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좋아하는 작가의 새 책이 나오면 나는 겁부터 난다. 혹시나 재미 없을까봐서. 혹시나 일말의 실망감이 들까봐서. 은희경의 새 책도 내게 그런 두려움을 준 책이었다. <상속>으로 그녀와 200% 공감을 한 나로서는 그녀의 다른 책을 읽는 것도 겁이 나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 이후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새의 선물>을 읽었다. 이 작품들은 그녀를 더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 작품들이었다. 친구가 실망스러웠다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는 그런 의미에서 제일 뒤로 밀려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다락 한 구석에 숨겨두었던 곳감을 조금씩 꺼내 아껴먹는 것처럼 아끼고 있다.

그런데 이 책,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그런 우려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다 읽고 나서, 이 책을 끌어안고 ‘역시 당신은 최고야... 은희경...’ 이런 감사함의 말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사실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는 궁합이 있다고 본다. 좋은 작품인데도 유난히 나와 안 맞는 경우도 있고, 좋아하려고 맘먹고 작품을 집어 들어도 하필이면 그 작가의 제일 별로인 작품을 집어 들고... 그런 면에서 나와 은희경은 궁합이 정말 잘 맞는 경우이다. 어느 일요일 <상속>을 읽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보통 부모 자식 관계는 애(愛)이던 증(憎)이던 강렬한 관계를 그리기 마련인데, 은희경이 그린 관계는 그 둘 다 아니었다. 한 발자국 떨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관계였다. 그걸 읽으면서 난 우리 부모님을 생각했고,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진 것이었다. 무덤덤하게 그린 듯 보인 그 관계가 나로 하여금 오히려 더 강렬한 어떤 애정과 증오를 보게 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런 강렬한 느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와 은희경은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한 것이다.

각설하고, 이 작품집에는 <의심을 찬양함>, <고독의 발견>,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날씨와 생활>, <지도 중독>,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 등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있다. <날씨와 생활>을 읽어주는 오디오북은... 다 듣긴 들었지만 뭐가 좋은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읽는 사람은 힘들었겠지만 내가 눈으로 읽는 것보다 느려서 책하고 함께 보다 결국은 책을 내려놓고 끝까지 들었는데, 참 느렸다. 물론 다 듣고 난 다음에는 그 작품의 내용이 제일 머릿속에 속속들이 남긴 했다. 차라리 은희경의 목소리를 담은, 은희경이 좋아하는 음악이나 노래들을 좀 넣어주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글을 읽을 수 없는 분들에겐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작품집은 2005년에서 2007년까지 여기저기 계간지 등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그 느낌이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어떤 연계성이 있다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즉 작품집 전체에 연결되는 어떤 맛이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기존에 읽었던 작품들보다 더 잔재미도 있고, 어둡고 강렬한 스토리보다는 평범하지만 밝고 환한 어떤 빛이 퍼져 나오는듯한 작품들이었다. 우리 일상에 더 가깝고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그래도 내겐 누구보다 소중한!) 나와 더 비슷한 인물들을 그렸다. 꾸질꾸질한 현실 대신 멋진 상상을 하지만 내게는 절대 일어날 일 없는 그런 일들을 너무 편협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그려 냈다. 어떤 작품 하나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 없었다. 비슷하면서도 각각 독특한 맛을 전해주는 작품집, 전체가 정말 ‘맛있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은희경의 대단한 문학적인 힘은 그녀가 여성작가라는 사실을 잊게 해주는데도 있다. 너무 여성성이 강조된 작품은 여성인 내가 읽어도 부담감이 느껴질 때도 있고, 남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작품에도 (남성작가의 여성에 대한 이해에도 마찬가지이다.) 짜증이 날 때가 있는데, 은희경의 중성적인 힘은 여성이건 남성이건 우선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주인공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 성격이나 심리 모두 이쪽 경계 안쪽도 아닌, 저쪽 경계도 아닌 그 중심선에 서 있다. 그 중성적인 힘에 매력을 느낀다.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일상과 사람들, 요즘 세상과 현실을 다양하고 멋지게 그린 이 작품집, 추천한다. 은희경을 이미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은희경을 사랑할까 말까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그리고 은희경에게 어떤 이유로든 실망했던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나는 감히 말한다. “은희경, 당신을 사랑한다”고... 

제목으로 잡은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가 은희경이 아닌 릴케의 문장이라는데는 조금 아쉬움도 남지만, 완벽한 작가가 아닌 은희경이 그래서 좋다. 돈, 권력, 애정, 건강을 가져다준다는 네 가지의 물줄기가 흐르는 약수 앞에서 하나를 택하라는 말에 급히 돈 쪽으로 가서 줄을 섰다는 은희경. 물을 마신 뒤에는 애정 쪽 줄로 그리고 그 다음엔 건강 쪽으로 갔다는 은희경. 그런 당신을 더 사랑한다...

<- 리뷰는 요기까지. ^^*

정말 즐겁게 읽은 작품집의 스토리를 전달해주는 건 의미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냥 내게 와 닿았던 대목만 뽑았다. 나를 위해서...

<의심을 찬양함>에 나오는 대목이다. ‘세상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굴러가요. 더러움과 증오와 한심함으로 가득차 있어요. 솔직히. 아무렇게나 살아도 상관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 세상이 모두 정밀하게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면 나는 아마 각본대로 뛰지 않는 토끼일 거예요.’

<고독의 발견>에 나오는 대목이다. ‘마치 어른이란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공들여 화장을 했지만 여자의 얼굴은 인형에 짙은 화장을 해놓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붉게 물든 두 뺨이 도드라져서인지 눈은 깊이 들어가 있었고 또 놀랄 만큼 반짝였다. 어린애처럼 통통하고 짧은 손가락을 구부려 생맥주가 가득 든 잔을 거뜬히 드는 품이 뜻밖에도 힘은 센 모양이었다.’ 또 한 대목이 있다. ‘횡단보도를 찾다가 여자친구가 늘 나한테 하던 말이 떠올랐어요. 나는 나 혼자 옳다는 것 한가지만을 밑천삼아 세상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라고, 세상을 너무 모른다구요.’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나오는 대목이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다수가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어떤 사람들이다.’ 또 한 대목이다. ‘나는 무엇을 간절히 원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원해도 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조건에서 살아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지는 않았다.’ 또 한 대목. ‘어머니가 혼잣말로 하는 대화를 시작했다. 늙으면 먹는 모습이 추해진다는 말이 있어. 어느 누가 추한 걸 자꾸 보려고 하겠니. 먹을 것을 뺏어야 할 때가 온 거지. 죽을 때가 된 거야. 사람이 정을 뗄 때고 그런다더라. 정이 식으면 먹는 모습이 제일 보기 싫어진단다. 먹을 것을 뺏고 싶은 심정, 그거 죽으라는 소리 아니겠냐. 먹는 것만큼 치사한 것도 없어. 좋아지는 마음도 다 먹을 때에 생겨나고 살가운 정도 한밥상에서 나오는 거란다. 먹는 게 이쁘면 곧 돼지가 되겠네. 내가 비아냥댔다.’ 아름다움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못했던 주인공은 말한다. ‘비너스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나를 멸시한다고.’

<날씨와 생활>의 한 대목이다. ‘아, 그렇게 많은 인생의 암호를 해독했음에도 이 세상에 놀랄 일이란 전혀 없는 걸까.’

<지도 중독>의 한 대목이다. ‘돌아오는 것, 그것이 내가 이번 여행에서 기대하는 유일한 기쁨이었다.’ 또 한 대목. ‘먹고 이동하고 걷고 다시 먹고 잠자는 단순함 속에 깃든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위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 대목.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또 한 대목. ‘야외 테이블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는 편의점 앞을 혼자 지나가며 나는 중얼거렸다. 아, 이런 밤은, 친구들은 모두 잠들어있고 텅 빈 거리를 혼자 걷는 이런 밤, 별이 보이고 바람이 선선한 가을밤은, 곰하고 한잔하고 싶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의 한 대목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익숙해지기까지의 절차가 갈수록 귀찮아지는 데 비한다면 거기에서 얻게 되는 신선함이나 정보는 점점 적어졌다. (...) 소음에 예민해지고 아예 남의 목소리 자체가 싫어지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게 느껴지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 세상이 그다지 놀랍지 않게 생각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든 언젠가 겪어본 일처럼 여겨진다. 뉴스도 그렇고 주변의 살아가는 이야기도 다 그런 식이다. (...) 분명한 것은 세상일이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돼버렸다. 회사든 가정이든 이제 내 인생에 변수는 거의 없다. 파산이나 이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이 생겨도 나라는 사람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 자신의 나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늙어가는 사람들은 자기연민이 많고 따라서 점점 고독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무척 현실적인 사람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4-17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은희경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래도록 그녀를 만나지 않았네요.
신간을 벌써 읽으셨네요. 별 다섯을 주신 걸 보니 책이 좋은가봅니다.
읽고 싶어져요^^

진달래 2007-04-17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희경은...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가예요. ^^ 실망할까봐 걱정하면서 읽었는데, 무척 좋아서 행복했어요. ^^*

이게다예요 2007-04-17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관함에만 담아두고 아직 사서 읽진 못했는데.. 역시나 빠르시네요. 이 리뷰보니 오랜만에 읽는 은희경은 또 어떨까 사뭇 궁금해지네요.

진달래 2007-04-1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어떤 분은 은희경이 정말 안 맞는다고 하시더라구요. 근데 저랑은 넘 잘 맞아서 행복해요. ^^ 이번 작품은 많이 바뀌었다는데... 전 더 맛이 들어간 작품도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