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신전
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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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답을 찾을것인가


철학의 과정이 ‘나’를 찾아가는 수순이라고 한다면, 우리 외부에 절대자를 상정하는 일은 철학의 관점에서 얼마나 부질없는 짓일까. 외부의 절대적인 힘이나, 인간의 육신으로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에 이상향이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이라기보단 신학적인 느낌이 강하다. 저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 이런 생각을 접목시켜 보았다. 플라톤은 철학의 최고 목표로 ‘이데아’를 설파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늘 존재하는 이데아는, 우리가 보는 사물과 사물을 흉내 낸 또 다른 사물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 속에 이데아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되며, 그것에 따른다면 이상적인 사회는 건설될 수 있다. 


정신의 절대적인 기준을 따라 사람이 바른길로 나갈 수 있다면, 정치에서도 위대한 지도자가 우매한 대중을 바른길로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철인정치'가 자연스레 도출될 것이다. 이 결론을 확장시키면 결국 우리가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고, 생활의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절대적 기준인 '선의 이데아'가 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인 기준을 우리는 언제 찾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서 우리는 바로 '신'의 존재를 떠올릴수밖에 없다. 이렇게 접근할 때 니체가 말한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라는 말에 무릎을 치게 된다. 복잡한 논리나 성찰의 과정이 어려운 이들에게, 하나의 기준을 주고 그것에 따르라는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고 받아들여지는 데 어려움이 없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런 면에서 신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신답지 못한 신

호메로스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완성해 훗날 그리스인들의 사상의 근본에서 뿌리 깊게 밝혀 있는 지혜의 근원이다. 플라톤 또한 어린 시절부터 그의 글을 암송하고 익히며 배웠지만, 어쩐 일인지 훗날 플라톤은 시인이 사라져야할 존재라고 규정한다. 사상할 수 있는 자유를 그토록 원했던 소크라테스를 추종했던 그의 제자는, 오히려 자신들의 이야기의 반대편에 시인을 세워놓고 침묵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의 시가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폐기되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것은 '시' 자체가 바로 모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궁극의 '선의 이데아'가 존재하는데, 그것에 다다르지 못한 현실이 있는 것도 모자라서, 시인을 그것을 노래하고 있다. 이 사실을 플라톤은 견딜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플라톤은 '시인의 추방'을 주장한다. 통제되어야 할 대상인 인간의 감정이 이성적으로 통제 되지 못하고 시인들은 이를 오히려 조장하고 있다고 한다.


후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호메로스의 신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신들은 잔인하고, 감정적이며, 제 멋대로 인간을 가지고 논다. 인간은 장난감처럼 그들의 손 안에서 고통과 행복을 느낀다. 이는 사실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의 마음은 정갈한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호메로스는 놓치지 않고 표현해 냈고, 이 부분은 '선의 이데아'를 주장하는 플라톤에게 두고 두고 맘에 걸리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호메로스를 두고 이런 말을 한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겠네. 어떤 인간도 진리보다 더 존중되어서는 안 되네.

그리스를 지배하는 호메로스에 대한 질투였는지, 신의 존재를 격하시킨 그에 대한 분노였는지 알 수 없으나 호메로스에 대한 반감은 '국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신전의 대결보다 중요한 것


철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떻게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지에 대해 명료하게 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 과정은 어렵고 처절한 자신과의 싸움이 되어야 하고, 그 후에 얻어지는 전리품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본 모습이다. 그러나 모든 과정의 끝에 결국 하나의 기준이 존재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철학하는 이유를 전도하는 개념이 될 위험도 있다. 니체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의 모습이 인간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가치있는 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런 신을 부정하고 시인을 추방하고자 한 플라톤은 결국 인간으로서의 고뇌가 아닌, 도덕적 완성만을 위해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을 때 즘이면 저자는 어쩐지 플라톤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것처럼 보인다. 책의 중간 중간 그가 플라톤 철학의 맹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은 호메로스를 죽인 플라톤에 대한 반감처럼 느껴진다. 니체 또한 호메로스를 죽인 플라톤에 대해 반발하며 그를 부정했듯이 저자에게도 그런면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을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한 시대의 진리였던 호메로스를 죽이고 새로운 철학을 세운 플라톤, 그리고 그를 부정한 니체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저자에게도 해당되고 우리에게도 진행형인 이야기다. 저자가 플라톤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듯 우리중 누군다도 저자의 생각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진짜 철학은 생겨나는 것이다. 이 책이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고 누군가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읽히기를 저자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시와 철학, 인간과 영혼의 이분법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닌, 건전한 비판과 열린 토론이 자유스러운 우리 시대를 꿈꾸는 책이다. 그것이 비록 우리가 더 잘살기 위한 수단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철학은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 말은 곧 우리가 잘 살게 되었다는 의미가, 우리가 우리의 삶에 한발짝 더 다가가 해결책을 찾게 되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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