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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형경, 소설가라고 하는데 난 그녀의 책을 아직 한 권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 한 권으로 그녀에게 푹 빠졌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 다시 확 깰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에세이는 그녀의 진솔한 고백이며 그녀의 세상에 대한 시선이며 그에 대한 분석으로 소설과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이 책을 구입한 건, 예전에 정군이 쓴 리뷰를 보고나서였다. 그러고나선 곧 잊었다. 소설만 주로 읽는 주인에게 잊힌 내 책장의 많은 다른 종류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이번에 롤러님의 리뷰를 보고 나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아마 개정판도 나오고 새로운 책도 나온 모양이라 더 늦췄다간 아예 못 읽겠구나 싶어서였다.
더 늦지 않길 정말 잘했다.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땐 막연히, 아... 여행얘기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했다. 하지만 읽을수록 그 맛이... 전체적으로는 약간 씁쓸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성격대로, 모습대로 담백한 맛이 났다. 아주 단맛도, 아주 쓴맛도 아닌 인생사, 세상사의 맛 그대로가 이 책에 살아나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책은 심리 분석서이다. 여행을 하면서, 지나치는 풍경과 함께 과거의 역사가 함께 살아나오고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도 끄집어내고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심정들, 현재의 느낌들까지 모두 어우르면서 심리적으로 분석해냈다. 심리분석자가 전문적으로 분석한 심리학책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을 받았던 경험까지 포함해 그녀의 치부까지, 자신이 겪었던 일들까지 모두 탁자위에 꺼내놓고 독자들과 함께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에 나 자신도 동일시되었다. 때론 함께 깨닫고, 때론 함께 느끼면서, 또 반성도 하면서 말이다. 많은 부분이 나와 닮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내가 세상을 살면서 엄청 엎어지고 깨지면서 배운 많은 것들이 그녀의 붓 아래 그려져 있었다.
세상을 살면서 인간이 느낄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많은 부분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 전문적인 심리학자의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서, 또 나와 함께 호흡하고 동일한 문화, 동일한 시대를 산 것이라 공감하기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여행은 세계를 바라보고 새로운 풍경이나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었던 것 같다. 여행을 통해서 다른 많은 문화와 역사를 접하면서 그녀는 그 세상에서 자신을 객관화하는 법을 배운 것 같다. 소설도 아닌 책을 이렇게 집중하면서, 공감하면서 읽기도 어려울 듯싶다. 그만큼 이 책의 솔직담백한 맛이 좋았다.
사실 사랑의 <대상선택>에 있어 일찍 결혼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의존적 대상선택형’과 늦게 결혼하는 사람들의 성향을 ‘자기애적 대상선택형’으로 나누는 것 같은 이분법적 사고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은 해도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의식이나, 불안, 우울, 공포, 투사, 분리 등등에 대한 많은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정도는 ‘나’도 갖고 있는 특성들이고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이지만, 사람들은 많은 부분, 세상을 살고 사람들과 엮이면서 어느 정도 자연치유 과정을 거치며 나름대로의 생존법을 터득해나간다고 믿는다. 그게 되지 않을 경우엔 말 그대로 정신 치료 과정을 거치거나, 아니면 자살이나 스토커라는 비이성적 극단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자기 일을 미루거나 매사에 소극적으로 행동하기, 사람들을 피해 혼자 있기, 타인과 세상을 의심하기,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앉아 있기, 높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많이 하기, 습관적으로 불평 불만 늘어놓기, 짜증스럽고 신경질적인 말투로 이야기하기, 타인의 말에 말꼬리 달기...> 이것은 어떤 심리상태에서 나타나는 행동 같은가. 이런 것은 분노가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한다. 내면에 억압된 분노가 이렇게 나타난다. 작가는 많은 일상사의 예를 통해 많은 해답을 준다. 우울증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은 경험이라든가, 콤플렉스나 병리적 자기애를 어떻게 건강한 자기애로 발전시키는가, 또는 자기 존중감을 터득하는 법도 알려준다.
<생이 안정되면...>, 이 말은 작가가 고백한 자기 생에 대한 말이었다. 치열하게 세상에 뛰어들어 삶을 사는 대신, 어딘가에 자신의 진정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막연한 착각이었던 것이다. 내게도 이런 습성이 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 식물을 기르거나 누구를 만나는 것을 막연히 꺼렸다. 누가 100프로 책임을 지고 부담하라는 것도 아닌데, 내 내면에 책임지기 싫고 부담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그녀의 치료와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을 통해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또 내가 스스로 치유를 터득해가기 시작한 과정이 더 빨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된다.
김형경, 몸집도 작고 여린데다 순해 보이기만 하는 그녀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는 크다. 이 책을 읽고 누구나 이런 생각으로 세상을 대하고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인간과 세상을 보는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삶의 태도에도 변화가 왔다. 유아적 환상에 가득 차 있던 내면 세계에서 빠져 나와 비로소 객관적 실체로서의 외부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 같았다. 타인의 사랑을 구걸하는 대신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타인을 돌보는 것으로 나의 가치를 삼는 이타주의 방어기제를 포기했다. 외부의 인정과 지지를 구하는 대신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훈련도 했다. 남의 말이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타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은 전적으로 그들 내면에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인간은 타인의 언행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존엄성을 타고난 존재라 믿게 되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과 정서의 여러 층위들을 더 세밀하게 느끼고 수용하면서도 건강한 자기 중심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