인생을 내던진다. 시거 또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 또한 돈에 대한 열정이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그 열정은 돈보다는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에 대한 열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이 둘의 열정을 돈을 가지기 위한 젊은이의 무모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전체적으로 소설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단순치가 않다. 그들은 돈이 아니라 무엇이든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부을 무엇인가가 있었다면 삶을 내던졌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 열정이 빗나간 것이거나, 사회가 만든 기준에 맞지 않는 저급한 것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니체는 '선악을 넘어서'라며, 사회가 만들어 놓은 good과 evil 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good 과 bad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누군가가 안된다고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내 열정이 그것을 원하고 있다면 하는 것! 그것이 시거와 모스가 가진 치열함이다. 



동전의 양면, 원칙(?)있는 살인




매우 전형적인 살인마의 행태를 보여주면서도 또 이전의 인물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단연 시거이다. 그의 살인행태가 이전 다른 소설이나 영화의 그것과 비슷한 이유는 무감각 하기 때문이다. 그저 본인에게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쉽게 사람을 죽이고도 일말의 감정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저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 그에게는 그가 갈 길만 남아 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에게는 나름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지만, 동전이 뒤집어져서 펼쳐지면 그냥 죽이지 않기도 한다. 그건 그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피해자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운'의 존재를 인정한다. 


22년이나 굴러다니던 동전이 상점 주인의 목숨을 구해주듯이, 우연히 선택한 길에서 살아난 사람은 그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는 그런 운명의 시계까지 억지로 되돌려 놓지는 않는다. 그는 나름 원칙이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잔인해서 차가 필요하면 그냥 운전자를 죽일 뿐이고 돈이 필요하면 돈을 가진 자를 죽이려 할 뿐이다. 단, 그가 운을 인정하는 범위는 자신의 라인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만이다.


1958년, 22년을 떠돈 끝에 여기에 온거요. 그리고 지금 여기 있소....

앞면이거나 뒷면이겠지. 당신이 말해 보시오. 어서.

내가 이기면 무엇을 얻는 겁니까?

전부를 얻소. 시거가 말했다. 전부.

(p.68)



욕망의 시험양 모스


모스는 가장 평범하고 일반적인 캐릭터이다. 평범하다는 것은 그가 겪게될 난관에 비하면 너무 노멀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평범하게 살면서도 그런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갖지못하지만 갖고 싶은 것들을 탐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노멀한 욕망이지만, 그 대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자신의 수준 그 이상을 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세상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모스는 우연히 넣은 200만 달러의 돈으로 인해 인생 자체가 큰 시험에 빠진다. 운명에 대항해 보려고도 했고 그것을 피해보려고 발버둥도 친다. 하지만, 시거라는 큰 장애물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결국, 부인도 잃고 자신도 잃고 돈도 잃고, 모든 것을 읽고 그에게는 이루지 못한 욕망만이 신기루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꿈꾸는 대부분의 욕망을 이루지 못한다. 다만 거기에 대처하는 자세에서 벨처럼 멀리서 관망하며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던지, 아니면, 모스처럼 '난 내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그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의심치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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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스타일 - 지적생활인의 공감 최재천 스타일 1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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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하지 않은 과학자의 에세이


이 책은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의 에세이이다. 이 책은 그와 관련된 사람이나 개념, 또는 서적을 소재로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이야기 해 나가는 형식의 에세이다. 과학자가 쓴 글이라 그런지 전체를 꿰뚫는 주제가 일관되고, 다른 에세이에 비해 조금은 덜(?) 감성적이다. 내가 최재천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통섭(consilence)이라는 단어를 접하면서이다. 에드워드 윌슨 교수의 제자이기도 한 저자는 스승의 책을 우리나라 말로 ‘통섭'이라고 번역해 국내에 출판했다. 통섭이라는 개념은 최재천 교수를 알게 해주는 두 단어 중 하나이다. (또 하나는 아마도 ‘다윈'이겠지) 통섭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 교육의 아킬레스건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독일의 유명한 음악학교에 다니는 음악에 재주있는 아이들은 악보나 악기에 대해 배우기 전에 숲으로 간다. 그곳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주변의 사물에 눈을 뜬다. 우리라면 어떨까? 피아노 신동이라고 밝혀지는 순간 학원에 보낸다. 하루 12시간씩 피아노만 배우고 국어며 수학이며 다 빼고 연주만 하게 한다.  유도 신동은 열 두시간 유도만 하고, 피아노 신동은 열두시간 피아노만 친다. 그런 엘리트 교육이 우리나라를 외향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올려놨을 지는 모르지만, 거기에서 순위에 들지 못한 대부분의 인생을 우리 사회가 풀어야할 숙제로 남겼다. 조금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통섭은 하나의 전문분야로는 완벽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우리의 편향된 교육과 많이 닮아 있다.


통합, 융합 아닌 통섭


통섭은 하나의 학문으로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여러 학문을 모아 분석함으로써 최상의 답을 찾아낸다는 개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좀 더 다방면으로 공부하고, 다양한 자료를 모아야 하며, 여러 분야에서 전문가가 돼야 더 완벽한 답을 찾는다. 음악 공부하는 아이들이 음악만 공부하지 않고 눈을 감고 새소리, 물소리를 듣는 이유는 그런 교육 속에서만이 진정한 마에스트로가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라 할지라도 다른 분야의 지식을 배경으로 할 수 있어야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최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또 결국 진화론으로 이야기로 돌아간다. 통섭이라는 개념을 생물학 쪽에 적용 시키다 보면, 저자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인간은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최재천 교수가 만든 용어이다. 저자의 책이나 강의를 듣다보면 알게되는 사실이지만, 사실 그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알면 사랑한다'이고,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바로 ‘호모 심비우스'이다. 진화론을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학문에 대해 지식을 쌓는다는 의미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그걸 강하게 느끼는 것이 저자의 글을 볼 때이다. 


진화는 어느 한 개체가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살아남은 후의 기록이기도 하지만, 다른 종의 개체가 서로 도우며 살아 남은 증거이기도 하다. 진화는 결코 1등이 살아 남는 것이 아니다. 저자의 말처럼 ‘나는 가수다'에서 한 명만 제외하고 나머지가 살아 남듯, 진화 또한 앞선 6명의 개체가 살아 남는 것과 같다. 나머지 개체들은 서로 생존에 도움을 주며 공생하고 있으며 이런 개념이 '호모 심비우스'의 중요 개념이다. 저자는 늘 그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진화에서 살아 남은 종은 특별히 우수하다고 판명된 것이 아니라는 겸손함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하버드 대학의 유명한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교수는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

“만일 우리가 지구의 역사가 담긴 영화를 다시 돌린다고 할 때 마지막 장면에 우리 인간이 또 다시 등장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고 말한다.

인간이 생겨나 생존한 것은 다른 생명체보다 훨씬 뛰어나서도 아니고, 유난히 적응을 잘해서도 아니다. 인간은 무계획적이고 비효율적인 자연 선택 과정의 우연한 결과물일 뿐이다. (다윈지능 p.67)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 - 스티븐 제이굴드]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에세이 곳곳에 겸손함이 묻어나고 공생을 강조한다. 인간이라고 해서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다룰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며, 우리가 피해를 주게 된다면 그 영향은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라 말하고 있다. 특히 제인 구달 박사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그 느낌은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너무도 많은 악영향을 끼치며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극곰은 얼음과 얼음 사이의 거리를 측정할 줄 모른다. 예전에는 그런 걸 측정할 필요가 없었다. 얼음이 늘 그들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p.60)


호모심비우스 즉 공생하는 인간을 그가 강조하는 것은, 모든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통섭'의 개념처럼,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완벽한 공존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보여주려 했던 것은 과학자 최재천이 아니라, 인간 최재천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읽다보면 결국 자신의 발자국을 지우고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느낀다. 인간 최재천을 보여주는 일이 곧 과학자 최재천을 보여주는 일이고 그래서 더욱 진솔한 느낌이 나는 에세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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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마흔이라면 군주론 - 시대를 뛰어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 Wisdom Classic 7
김경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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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적령기

 

[군주론]은 제목이나 분위기가 주는 중압감에 비해 사실 어려운 책은 아니다. 지레 겁먹고 한 페이지도 펼쳐보지 않았다면 혹시 모를까, 한 장이라도 읽었다면 하루도 못돼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길지도 않고 크게 어렵지도 않은 책이다. 하지만 그 메시지가 강렬하고 파격적이기 때문에 지금도 수없이 되읽히면서 논란거리가 되고있다.

 

그런데 왜 저자는 하필 마흔이라면 군주론을 읽으라 했을까?

 

내가 군주론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도서관에서 학습 만화로였다. 사실 그 당시에 그 책이 유명한 지도 몰랐고 읽는 내내 고전이라 그런지 꽤 비현실적이라고만 생각했다.

 

“악행은 한꺼번에, 선행은 조금씩” 이런 말들이 써 있는 책을 보면서 그래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던 탓인지 조금 거부감이 들었었다.

"이런.. 딱 따돌림 당하기 좋은 책이네" 라는 생각이 그때 내 맘이었다.

 

대학교 때 한번 더 읽었을 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맞는 부분이 있구나" 싶었다.

 

그리고 아직 마흔은 아니지만 서른을 훌쩍 넘긴 이 때 다시 군주론을 읽으니 이제 그 뜻을 알 것도 같다.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저자도 이런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현실의 경험이 바탕이 되지 않는 인문학은 위험하지만, 특히 군주론은 더 위험하다. 같은 책을 읽고 어떤 이는 독재의 정당성을 얻었고, 어떤 이는 민주주의의 완성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내가 사회적 경험이 부족했을 때는 이 책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고, 경험은 있으나 개인적 성찰이 부족했을 때는 이 책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자 이 책은 어쩌면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고전은 책들과의 싸움에서 살아 남은 승리자들

 

서문에서 나오는 저자의 말처럼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 하는 자는 비난받는다'는 말이 마키아벨리를 한 마디로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것 같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키아벨리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비록 군주론이 메디치가에 다시 중용되기 위해 쓰여지기는 했지만, 또 한 쪽에서는 군주의 악행을 민중에게 알리는 일을 해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유야 어찌됐건 그가 책에 담은 내용은 너무도 솔직해서 '불편한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책을 버리지는 못하지만 안고 가지도 못한 채 여태껏 고전으로 간직하는 것이다.

 

고전의 가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꾸준히 읽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지만, 그 기본 원리에는 인간이 생물이라는 평범한 이유가 숨겨 있다. 생물의 일차 목표는 ‘생존'이고, 2차 목표는 ‘번식'이다. 이를 사회구성체에 적용하면 번식 대신 ‘확장'이라는 개념이 치환될 뿐 큰 뿌리는 같다. 사마천의 ‘사기'가 2500년이 읽히는 이유도, ‘군주론'이 500년이 지나도 유효한 이유도, 이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설사 마음 속에 남을 향한 칼을 숨기고 있더라도 그 칼을 보여서는 안되며, 남들이 나를 공격했다 하더라도 짐짓 점잖을 빼며 포용력 있는 척 이해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이미 비난을 감수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 논란이 되는 문장들을 끄집어 내서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 되는가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 실린 유명한 일화나 사회 저명인사의 이야기는 군주론이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는 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또 맘에 드는 것은 동양의 마키아벨리라 불리는 ‘한비'의 이야기나 사기의 고사가 적절하게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군주' 대신 '나'를 집어 넣고 읽어보자

 

저자는 크게 여섯 장으로 군주론을 분류하고 관련 문구를 인용했다. 1장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가’에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를 알려주며, 그를 위해서는 군주가 그만큼의 실력을 갖거나 그렇게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신뢰만이 최고의 가치라는 기존의 생각의 헛점을 알려주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의 생각에 부응하며 들려주는 록펠러나 노량의 이야기가 참 가슴에 와닿는다.

“군주가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기만책을 쓰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칭찬받을 만한 일인가를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경험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군주는 자신의 약속을 별로 중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을 혼동시키는 데에 능숙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의에만 입각한 군주들을 압도해왔다.”[군주론 18장]

 

2장 ‘리더를 리더답게 하는 것들’에서는 군주가 선만을 추구할 때 어떻게 파멸할 수 있는 지, 또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이야기 한다.

“완벽한 선을 추구하지 말고 악해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 속에서 파멸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키려는 군주는 악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군주론 15장]

 

3장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법’에서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두려움을 받는 것이 더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 두려움과 인센티브가 사람을 움직이는 현실적인 동력이라는 사실은 냉정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군주는 잔인하다기보다는 인자하다는 평판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런 온정도 역시 서투르게 사용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잔인한 인간으로 알려졌지만, 그의 잔인함은 로마냐의 질서를 회복하고 그 지방을 통일하여 평화와 충성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군주론 17장]

 

4장 ‘위기를 사전에 차단하는 법’에서는 지나치게 관대하기만한 군주가 위험에 처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중간하게 승리하기 보단 확실하게 기선을 잡아야 하는 것은 어느 시기 어느 위치에서든 적용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의 내용이 가장 잔인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돼있다고 생각된다.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도 못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입혀야 한다.”[군주론 3장]

 

5장 ‘경쟁에서 이기는 법’은 이제 무엇이 현실인 줄 알았으니 그것을 상대에게 적용하면서 싸움에서 이기는 법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상대를 깔보고 짓밟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상대의 전력을 미리 알고 싸움에 대처해야만 한다. 자신의 능력을 뛰어 넘는 싸움은 이겨도 남는 것은 상처 뿐이다.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구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욕망이다. 따라서 능력 있는 자가 이를 수행할 때 그는 칭찬을 받으면 받았지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능력도 없는 자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그것을 손에 넣으려 한다면 이는 잘못된 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군주론 3장]

 

마지막 장은 변화를 주도하는 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창업이 수성난'이란 말도 있듯이 새로운 과업을 이루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것을 지켜 내는 것이다.

"현명한 군주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일만이 아니고 먼 장래에 있을 분쟁까지도 배려 해야 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대처해야한다. 위험이란 미리 알면 쉽게 대책을 세울 수 있지만 코앞에 닥쳐올 때까지 그냥 보고만 있으면 그병은 악화되어 불치병이 된다."[군주론 3장]

 

‘군주론’에서 ‘군주’라는 말 대신 ‘나’를 집어 넣고 ‘백성, 신하’라는 부분에 ‘남’을 집어 넣고 읽어보면 왜 이 책이 이렇게 오랜 기간 많이 읽히는 지 이유를 알 수 있다. 세상은 분명히 더 잔인해졌고, 경쟁은 더 치열해졌으며, 약자에게 더 차가워졌다. 이 책은 군주론을 읽지 않았더라도 먼저 읽기에도 충분히 괜찮은 책이며, 군주론을 읽고 나서 읽는다면 응용 문제를 보여주는 참고서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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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20-06-2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마침 마키아벨리가 사망한지 493주년 되는 날이더군요.
저도 마침 오늘 우연찮게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올렸습니다.
한가하실 때, 한 번 구경해 보세요~~
https://youtu.be/wQWzdMKLkwU
 
다니자키 준이치로 단편집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용기 외 옮김 / 책사랑(도서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데뷔작인 '문신'은 지금은 절판이 되어서 책을 구할수가 없었다. 다행인지 올해 1월에 비록 PDF파일이지만 이북으로 출간되었다. 호평을 받았던 단편이라 그래도 분량이 꽤 될줄 알았는데, 페이지가 20페이지도 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마스무라 야스조가 1966년 동명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젊은 문신사 세이키치가 활동하던 시기는, 사람들이 그나마 '어리석음'이라는 귀한 덕을 가지고 있을 때였고 오직 아름다운 사람만이 '강자'이던 시대였다. 강자가 되기 위해 다들 아름다워지고 싶었으며, 때문에 몸에 문신을 새기는 고통 정도는 누구나 견딜 용의가 있었다. 세이키치는 문신을 새기는 동안 살의 욱신거림을 참지 못하고 신음이 격렬해질 때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그정도의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 응당 견뎌야 할 의례였으며, 그것을 감내하는 것만이 진정 '탐미적 삶'의 완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피부에 자신의 혼을 실은 문신을 새기는 것이 그의 숙원이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가마에서 삐져나와 있는 한 소녀의 발을 본다. 바로 쫓아 갔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 세이키치는 딱 오년 만에 그녀를 다시 만난다. 다시는 그 소녀를 놓치지 않겠다고 생각한 그는 그녀를 잠재우고 등에 커다란 거미 문신을 새기기 시작한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가장 많이 오버랩 되는 작품은 아무래도 한강의 '채식주의자'였다. 연작 중 두번째 '몽고반점'에서 처제의 몸에 그림을 그려 넣는 형부의 모습이 나온다. 결국 그는 예술의 완성을 꿈꾸며 처제와 관계를 갖는다. 탐미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사회적 범주에서 보자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미친짓이다. 탐미주의는 바로 이러한 도덕적 한계의 언저리에서 도착적 집착을 보인다. 그것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가 완성하느냐 못하느냐의 결과로 가름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위험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운 것은 하나 같이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의 아름다운 것들은 위태롭다. 문신을 새길 때의 고통을 견디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어떠한 아름다움도 저항을 극복하지 않고 가질 수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극악의 규율조차 짓밟고 미를 향하는 본능만이 예술의 완성에 다다를 수 있다. 


세이키치는 문신을 새기기 전 소녀에게 ' 비료(肥料)'라는 그림을 보여준다. 그 그림은 젊은 여자가 벚나무 줄기에 기대 서 있고, 그 아래에 겹겹이 남자들의 시체가 즐비한 그림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성장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은 그 발아래 무릎꿇고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수많은 탐미주의자들인 것이다. 소녀는 부들 부들 떨며 두려워 하지만, 거미의 문신이 완성되고 난 후의 그녀의 눈빛은 그 어떤 여자의 그것보다 더욱 욕망에 가득차 있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으니 소설은 조금만 핀트가 어긋나면 오해받기 딱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 없다. 사실 몽고반점도 이상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그런 역겨운 소설이라며 내던졌을 지도 모른다. 경계에 서 있는 감정들은 항상 어느쪽으로 넘어지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크게 엇갈리기 마련이다. 희한하게도 우리가 거부감을 느끼는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매번 인간의 '욕망'이다. 우리는 그것이 여과되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될 때 불편함을 느낀다. 덧붙여서 내 욕망의 방향과 조금이라도 틀어진다면 우리는 가차없이 '쓰레기'라고 규정해버리곤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인정을 받은 것은, 욕망에서 모든 부수적인 저항을 소거해 버리고 오직 '미'의 차원으로 작품을 승화시킨 업적을 인정 받아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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