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 지음, 임희선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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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풍기는 분위기가 무척 유치해보인데다 (걸~!이래니 말이지...), 일본 작가의 작품인 것을 보고 떠오른 이미지는 교복입고 발랄하게 신주꾸 거리를 활보하는 뻐드렁니 여고생들이었다. 그런데 읽으면서 보니, 의외다. 오히려 30대 초, 중반의 여자들 얘기다.


띠동갑, 히로, 걸, 아파트, 워킹맘이란 다섯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작품집인데, 하나 같이 주인공은 비슷한 스타일이다. 즉 실제 인체 나이는 걸(여자애~!)이 아닌데, 결혼할 나이를 훌쩍 넘기고도 싱글로 사는 여자들인 것이다. 워킹맘에서는 주인공이 아이가 하나 있는 이혼녀지만 요즘 말로 ‘돌아온 싱글’이라고 하지 않던가. 일본도 점점 나이 들어서도 결혼 안하고 사는 싱글여자가 많아지는 추세인가.


이야기는 무척 상쾌, 유쾌, 발랄하다. 여자 혼자 살다보면 가끔 좀 우울해지고 걱정거리도 있는 법이지만, 그래도 여기 걸들은 모두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세상을 산다. 신체 나이는 걸을 훨씬 지났지만 마음은 여전히 걸인 채로 말이다. 그녀들의 고민은 일, 로맨스 그리고 외모의 변화에 따른 세상과의 관계이다.


띠동갑에선 말 그대로 띠동갑인 꽃미남 연하가 후배로 들어오자 마음이 설레는 싱글여자의 이야기다. 꽃미남 후배를 보면서 그리고 그 주변을 맴도는 수많은 실제 걸들을 보면서 마음만 걸인 싱글여자의 심리는 묘하다. (->띠동갑) 제일 바라는 건, “시간이 멈춰줬으면” 하는 것이다. 나이 더 많은 남자의 상사로 부임한 능력 있는 싱글여자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능력보다는 싱글여자로서 겪게 되는 많은 부당함과 불합리함을 부딪치며 이겨나가려고 노력한다. (->히로) 또 같은 여자들끼리도 눈살을 찌푸리는 마음만 걸이 있다. 나이에 맞게, 또는 더 고상하게 사는 여자들의 눈총을 받을 정도로 옷차림이나 태도가 심하게 걸인 30대 후반의 여자도 있는 것이다. (->걸) 또 혼자 그럭저럭 인생을 즐기며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친구가 아파트를 장만한다. 그에 적지 않은 충격과 자극을 받아 자신도 아파트를 구입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실적인 문제, 또 그에 따른 자신의 마음가짐 등을 다루었다. (->아파트) 마지막 단편에서는 아이와 일 사이에서 절대로 밀리고 싶지 않은 이혼녀이다. ‘육아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싶지 않으면서도 아이한테 투자해야할 일요일엔 일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심정이나, 그녀를 생각해 일부러 저녁 회식을 피하는 동료들도 있다. (->워킹맘)


사실 어떻게 보면 나도 같은 처지다. 그래서 책이 더 재밌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부분, 공감이 되었으니까.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어쩌다 로맨스 분위기라도 가게 되면, 대부분의 남자들이 연하다. 또 혹시나 평생 혼자 살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파트라도 한 채 분양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현상유지, 약간 절약, 사치는 금물’ 중에서 내가 실천하는 건, ‘사치는 금물’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난 나 자신이 걸이고 싶어서 이렇게 사는 건 아니다. 남들처럼 싱글을 즐기기 위한 독신주의자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어느 새 노처녀 반열에 들어섰고, 또 그러다 보니 사람 만날 기회도 적어졌고, 그렇다고 억지로 사람을 찾고 싶지도 않은 그런 상황이다. 하지만 혼자 사는데 불편한 것도 없다. 세상의 태클이 좀 많이 들어오긴 하지만 혼자서도 나름 신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산다. 주변에도 그럭저럭 재밌게 싱글로 잘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다. 늘 미래에도 혼자라는 불안한 마음이 있지만, 결혼을 했건, 노처녀 싱글이건 여자라면 누구나 마음속에 외모나 신체나이와는 상관없이 걸이고 싶은 마음이 있게 마련 아닌가. 남이 뭐라건 무슨 상관인가. ‘내가 좋아하는 나’로 편하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된 거 아닌가. 쿨~하게 살면 되는 것이다. 유키코처럼.


“평생 여자애. 아마 자기도 그 길을 가게 되겠구나 하고 유키코는 생각했다. 앞으로 결혼을 해도, 그리고 아이를 낳아도. 그렇게 살건 말건 내 마음이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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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7-01-15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해 놓은 책인데 괜찮았나보네요?^^

진달래 2007-01-15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읽었는데, 가볍지만은 않았어요. 공감가는 얘기가 많아서 좋았구요. ^^
30대의 얘기고 또 한국 현실하고도 많이 비슷했구요...
 
나의 프로방스
피터 메일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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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다녀온 프로방스 얘기라 선뜻 관심이 갔다. 더구나 예쁜 표지와 안의 정다운 그림들... 내게 프로방스는 꽃들이 만발하고 자연이 풍부한 지방이었다. 물론 1년 내내 또는 계절마다 그런 게 아니란 걸 뼈저리게 느끼고 왔지만...


하지만 이 책은 여행기가 아니다. 휴가 때마다 자주 프로방스를 다녀본 한 영국 사람이 프로방스에 집을 사서 그걸 수리하고 꾸미는 과정에서 1년 동안 벌어진 자신의 생활에 대한 이야기였다. 물론 아기자기하면서도 프로방스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프랑스, 그것도 특이하기로 소문난 프로방스 사람들에, 그 지방에 대한 영국 사람의 시선이라 딴에는 개인적인 경험을 보편적으로 승화하려는 시도 때문에 좀 거슬리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건 어쩌다 잠시 눈에 뜨인 잡초였을 뿐, 전체적으로 따스하고 정겨운 시선이 프로방스의 산과 들에 아름다운 야생화로 피어 퍼져있었다. 1월부터 12월까지 그들은 단지 잠깐 흥분한 관광객이 아니라 정말 온 마음을 다해 프로방스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았던 듯 보였다. 자연만 아름다운 프로방스에 가서 자기들 식대로 살면서 그 자연을 만끽했던 게 아니라, 프로방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생활을 했던 것이다.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그런 마음가짐이 한편 부러웠고 또 한편 그런 마음의 여유가 내게도 전이되었다.


늘상 바쁘고 여기저기 치이고 지하철에 낑겨다니고 말대답 한 번 시원하게 못하면서 가늘고 길게 머니를 벌어야 하는 직장 인생에 한 줄기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나 할까. 프랑스의 프로방스는 꼭 아니더라도 나중에 무슨 일이 있어도 시골 가서 살리라 다짐을 하게 하는... 그런 용기를 준 책이다. 용기백배~! 사기충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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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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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작은 나무는 인디언인 체로키 족의 피가 섞인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산 속에서 살게 된다. 과묵하지만 따스한 시선으로, 말없는 한 번의 쓰다듬으로 작은 나무는 그렇게 자연 속에서 개들과 함께 커나간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대단한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지만, 작은 나무에게 생활을 보여주고 함께 더불어 살면서 자연을 가르친다. 더 없는 가족 간의 사랑에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이 쓰는 말이 줄어들면 그만큼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도 줄어들 거라는 게 할아버지의 지론이셨다. (...) 할아버지는 말의 뜻보다는 소리, 즉 말투를 더 마음에 새겨들으셨다.>


작은 나무는 인디언의 피가 아주 조금 섞였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인디언 식으로 먹고 생활하고 그 방식대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수많은 동족들이 백인들의 총칼 앞에 쓰러지고, 더 먼 곳으로 쫓겨나거나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살 수밖에 없는 부당함에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자신들의 방식대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대신, <지난 일을 모르면 앞일도 잘 해낼 수 없다>며 인디언 종족에 대한 옛날 일들에 대한 얘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영혼의 마음’이었다. 그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져 상대를 이해하는 데 마음을 쓰지만 평생 욕심 부리면서 살아온 사람은 죽고 나면 밤톨만한 영혼만 남아 다시 태어나도 세상의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가들의 속셈을 꿰뚫는 인디언들의 조롱과 유머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고 불법(!)으로 산속에서 몰래 위스키를 제조하며 조마조마한 순간을 넘길 때는 함께 그 스릴을 즐기고 ‘정의의 불법’을 지킨다. 또한 인디언의 삶의 방식은 동물들이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아 기를 동안은 사냥을 하지 않음은 물론, 절대 취미삼아 낚시를 하거나 짐승을 사냥하지도 않는 것이다. 오직 먹기 위해서만 동물을 잡는다. 즐기기 위해서 사냥을 하거나 쌓아두기 위해서 더 많은 짐승을 잡지 않는 것이 인디언의 현명함이다. 


사람 좋자고 만든 제도로 오히려 사랑하는 가족을 떼어놓는 것은 모두 물론이고 가족인데도 법을 위한 법 앞에선 꼼짝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고아원엔 사랑 대신 무관심과 벌 그리고 매가 판을 친다. 그에 반해,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마음속에 사랑의 불씨를 간직한 인디언 이웃 할아버지는 작은 나무를 고아원에서 구하기 위해 위험도 무릅쓴다. 그 사랑의 불씨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배려인 것이다. 또한 그들의 사랑은 이해로 충분하다.


인디언 할아버지, 할머니의 교육은 교육을 위한 교육이 아니다. 그들은 작은 나무에게 지식도 지혜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자연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인디언들의 생활방식이 가끔은 미신적으로 보일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자손 대대로 그들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온 모습이다. 순진해보이기까지 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은 결국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나무가 홀로 우뚝 설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오히려 작은 나무는 자신에게 남은 개들까지도 보살피는 사랑의 대물림까지 실천한다고 하겠다. <할아버지는, 남에게 무언가를 그냥 주기보다는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훨씬 좋은 일이다, 받는 사람이 제힘으로 만드는 법을 배우면 필요할 때마다 만들면 되지만, 뭔가를 주기만 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평생 동안 남이 주는 것을 받기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인격이 없어지고 자신의 인격을 도둑질당하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식으로 하면 그 사람에게 친절한 것이 도리어 불친절한 것이 되고 만다고 하셨다.>


그들의 사랑에는 슬픔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작은 나무야, 늑대별 알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보이는 별 말이야. 어디에 있든지간에 저녁 어둠이 깔릴 무렵이면 꼭 그 별을 쳐다보도록 해라. 할아버지와 나도 그 별을 볼 테니까. 잊어버리지 마라.” 백인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로 인해 억지로 생이별을 하는 순간에 할머니가 작은 나무에게 하는 말이었고 작은 나무는 한 번도 그걸 잊지 않았다.


둑음도 그들을 갈라놓지는 못했다. 웃으면서 자연으로 돌아가고 또 다시 만날 것이었으므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보다 더 아름다운 둑음의 인사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이번 삶도 나쁘지는 않았어. 작은 나무야, 다음번에는 더 좋아질 거야. 또 만나자.”라고 하셨고 할머니는 목에 편지를 꽂고 오두막 앞에 앉아계셨다. “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다 잘될 거다. 할머니가.”


읽는 내내 미소를 짓거나 웃었고, 다 읽어갈 즈음에는 작은 나무도 의연히 대처하는데, 난 슬픔을 주체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슬픔은 감동의 눈물이었다. 마음속까지 젖어드는 따스한 감동... 이 겨울이 포근한 눈에 감싸이듯이 내 영혼도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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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파더 스텝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1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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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본 소설은 읽으면 복잡하지 않아서 좋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기만 하면 되니 너무 편하다. 적당히 재밌고 적당히 자극적이고 적당히 읽을 만하다. 간혹은 너무 기괴한 소설도 있어서 기가 막힐 적도 있지만,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현대물은 유쾌하고 즐겁다.

<스텝파더 스텝>도 비슷하다. 아주 쿨한 얘기이다. 서른다섯 살 노총각 프로도둑이 도둑질하러 들어가다 번개를 맞고 옆집 지붕으로 떨어졌다 깨어나 보니 쌍둥이가 부모가 각자 애인하고 떠나버렸다며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한다. 어떻게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각자의 애인과 떠나지? 게다가 엄마는 아빠가 아이들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빠는 엄마가 아이들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게 말이 되나? 따지고 보면 좀 웃기는 얘기지만, 따지지 말자. 설정이 그러니 그런가보다고 넘어가주자. 그러고 나면 얘기는 정말 정신없이 재밌어진다.


하지만 이 책의 매력은 사실 다른 데 있다. 무지막지 조숙한 쌍둥이와 그런 쌍둥이한테 말려들어 ‘아버지’ 소리가 처음엔 싫지만 나중엔 안 들으면 허전할 정도가 되는 나이보다 유치한 노총각이 함께하는 추리적 감각 때문이다. 대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곳, 근방,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로 인해 노총각 도둑은 아이들과 함께 추리를 하고 사건을 해결한다. 아이들 앞에선 나이보다 유치한 총각이지만,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가끔은 너무 쉽게, 가끔은 또 쫌 황당하게 해결이 나기도 해서 추리치고는 비논리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설명을 들으면 정말 그럴듯하긴 하다.


대여섯 개의 에피소드가 그렇게 즐겁게, 쿨하게 흘러가다 마지막에 쌍둥이 유괴사건이(그것도 또 동시에~!) 일어나고 해결이 되는 건 좀 정말 오바스럽다 싶지만, 밉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사이에도 부재하기 쉬운 애정 관계, 가족 관계를 가족도 아닌 더구나, 사회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정의된 프로도둑이 이루고 있지 않은가. 부모도 자기들 애정이 더 우선시되는 현대에서 혈연적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노총각과 쌍둥이 아이들의 관계, 그들이 구축해가는 건 인간 사이의 신뢰이며 애정인 것이다. 혹시나 쌍둥이의 부모가 돌아오면 쌍둥이들에게 자신도 모르게 애정을 쏟던 자신은 황이 될 것을 예상해서 미리 그 애정을 동결시키려다 노총각은 마음을 돌린다.


“쌍둥이의 부모 또한 철저히 에고를 관철시키면서 집으로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인간이 돌아올 거라고 상정해서 쌍둥이와 다투고 마음까지 상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지 말자. 서로 외로운 인간끼리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닌가.”


그렇다. 세상은 즐겁게 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이 매력적이다. 유쾌하고 쿨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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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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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라고 하는데 난 그녀의 책을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 한 권으로 그녀에게 푹 빠졌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 다시 확 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에세이는 그녀의 진솔한 고백이며 그녀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며 그에 대한 분석으로 소설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책을 구입한 건, 예전에 정군이 쓴 리뷰를 보고나서였다. 그러고나선 곧 잊었다. 소설만 주로 읽는 주인에게 잊힌 내 책장의 많은 다른 종류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이번에 롤러님의 리뷰를 보고 나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아마 개정판도 나오고 새로운 책도 나온 모양이라 더 늦췄다간 아예 못 읽겠구나 싶어서였다.

더 늦지 않길 정말 잘했다.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땐 막연히, 아... 여행얘기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했다. 하지만 읽을수록 그 맛이... 전체적으로는 약간 씁쓸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성격대로, 모습대로 담백한 맛이 났다. 아주 단맛도, 아주 쓴맛도 아닌 인생사, 세상사의 맛 그대로가 이 책에 살아나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책은 심리 분석서이다. 여행을 하면서, 지나치는 풍경과 함께 과거의 역사가 함께 살아나오고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도 끄집어내고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심정들, 현재의 느낌들까지 모두 어우르면서 심리적으로 분석해냈다. 심리분석자가 전문적으로 분석한 심리학책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을 받았던 경험까지 포함해 그녀의 치부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까지 모두 탁자위에 꺼내놓고 독자들과 함께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에 나 자신도 동일시되었다. 때론 함께 깨닫고, 때론 함께 느끼면서, 또 반성도 하면서 말이다. 많은 부분이 나와 닮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내가 세상을 살면서 엄청 엎어지고 깨지면서 배운 많은 것들이 그녀의 붓 아래 그려져 있었다.

세상을 살면서 인간이 느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많은 부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전문적인 심리학자의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서, 또 나와 함께 호흡하고 동일한 문화, 동일한 시대를 산 것이라 공감하기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여행은 세계를 바라보고 새로운 풍경이나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던 것 같다. 여행을 통해서 다른 많은 문화와 역사를 접하면서 그녀는 그 세상에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소설도 아닌 책을 이렇게 집중하면서, 공감하면서 읽기도 어려울 듯싶다. 그만큼 이 책의 솔직담백한 맛이 좋았다.

사실 사랑의 <대상선택>에 있어 일찍 결혼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의존적 대상선택형’과 늦게 결혼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자기애적 대상선택형’으로 나누는 것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은 해도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의식이나, 불안, 우울, 공포, 투사, 분리 등등에 대한 많은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정도는 ‘나’도 갖고 있는 특성들이고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이지만, 사람들은 많은 부분, 세상을 살고 사람들과 엮이면서 어느 정도 자연치유 과정을 거치며 나름대로의 생존법을 터득해나간다고 믿는다. 그게 되지 않을 경우엔 말 그대로 정신 치료 과정을 거치거나, 아니면 자살이나 스토커라는 비이성적 극단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자기 일을 미루거나 매사에 소극적으로 행동하기,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기, 타인과 세상을 의심하기,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앉아 있기, 높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많이 하기, 습관적으로 불평 불만 늘어놓기, 짜증스럽고 신경질적인 말투로 이야기하기, 타인의 말에 말꼬리 달기...> 이것은 어떤 심리상태에서 나타나는 행동 같은가. 이런 것은 분노가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한다. 내면에 억압된 분노가 이렇게 나타난다. 작가는 많은 일상사의 예를 통해 많은 해답을 준다. 우울증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은 경험이라든가, 콤플렉스나 병리적 자기애를 어떻게 건강한 자기애로 발전시키는가, 또는 자기 존중감을 터득하는 법도 알려준다.

<생이 안정되면...>, 이 말은 작가가 고백한 자기 생에 대한 말이었다. 치열하게 세상에 뛰어들어 삶을 사는 대신, 어딘가에 자신의 진정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내게도 이런 습성이 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 식물을 기르거나 누구를 만나는 것을 막연히 꺼렸다. 누가 100프로 책임을 지고 부담하라는 것도 아닌데, 내 내면에 책임지기 싫고 부담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녀의 치료와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통해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또 내가 스스로 치유를 터득해가기 시작한 과정이 더 빨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된다.

김형경, 몸집도 작고 여린데다 순해 보이기만 하는 그녀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크다. 이 책을 읽고 누구나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대하고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인간과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삶의 태도에도 변화가 왔다. 유아적 환상에 가득 차 있던 내면 세계에서 빠져 나와 비로소 객관적 실체로서의 외부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 같았다. 타인의 사랑을 구걸하는 대신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타인을 돌보는 것으로 나의 가치를 삼는 이타주의 방어기제를 포기했다. 외부의 인정과 지지를 구하는 대신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훈련도 했다. 남의 말이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타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은 전적으로 그들 내면에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인간은 타인의 언행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존엄성을 타고난 존재라 믿게 되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정서의 여러 층위들을 더 세밀하게 느끼고 수용하면서도 건강한 자기 중심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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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1-26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리뷰 보고 따라왔어요. 제가 꼭 읽어야할 책 같아요.
소개 고맙습니다.^^

진달래 2007-01-26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무척 좋았는데, 친구들은 글이 전반적으로 우울하다고 별로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 전 김형경이 심리 분석 전문가가 아니어서 오히려 더 좋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진솔한 경험이요... <천개의 공감>도 읽으러 가야죠, 이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