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샘깊은 오늘고전 3
허난설헌 지음, 이경혜 엮음, 윤석남.윤기언 그림 / 알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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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의 누이로 많은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는 사실만 알고 있던 허난설헌의 아름다운 글을 설명과 그리고 그림과 함께 직접 접해볼 수 있는 책이 바로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이다.

허난설헌의 시를 다듬어 쓰면서 ‘이 땅에 들러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할 정도로 허난설헌을 사랑하는 이경혜라는 분이 청소년을 위해 허난설헌의 시를 쉽게 풀이해 내 놓은 것이다. 그 애정이 어른 독자인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아름답고 고운 작품집이 되었다. 쉽게 풀이해놓아 그냥 읽어도 되지만, 풀이가 없었더라면 그저 지나쳤을 것을 애정 어린 풀이로 다시 한 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부하던 남편과도 떨어져 지내고 아이들마저 앞세운 인물, 허난설헌은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붉은 연꽃처럼 져버렸다. 똑똑한 여성들이 배척받던 시절에 허난설헌은 많은 시를 남겼다. 세상을 뜨기 전에 모두 없애라고 해서 주옥같은 수많은 시들이 사라졌지만 남아 있던 시들을 정리해 펴내서 중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을 잃고 통곡하다>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아끼고 아끼던 아들마저 잃었다.
쓰라리고 쓰라린 광릉 땅에
두 무덤이 마주 보며 서 있구나.
사시나무는 쏴아쏴아
바람에 흔들리고
소나무 가래나무 사이로
도깨비불이 번쩍이는데
지전으로 너의 혼을 부르고
맑은 물을 너의 무덤에 붓노라.
그래, 알겠다,
밤마다 너희 오누이 함께 어울려 놀겠지.
내 비록 배 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어찌 잘 클 거라고 바랄 수 있겠니.
애끓는 노래를 하염없이 부르노니
피 토하는 슬픔에 목이 메는구나.

<연밥 따는 노래>
맑고 넓은 가을 호수
푸른 옥처럼 물빛 빛나는데
연꽃 가득 핀 깊숙한 곳에
목련나무 배 한 척 매어 두었네
님을 보자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졌지
행여 누가 보진 않았나
한나절 내내 부끄러워라

<가난한 여자의 노래>
얼굴이며 자태며 어디 빠지랴
바느질도 길쌈도 척척이지만
가난한 집안에 파묻혀 자라니
중매쟁이라곤 얼씬도 안 하네.
추워도 배고파도 아무 티도 안 내고
온종일 창가에서 베만 짜고 있네.
어버이만은 나를 가련케 여기시지만
남들이야 어찌 내 신세를 알아주랴.
밤 깊도록 쉴 틈 없이 베를 짜느라
덜그럭덜그럭 차가운 베틀이 울고 있네.
베틀에 걸려 있는 명주 한 필은
누구의 옷이 될까.
한 손에 가위 들고
삭둑삭둑 가위질을 하고 있으니
차가운 밤 기운에
열 손가락이 시려오네.
남 시집갈 때 입을 옷은
잘도 짓는데
정작 나는 해마다
홀로 잠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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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 나에게 찾아온 변화의 순간
찰스 데커 지음, 지소철 옮김 / 북하우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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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리셋이란 단어가 대세인가 보다 싶을 만큼 리셋에 관한 책이 많이 보인다. 그만큼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우리도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필요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가정생활 뿐 아니라 사회생활도 그렇고 인간관계도 그렇듯이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쉽게 매너리즘에 빠진다. 새로운 것도, 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익숙해지고 습관이 된다. 그러다 보면 서로 식상해지고 발전도 없어진다. 그러다 외부의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거나 그 자극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수동적인 자세, 또는 자신을 보호하려고 방어벽을 쌓는다. 점점 들어가는 나이도 그런 면에 한 몫 한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한 것도 아니고 결혼해서 자녀가 있는 것도 아닌데도 벌써 변화가 싫으니 어찌 하랴... 그저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뿐인 차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내가 당장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고 내 인생을 리셋해 당장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각해볼 계기가 되어 자그마한 도움이 되었다는 얘기다.

이 책은 쉽고 재밌게 써진 상황 설정 소설이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소설이라고나 할까. 한 회사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기존 직원들, 새로운 개발을 추진 중인 스카우트된 직원, 새로 취임한 사장, 그리고 새로 입사한 신입사원 등의 관계를 통해 회사가 변하고 정책이 변화를 일으키는 가운데 각자가 어떻게 반응하며 대응하는지를 그렸다. 헐리우드식의 갑작스러운 폭발과 갈등, 깨달음 그리고 해피엔딩의 수순을 밟고 또 좀 진부한 교훈적인 자세 등이 나오긴 하지만 변화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볼만한 기회가 되겠다.

사회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에 미소가 배어나왔다. ‘항상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성질을 긁어대는 한마디로 짜증나는 인물’의 전화에 데이너는 ‘짐짓 쾌활한 목소리로 싫은 내색을 애써 감추며 전화를 받았다.’ 똑똑한 신입사원의 말에 힘을 얻는 데이너. ‘자기 비하란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하는 것이다.’ 또 똑똑한 신입사원은 계속한다. 참 아는 것도 많지. “전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진실하다고 믿어요. 다만 어떤 사람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 잃어버린 것만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었으니 앞으로 얻게 될 것을 생각하죠. 상황에 대한 시각 차이인 것 같아요.” 회사의 리더도 할 말이 있다. “나는 회사의 리더예요.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의 소재를 찾기보다는 해결점을 찾는 것이 바로 리더이구요.”

이야기가 끝나고 맨 뒤에 ‘리셋을 위한 자가진단’이 있다. 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데이너다. 일하기 싫어 둑겠다. 월급 받는 것만 좋다. 이 글을 우리 회사의 누군가가 읽는다면? 하지만 아직은 출근 시간도 잘 지키고 하루하루 불평만 하지는 않는다.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1. 출근 시간이 점점 지켜지지 않고 있다. -> 출근 시간은 잘 지킨다.
2. 예전과 다르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맞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 예전에도 지금도 이 일이 나에게 안 맞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3. 내 직업의 발전을 위한 별도의 자기계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 공부하기 싫다. 놀고만 싶다.
4. 직장 내에서 되고 싶은 역할 모델이 없다. -> 없다. 엄마닭이 나가고 나서는 아무도. 
5. 일하고 있는 시간에 비해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 그렇다.
6. 회사에서 멍하니 웹서핑을 하며 보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 그렇다. 시간만 나면 웹서핑이다. 시간이 안 나도 쪼개서 한다. 미쳤다.
7.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5년 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 그려진다. 당연히 퇴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월급을 후회하고 있겠지.
8. 늘 하는 일인데 더 힘이 든다는 기분이 든다. -> 그럴 때가 있다. 예전엔 쉬웠는데, 이젠 긴장해야 하는 일이 싫다.

결론: 큰일 났다. 나, 리셋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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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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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새 책이 나오면 나는 겁부터 난다. 혹시나 재미 없을까봐서. 혹시나 일말의 실망감이 들까봐서. 은희경의 새 책도 내게 그런 두려움을 준 책이었다. <상속>으로 그녀와 200% 공감을 한 나로서는 그녀의 다른 책을 읽는 것도 겁이 나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 이후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새의 선물>을 읽었다. 이 작품들은 그녀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작품들이었다. 친구가 실망스러웠다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그런 의미에서 제일 뒤로 밀려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락 한 구석에 숨겨두었던 곳감을 조금씩 꺼내 아껴먹는 것처럼 아끼고 있다.

그런데 이 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그런 우려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끌어안고 ‘역시 당신은 최고야... 은희경...’ 이런 감사함의 말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사실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는 궁합이 있다고 본다. 좋은 작품인데도 유난히 나와 안 맞는 경우도 있고, 좋아하려고 맘먹고 작품을 집어 들어도 하필이면 그 작가의 제일 별로인 작품을 집어 들고... 그런 면에서 나와 은희경은 궁합이 정말 잘 맞는 경우이다. 어느 일요일 <상속>을 읽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보통 부모 자식 관계는 애(愛)이던 증(憎)이던 강렬한 관계를 그리기 마련인데, 은희경이 그린 관계는 그 둘 다 아니었다. 한 발자국 떨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관계였다. 그걸 읽으면서 난 우리 부모님을 생각했고,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진 것이었다. 무덤덤하게 그린 듯 보인 그 관계가 나로 하여금 오히려 더 강렬한 어떤 애정과 증오를 보게 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런 강렬한 느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와 은희경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한 것이다.

각설하고, 이 작품집에는 <의심을 찬양함>, <고독의 발견>,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날씨와 생활>, <지도 중독>,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등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날씨와 생활>을 읽어주는 오디오북은... 다 듣긴 들었지만 뭐가 좋은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읽는 사람은 힘들었겠지만 내가 눈으로 읽는 것보다 느려서 책하고 함께 보다 결국은 책을 내려놓고 끝까지 들었는데, 참 느렸다. 물론 다 듣고 난 다음에는 그 작품의 내용이 제일 머릿속에 속속들이 남긴 했다. 차라리 은희경의 목소리를 담은, 은희경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노래들을 좀 넣어주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글을 읽을 수 없는 분들에겐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집은 2005년에서 2007년까지 여기저기 계간지 등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 느낌이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어떤 연계성이 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즉 작품집 전체에 연결되는 어떤 맛이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기존에 읽었던 작품들보다 더 잔재미도 있고, 어둡고 강렬한 스토리보다는 평범하지만 밝고 환한 어떤 빛이 퍼져 나오는듯한 작품들이었다. 우리 일상에 더 가깝고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그래도 내겐 누구보다 소중한!) 나와 더 비슷한 인물들을 그렸다. 꾸질꾸질한 현실 대신 멋진 상상을 하지만 내게는 절대 일어날 일 없는 그런 일들을 너무 편협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려 냈다. 어떤 작품 하나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 없었다. 비슷하면서도 각각 독특한 맛을 전해주는 작품집, 전체가 정말 ‘맛있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은희경의 대단한 문학적인 힘은 그녀가 여성작가라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데도 있다. 너무 여성성이 강조된 작품은 여성인 내가 읽어도 부담감이 느껴질 때도 있고, 남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작품에도 (남성작가의 여성에 대한 이해에도 마찬가지이다.) 짜증이 날 때가 있는데, 은희경의 중성적인 힘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우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주인공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성격이나 심리 모두 이쪽 경계 안쪽도 아닌, 저쪽 경계도 아닌 그 중심선에 서 있다. 그 중성적인 힘에 매력을 느낀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일상과 사람들, 요즘 세상과 현실을 다양하고 멋지게 그린 이 작품집, 추천한다. 은희경을 이미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은희경을 사랑할까 말까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은희경에게 어떤 이유로든 실망했던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나는 감히 말한다. “은희경, 당신을 사랑한다”고... 

제목으로 잡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가 은희경이 아닌 릴케의 문장이라는데는 조금 아쉬움도 남지만, 완벽한 작가가 아닌 은희경이 그래서 좋다. 돈, 권력, 애정, 건강을 가져다준다는 네 가지의 물줄기가 흐르는 약수 앞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말에 급히 돈 쪽으로 가서 줄을 섰다는 은희경. 물을 마신 뒤에는 애정 쪽 줄로 그리고 그 다음엔 건강 쪽으로 갔다는 은희경. 그런 당신을 더 사랑한다...

<- 리뷰는 요기까지. ^^*

정말 즐겁게 읽은 작품집의 스토리를 전달해주는 건 의미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냥 내게 와 닿았던 대목만 뽑았다. 나를 위해서...

<의심을 찬양함>에 나오는 대목이다. ‘세상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굴러가요. 더러움과 증오와 한심함으로 가득차 있어요. 솔직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모두 정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일 거예요.’

<고독의 발견>에 나오는 대목이다. ‘마치 어른이란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공들여 화장을 했지만 여자의 얼굴은 인형에 짙은 화장을 해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붉게 물든 두 뺨이 도드라져서인지 눈은 깊이 들어가 있었고 또 놀랄 만큼 반짝였다. 어린애처럼 통통하고 짧은 손가락을 구부려 생맥주가 가득 든 잔을 거뜬히 드는 품이 뜻밖에도 힘은 센 모양이었다.’ 또 한 대목이 있다. ‘횡단보도를 찾다가 여자친구가 늘 나한테 하던 말이 떠올랐어요. 나는 나 혼자 옳다는 것 한가지만을 밑천삼아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라고, 세상을 너무 모른다구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나오는 대목이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 또 한 대목이다. ‘나는 무엇을 간절히 원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원해도 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조건에서 살아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지는 않았다.’ 또 한 대목. ‘어머니가 혼잣말로 하는 대화를 시작했다. 늙으면 먹는 모습이 추해진다는 말이 있어. 어느 누가 추한 걸 자꾸 보려고 하겠니. 먹을 것을 뺏어야 할 때가 온 거지. 죽을 때가 된 거야. 사람이 정을 뗄 때고 그런다더라. 정이 식으면 먹는 모습이 제일 보기 싫어진단다. 먹을 것을 뺏고 싶은 심정, 그거 죽으라는 소리 아니겠냐. 먹는 것만큼 치사한 것도 없어. 좋아지는 마음도 다 먹을 때에 생겨나고 살가운 정도 한밥상에서 나오는 거란다. 먹는 게 이쁘면 곧 돼지가 되겠네. 내가 비아냥댔다.’ 아름다움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주인공은 말한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

<날씨와 생활>의 한 대목이다. ‘아, 그렇게 많은 인생의 암호를 해독했음에도 이 세상에 놀랄 일이란 전혀 없는 걸까.’

<지도 중독>의 한 대목이다. ‘돌아오는 것, 그것이 내가 이번 여행에서 기대하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또 한 대목. ‘먹고 이동하고 걷고 다시 먹고 잠자는 단순함 속에 깃든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위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대목.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또 한 대목. ‘야외 테이블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는 편의점 앞을 혼자 지나가며 나는 중얼거렸다. 아, 이런 밤은, 친구들은 모두 잠들어있고 텅 빈 거리를 혼자 걷는 이런 밤, 별이 보이고 바람이 선선한 가을밤은, 곰하고 한잔하고 싶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의 한 대목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익숙해지기까지의 절차가 갈수록 귀찮아지는 데 비한다면 거기에서 얻게 되는 신선함이나 정보는 점점 적어졌다. (...) 소음에 예민해지고 아예 남의 목소리 자체가 싫어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게 느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 세상이 그다지 놀랍지 않게 생각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언젠가 겪어본 일처럼 여겨진다. 뉴스도 그렇고 주변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다 그런 식이다. (...) 분명한 것은 세상일이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돼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늙어가는 사람들은 자기연민이 많고 따라서 점점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무척 현실적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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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1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은희경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래도록 그녀를 만나지 않았네요.
신간을 벌써 읽으셨네요. 별 다섯을 주신 걸 보니 책이 좋은가봅니다.
읽고 싶어져요^^

진달래 2007-04-1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희경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예요. ^^ 실망할까봐 걱정하면서 읽었는데, 무척 좋아서 행복했어요. ^^*

이게다예요 2007-04-17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에만 담아두고 아직 사서 읽진 못했는데.. 역시나 빠르시네요. 이 리뷰보니 오랜만에 읽는 은희경은 또 어떨까 사뭇 궁금해지네요.

진달래 2007-04-1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어떤 분은 은희경이 정말 안 맞는다고 하시더라구요. 근데 저랑은 넘 잘 맞아서 행복해요. ^^ 이번 작품은 많이 바뀌었다는데... 전 더 맛이 들어간 작품도 좋았어요. ^^;;
 
지하철
아사다 지로 지음, 정태원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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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매일 아침저녁으로 2시간씩 지하철을 탄다. 가끔은 둑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무서울 때도 있고, 짓눌려 숨이 막힐 때도 있고, 도끼질로 피바다를 만들고 싶을 정도로 살의를 느낄 때도 있다. 또 자주 책을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있고, 어쩌다 억수로 재수가 좋아 앉을 때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내 일상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 평범한 지하철이 아사다 지로에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간다. 그의 지하철은 현실을 감안한 환상이고 과거로의 여행이며 세상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무대가 된다.

<장미도둑>으로 알게 된 아사다 지로는 그 작품만으로는 그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마음에 든 작품도 있었지만, 음울한 분위기의 작품들은 별로였었다. 어차피 그의 화려한(!) 과거 이력으로 독자가 작품을 봐주는 건, 한, 두 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가 조폭의 경력을 딛고 일어선 작가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의 작품이 절대적으로 문학성을 인정받고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가가 각 작가의 역량이리라. 그런데 이 작품, <지하철>은 놀라울 정도로 재밌고 구성도 특이하고 스토리도 탄탄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가끔 다룬 에피소드를 이용할 때도 있지만, 전체적인 재미나 구성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신지의 거칠어진 마음은 지하철의 따뜻한 바람에 풀렸다. 언제 어느 때나 자신을 감싸주는 평온함.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느끼는 안식이다.’ 아사다 지로의 지하철은 서민에게 주는 편리함이고 안식이다.

이 작품은 완전히 추리물은 아니지만, 지하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실재와 비실재가 섞이고 있고,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얽혀 돌아가며 스토리가 이뤄지고, 또 반전은 아니지만 황당하고도 깜짝 놀랄만한 결과가 벌어지기에 스포일러성 감상은 자제해야할 것이다. 그저 장편소설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그 특별한 지하철이 주는 세계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굉장한 부자이며 독재적이고 작은 부인까지 둔 아버지를 싫어해, 어머니와 집을 나와 산지 오래된 신지는 중년의 외판원이다. 형은 오래 전에 둑었고, 동생은 어쩔 수 없이 가업을 잇느라 아버지 회사에 매여 있고,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병원에 들르라는 기별을 한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동창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의 신지는 정말 꿀꿀한 인생을 사는 듯 보인다. 한 번도 외국이라곤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끌고 간 외판원 가방 때문에 출장을 가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엄청 마신 술 때문에 정신이 없고, 자신이 부(父+富)를 거부했으면서도 어쩌면 남들에게 실패한 인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 플랫폼에 선 신지는 거기에서 옛 은사를 만난다. 그 은사 역시 퇴락한 노인으로 보일 뿐이다. 한 마디로 꿀꿀한 시작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순식간에 반전된다. 갑자기 지하철을 타고 하게 되는 시간여행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하고, 마치 곡예를 하듯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그 다음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끝도 없이 궁금증이 일고, 차근차근 밝혀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과 세상의 모습에 주인공과 함께 놀라게 된다. 밝혀지는 한 조각의 진실에도 함께 마음 아파하게 된다. 더구나 조금씩, 시간여행을 허락해주는 지하철의 룰을 이해하게 되면서 스스로 그 여행의 조종자가 되려는 주인공의 노력에는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이해한 만큼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자신이 전혀 몰랐던 인간과 세상을 이해한 것으로 어쩌면 충분한지도 모른다. 지하철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시대의 슬픔과 평안함은 영원히 이 작은 지하세계에 봉인되어 있다. 이것은 서브웨이도, 언더그라운드도, 메트로도 아니다. 1927년부터 죽 도쿄의 어둠을 달려온 ‘지하철’이다. ‘지하철’, 하고 속으로 글자를 써보니, 동화에 나오는 성냥처럼 슬프고 따뜻한 불이 마음속에 켜졌다.’ 지하철은 이렇듯 어둠을 달리며 숱한 슬픔과 평안함을 안고 달렸다. 또 사람 좋은 사장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사장은 말한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이 말인가? 왠지 지하철 같은데. 이거 영광인걸.’

난 내일도 지하철을 탈 것이다. 아, 여전히 숨도 막히고, 마음속으로 도끼도 휘두르고, 횡재도 하겠지만, <지하철> 같은 책만 내 눈 앞에 있다면야, 뭐가 그리 어려우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시간여행을 할 텐데 말이다. 아사다 지로 덕분에 즐거운 지하철 여행을 했다. 지하철을 통해 시간여행을 마친 신지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그야말로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렇다. 지하철을 타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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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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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참 억울하겠다. 그것 참, 얼마나 억울했을까.
어른은 때릴만했지만 아이는 맞을 만하지 않았다.
그러니 억울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이 시집, <가뜬한 잠>에선,
시인이 부르는 조곤조곤한 시의 가락을 들고 있으면,
정말 가뜬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나 부드럽고 애잔하고 따스한지,
저절로 잠이 스르륵 들어,
꿈도 안 꾸고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박성우 시인의 이 시집은 정말 착하다.
시골 정서와 어린 시절 정서가 함께 곱고 수줍게 살아난다.
가난과 생업, 자연과 일상, 연민과 사랑이 모두 가뜬한 잠을 청한다.
그의 배려하는 시심이 고맙고 또 고맙다.
장난기 어린 시에서조차 애잔한 슬픔이 배어나오지만,
사람과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 아래에선, 
그 슬픔마저 가뜬한 잠에 빠져들 것 같다.

그렇게 가뜬하게 잠을 한숨 자고 나면,
내 마음, 내 언어 모두 그의 작은 장난기와 배려로 모두 깨끗해질 것 같다.

일상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아,
욕심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아,
불행과 좌절에 얻어맞은 사람들아,
의욕이 넘쳐 바쁜 사람들아,
잃어버림의 슬픔을 아직도 안고 있는 사람들아,
 
모두 박성우 시인과 함께 한숨 가뜬하게 자고 일어나련?

그의 친절과 배려가 그런 모든 이들에게 가만가만 스며들길...
고맙다, 시인아... 정말 고맙다... 

<가뜬한 잠>

곡식 까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둥그렇게 굽은 몸으로
멍석에 차를 잘도 비비던 할머니가
정지문을 열어놓고 누런 콩을 까부르고 있었다
키 끝 추슬러 잡티를 날려보내놓고는,

가뜬한 잠을 마루에 뉘였다

하도 무섭게 조용한 잠이어서
생일 밥숟갈 놓고 눈을 감은 외할매 생각이 차게 다녀갔다

<장산도 가시내>

전라도 신안 장산도서 온 가시내
갯벌 같은 사투리 질퍽질퍽 쓰는 가시내
소리공부 헌답시고 도망쳐나온 가시내
뭍에 나가 헐 짓거리가 그리 읎다더냐
소리 배와서 기생질헐라고 그라냐
아부지와 인연 끊은 독헌 가시내
밥상머리 떡 허니 밀고는 소리를 한다
춘형가도 수궁가도 흥부가도 아닌
무신 청승이 나서 상여소리를 헌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차 어노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들 어안이 벙벙하다
지 아부지 눈감았다는 소식 듣고서야
소리공부 접고 장산도로 들었다는 가시내
아부지 살아생전 한번도 못 들려준 소리
꽃상여 타고 먼 길 갈 적에야 상여잡고
첨이자 마지막 소리 올렸다는 가시내 그 소리가
상여소리였다고 소짝새처럼 우는 가시내
죄다 물범벅으로 울려놓고
지 혼자 해죽해죽 섧게 웃어쌓는 장산도 가시내

이 가시내, 왜 그랬노... 왜 그랬노 말이다. 허 참...   

<버릇>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낼름?...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거죠, 뭐... 실용적이에요, 그게. 환경 오염도 안 시키구요. 냅킨으로 닦아 봐요, 휴지나 늘지...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해 줄 수 있을까, 저런 버릇 가진 남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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