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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여자 - 외국문학 5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고백하자면, 난 이 책을 꺄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여자>랑 착각했었다. 아... 제목이 비슷하잖냐구... 또 둘 다 책에 관련된 이야기다 보니... 그런데 우연히 내 눈에 띈 이 책은 저자가 남자였다. 레몽 장... 프랑스 남불 지방의 대학 교수에다 김화영 교수의 선생이라지 뭔가. 사실 말이지... 난 일본 작품을 보거나 중국 작품을 보면 한참 동안 주인공이 그리고 다른 인물들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저자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지. 그런데 서양 사람들 이름은 구별하기가 나름 쉽다. 꺄롤린은 여자 이름이고 레몽은 남자 이름이니까.
각설하고,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분위기가 묘한 매력이 있었다. <밑줄 긋는 여자>에서의 젊은 여자의 상큼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와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다행히 이 책의 주인공도 여자였다. 연극을 했었고 목소리가 유난히 아름다운 한 여자가, 친구의 권유로 신문에 “책을 읽어주겠다”고 광고를 낸다. 그 신문광고라는 것이 아마 우리가 요즘 많이 보는 “벼룩시장”에 나오는 광고 같은 것일 게다. 예전에 그 광고를 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 중에서 제일 재밌는 광고들은 단연 남자가 여자를 찾고 여자가 남자를 찾는 그런 광고였다. 영어를 배울 때도 그런 걸 갖고 학원 같은 데서 공부를 하지 않던가.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처음 그런 광고를 대했고, 나중에는 재미로 보곤 했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광고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꾼”도 있고 유난히 “순진한” 사람도 있다. 그녀가 광고를 내려할 때, 그 광고주의 태도만 봐도 알 수 있다.
광고 덕분에 그녀는 육체적인 장애를 가진 한 남자애한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퇴락한 백작부인, 깜찍한 어린 여자애, 어떤 젊은 사장 그리고 퇴직한 판사까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책을 읽어달라는 제안을 받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다. 일이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에서의 성공이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그녀의 삶의 방식과 그녀가 타인들과 맺어가는 관계이다. 어린 남자애는 그녀보고 치마를 걷어 올리고 책을 읽으라 하고 백작부인은 그녀와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시위에 참여하길 원하고 젊은 사장은 그녀의 몸을 탐하려고 하고... 결국은 판사가 저 유명한 사드의 작품을 읽으라는 데까지 이른다...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철저한 직업 정신이다. 젊은 사장과 침대에서 뒹굴 때도 책을 읽으려는 그녀를 보면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특이한 것은 그녀가 결혼을 했고 남편이 이런 사실을 묵과한다는데 있다. 김유정의 <소나기>에 나오는 부부의 관계가 아니다. 남편은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많고, 정말 쿨한 사이다. 또한 대학도 다니다 만 그녀는 정기적으로 교수를 찾아가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자신의 배꼽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 가운데 있지 않고 약간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빼고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라고 말하면서 “좋은 독서사”처럼 보이려고 안경까지 착용하는 수고를 한다. 독자와 텍스트와의 관계를 생각해 교수의 자문을 구하고 미리 집에서 낭독을 해보는 등의 노력을 기울인다. 겉으로 들이는 노력만큼이나 특이한 것이 그녀의 수용 태도이다. 마치 독서와 관련된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태도... 그것이 마치 사회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은 “책 읽어주는 사람”이 갖춰야 할 직업 정신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지극히 진지하다. 자신의 매력도 모르는 모양이다. 어린 남자애뿐만 아니라 교수, 젊은 사장의 태도로 볼 때, 그녀의 매력을 그녀만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녀의 직업적인 정신이 어느 정도냐면, 책이 단지 핑계일 뿐인 젊은 사장이 껴안으려고 달려들 때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나에게 달려들어 꽉 잡으면서 또다시 껴안고 입술을 더듬는다. 나는 슬쩍 피하여 몸을 빼낸다. 그는 극도로 약이 올라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다. 당신은 그렇지만 <책 읽어주는 여자>만은 아니지 않아요?...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본다. 아니, 왜 아녜요? 난 <책 읽어주는 여자>예요. 그는 팔을 축 늘어뜨린다(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좋아요. 그러면 읽으세요.”
<책 읽어주는 여자>란 신종 직업은 사회의 안전을 위협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보여 형사도 끼어드는 상황에 이르지만 결국은 퇴직한 판사와의 관계에서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그리고 여자는 결정을 한다. “직업의식에도 한계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조차도 특이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여자가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내고 그 직업에 대한 목적의식, 시행하는 방법 그리고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또 그에 따른 직업의식까지 사고하며 어떤 결론에 이른 방식이 특이했다. 책 뒤에 저자와 김화영 교수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읽고 나면 좀 더 이해가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읽지 않았다. 그냥 내 느낌으로 책을 받아들이고 싶어서. 짧은 책에 감상문이 길었다. 생각해 볼 문제성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또 다른 한편, 그만큼 흥미로운 대목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작품 가운데 주목할 작품이 많다. 모파상, 보들레르, 클로드 시몽, 조르주 페렉, 사드 등등... (지금까지 사드의 작품을 하나 밖에 못 읽어봤지만, 여기에 잠깐 인용되는 부분은 아주 충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