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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의 여왕 - 제2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평점 :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다. 마주보고 이야기 하고 있는 사람에서, 눈앞에 있는 사물에서 초점이 흩어지고 멀리 보이는 배경이 선명해지는 순간. 그 순간, 어떤이는 떠나고, 어떤이는 남는다. 그들을 떠나게 하는 마법은 선명한 것을 따르려는 본능보다 더 강한 광기이다. 오직 보이는 것은 그것 뿐이니 그들은 결국 떠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허파에 바람이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번 터진 웃음이 멈추지 않듯이, 한 번 궤도를 벗어나면 멈추지 못하는 방황을 반복하는 것이다. 디즈니랜드의 반짝이는 회전목마를 보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었다는 할아버지의 유전병처럼, 아버지는 이트륨이라는 희귀한 금속에 빠져 허파에 바람이 들고 만다. 초점이 먼곳을 향하면 주변의 사물이 흐려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 아버지는 물려받은 고물상에 관심이 사라지고 대신 희귀 금속을 추출해 내는 거대한 기계에 빠져든다. 그리고 그의 딸 해미는 아버지가 버려둔 고물상과 유품정리의 바통을 쥐고 이어 달린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삶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쓸모 없는 것들에서 가치를 찾아내는 삶, 사라진 것들에서 관계를 복원하는 삶. 모든 것을 소각하면서도 그것의 가치를 마지막으로 '되물어주는' 삶이다. 고물상이 세상에 버려진 모든 것들에서 남아있는 가치를 찾아내 값어치를 매기는 작업이라면, 유품정리를 하는 해미의 일은 주인이 사라져버린 사물에 세상과의 관계를 복원시키거나 사라지게 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삶이 생태계라면 폐기물을 분리해서 다시 복원시키는 작업은 '분해자'의 역할이다. 분해자는 유기물의 시체나 배출물에서 에너지를 끌어 쓰고, 유기화합물을 무기물로 바꿔준다. 이들은 다시 유기물에게 소비되어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결국 '흩어지는' 과정이다. 사물의 부분을 구성했던 과거에 얽매인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소멸되고 말것이지만, 각각의 개체로 분리된다면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
때문에 그들에게 '집합'은 의미가 없다. 오직 개체로서 존재해야만 가치를 인정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귀금속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파지는 파지대로, 병은 병대로, 그리고 인간은 인간 자체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고유의 본질을 놓친 사물은 영원히 사라지는 수밖에 없다.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 반복될 수록 개체성은 더 확고해지고, 어디에 속해 있는 것으로서가 아닌 오직 그 자체로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소각의 여왕'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면서도 우리에게 사물의 의미를 되묻는 희한한 이야기인 이유가 여기 있다.
눈 앞에 있는 것들의 의미를 찾는 일은 도무지 어렵기 때문에, 소각하는 과정은 그 공백을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절차가 된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사라지면 그들은 의미 없는 존재가 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과정에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의미를 각인시킨다. 유일하고 특별한 사물로서 인정 받던 순간에서 주인의 부재로 인해 쓸모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 순간이 모든 사물의 전부의 순간이다. 인간의 경우라면 다른 것들과 섞여 있을 때 개인의 꿈이란 희미해지는 것이고, 개별적 자아가 될 때 이상이 가까워 오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환상의 영역에서 돌아오기에 그들은 너무 거친 삶을 살고 있었다.
펠릭스가 고통을 겪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그런 상태로 코마에 들어갔다간, 고통에 찬 육신으로 돌아오기보다 빛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염려가 있었다. (타나토노트, p.21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에는 위 장면이 나온다. 처음으로 영계 탐사를 앞두고 있는 펠릭스가 살을 파고든 발톱 때문에 영혼계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 뤼생데르의 생각이다. 현실을 벗어난 이가 현실로 돌아오기 싫은 때는 현실에 지독한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 때이다. 결국 그녀의 아버지 지창씨는 허파에 든 바람을 꺼뜨리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그녀가 그의 죽음 앞에서도 크게 울지 않은 것은 그가 좇았던 꿈과 돌아오지 못하는 현실의 간극에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음을 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허파에는 금새 바람이 들었다가도 꺼져버리곤 하지만, 언젠가 또 그의 아버지처럼 바람든 가슴으로 훌쩍 떠나버릴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삶이란 가슴 모퉁이에 비현실적인 꿈을 하나 안고 살다가 한 번쯤 날아가 버리거나 혹은 끝내 못하거나,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