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아사다 지로 지음, 정태원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요즘 매일 아침저녁으로 2시간씩 지하철을 탄다. 가끔은 둑음의 공포를 느낄 정도로 무서울 때도 있고, 짓눌려 숨이 막힐 때도 있고, 도끼질로 피바다를 만들고 싶을 정도로 살의를 느낄 때도 있다. 또 자주 책을 읽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를 때도 있고, 어쩌다 억수로 재수가 좋아 앉을 때면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내 일상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이 평범한 지하철이 아사다 지로에겐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간다. 그의 지하철은 현실을 감안한 환상이고 과거로의 여행이며 세상과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무대가 된다.

<장미도둑>으로 알게 된 아사다 지로는 그 작품만으로는 그의 명성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마음에 든 작품도 있었지만, 음울한 분위기의 작품들은 별로였었다. 어차피 그의 화려한(!) 과거 이력으로 독자가 작품을 봐주는 건, 한, 두 편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그가 조폭의 경력을 딛고 일어선 작가라서가 아니라, 정말 그의 작품이 절대적으로 문학성을 인정받고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지는가가 각 작가의 역량이리라. 그런데 이 작품, <지하철>은 놀라울 정도로 재밌고 구성도 특이하고 스토리도 탄탄하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가끔 다룬 에피소드를 이용할 때도 있지만, 전체적인 재미나 구성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신지의 거칠어진 마음은 지하철의 따뜻한 바람에 풀렸다. 언제 어느 때나 자신을 감싸주는 평온함. 그것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느끼는 안식이다.’ 아사다 지로의 지하철은 서민에게 주는 편리함이고 안식이다.

이 작품은 완전히 추리물은 아니지만, 지하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실재와 비실재가 섞이고 있고,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얽혀 돌아가며 스토리가 이뤄지고, 또 반전은 아니지만 황당하고도 깜짝 놀랄만한 결과가 벌어지기에 스포일러성 감상은 자제해야할 것이다. 그저 장편소설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그 특별한 지하철이 주는 세계가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굉장한 부자이며 독재적이고 작은 부인까지 둔 아버지를 싫어해, 어머니와 집을 나와 산지 오래된 신지는 중년의 외판원이다. 형은 오래 전에 둑었고, 동생은 어쩔 수 없이 가업을 잇느라 아버지 회사에 매여 있고, 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병원에 들르라는 기별을 한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동창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의 신지는 정말 꿀꿀한 인생을 사는 듯 보인다. 한 번도 외국이라곤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끌고 간 외판원 가방 때문에 출장을 가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엄청 마신 술 때문에 정신이 없고, 자신이 부(父+富)를 거부했으면서도 어쩌면 남들에게 실패한 인생으로 보였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 플랫폼에 선 신지는 거기에서 옛 은사를 만난다. 그 은사 역시 퇴락한 노인으로 보일 뿐이다. 한 마디로 꿀꿀한 시작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순식간에 반전된다. 갑자기 지하철을 타고 하게 되는 시간여행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기도 하고, 마치 곡예를 하듯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그 다음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끝도 없이 궁금증이 일고, 차근차근 밝혀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과 세상의 모습에 주인공과 함께 놀라게 된다. 밝혀지는 한 조각의 진실에도 함께 마음 아파하게 된다. 더구나 조금씩, 시간여행을 허락해주는 지하철의 룰을 이해하게 되면서 스스로 그 여행의 조종자가 되려는 주인공의 노력에는 동참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이해한 만큼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다. 자신이 전혀 몰랐던 인간과 세상을 이해한 것으로 어쩌면 충분한지도 모른다. 지하철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시대의 슬픔과 평안함은 영원히 이 작은 지하세계에 봉인되어 있다. 이것은 서브웨이도, 언더그라운드도, 메트로도 아니다. 1927년부터 죽 도쿄의 어둠을 달려온 ‘지하철’이다. ‘지하철’, 하고 속으로 글자를 써보니, 동화에 나오는 성냥처럼 슬프고 따뜻한 불이 마음속에 켜졌다.’ 지하철은 이렇듯 어둠을 달리며 숱한 슬픔과 평안함을 안고 달렸다. 또 사람 좋은 사장에게 고마움을 전하자, 사장은 말한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이 말인가? 왠지 지하철 같은데. 이거 영광인걸.’

난 내일도 지하철을 탈 것이다. 아, 여전히 숨도 막히고, 마음속으로 도끼도 휘두르고, 횡재도 하겠지만, <지하철> 같은 책만 내 눈 앞에 있다면야, 뭐가 그리 어려우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시간여행을 할 텐데 말이다. 아사다 지로 덕분에 즐거운 지하철 여행을 했다. 지하철을 통해 시간여행을 마친 신지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그야말로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렇다. 지하철을 타고 가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