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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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참 억울하겠다. 그것 참, 얼마나 억울했을까.
어른은 때릴만했지만 아이는 맞을 만하지 않았다.
그러니 억울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이 시집, <가뜬한 잠>에선,
시인이 부르는 조곤조곤한 시의 가락을 들고 있으면,
정말 가뜬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나 부드럽고 애잔하고 따스한지,
저절로 잠이 스르륵 들어,
꿈도 안 꾸고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박성우 시인의 이 시집은 정말 착하다.
시골 정서와 어린 시절 정서가 함께 곱고 수줍게 살아난다.
가난과 생업, 자연과 일상, 연민과 사랑이 모두 가뜬한 잠을 청한다.
그의 배려하는 시심이 고맙고 또 고맙다.
장난기 어린 시에서조차 애잔한 슬픔이 배어나오지만,
사람과 세상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 아래에선, 
그 슬픔마저 가뜬한 잠에 빠져들 것 같다.

그렇게 가뜬하게 잠을 한숨 자고 나면,
내 마음, 내 언어 모두 그의 작은 장난기와 배려로 모두 깨끗해질 것 같다.

일상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아,
욕심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아,
불행과 좌절에 얻어맞은 사람들아,
의욕이 넘쳐 바쁜 사람들아,
잃어버림의 슬픔을 아직도 안고 있는 사람들아,
 
모두 박성우 시인과 함께 한숨 가뜬하게 자고 일어나련?

그의 친절과 배려가 그런 모든 이들에게 가만가만 스며들길...
고맙다, 시인아... 정말 고맙다... 

<가뜬한 잠>

곡식 까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둥그렇게 굽은 몸으로
멍석에 차를 잘도 비비던 할머니가
정지문을 열어놓고 누런 콩을 까부르고 있었다
키 끝 추슬러 잡티를 날려보내놓고는,

가뜬한 잠을 마루에 뉘였다

하도 무섭게 조용한 잠이어서
생일 밥숟갈 놓고 눈을 감은 외할매 생각이 차게 다녀갔다

<장산도 가시내>

전라도 신안 장산도서 온 가시내
갯벌 같은 사투리 질퍽질퍽 쓰는 가시내
소리공부 헌답시고 도망쳐나온 가시내
뭍에 나가 헐 짓거리가 그리 읎다더냐
소리 배와서 기생질헐라고 그라냐
아부지와 인연 끊은 독헌 가시내
밥상머리 떡 허니 밀고는 소리를 한다
춘형가도 수궁가도 흥부가도 아닌
무신 청승이 나서 상여소리를 헌다
어노 어노 어나리 넘차 어노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들 어안이 벙벙하다
지 아부지 눈감았다는 소식 듣고서야
소리공부 접고 장산도로 들었다는 가시내
아부지 살아생전 한번도 못 들려준 소리
꽃상여 타고 먼 길 갈 적에야 상여잡고
첨이자 마지막 소리 올렸다는 가시내 그 소리가
상여소리였다고 소짝새처럼 우는 가시내
죄다 물범벅으로 울려놓고
지 혼자 해죽해죽 섧게 웃어쌓는 장산도 가시내

이 가시내, 왜 그랬노... 왜 그랬노 말이다. 허 참...   

<버릇>

눈깔사탕 빨아먹다 흘릴 때면 주위부터 두리번거렸습니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 없으면 혀끝으로 대충 닦아 입속에 다시 넣었구요 

그 촌뜨기인 제가 출세하여 호텔 커피숍에서 첨으로 선을 봤더랬습니다 제목도 야릇한 첼로 음악을 신청할 줄 아는 우아한 숙녀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만 손등에 커피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손이 무지하게 떨렸거든요

그녀가 얼른 내민 냅킨이 코앞까지 왔지만 그보다 빠른 것은 제 혓바닥이었습니다

낼름?... 사람이란 게 다 그런 거죠, 뭐... 실용적이에요, 그게. 환경 오염도 안 시키구요. 냅킨으로 닦아 봐요, 휴지나 늘지...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해 줄 수 있을까, 저런 버릇 가진 남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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