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수북히 피어있는 수국을 보면 단아하다는 느낌이 든다.

학교 안에 수국이 몇 그루 있다.

햇살 아래 보는 수국도 좋은데, 빗방울 머금은 수국도 참 좋다.

보랏빛이 수줍은 새색시 얼굴 같다. 핑크빛이 살짝 돌아서 그런가.

주말이다. 집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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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을 수 있습니다. *^^*)

얼마 전에 드라마 <황진이>에서 하지원이 멋진 연기를 펼쳐 주목을 받았다.
재밌고 잘 만든 드라마였는데, 난 텔레비전이 없어 어쩌다 띄엄띄엄 봤다.
물론 볼 때마다 좋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다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드라마 황진이의 인생에서는 기생이라는 직업(!), 즉 예인을 강조했던 것 같다.
그녀의 문학, 춤, 음악 등등을 여인의 숙명적인 운명을 따르거나 술을 따르는 쪽보다는,
시대적인 어려움을 무릅쓰고 한 여인이 당당하게 자신의 끼를 발산시키는 쪽을 부각 시켰다. 물론 좋은 드라마답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 갈등, 경쟁 등등 또 남성들 중심의 세계에서 그 남성들과의 관계 등등도 무척 상세히 그려졌던 것 같다.   



이번 영화 <황진이>는 일단 송혜교라는 예쁘디예쁜 배우, 그리고 원작자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 등등으로 이목을 끌었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영화였다. 곱디고운 한복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상미, 시장이나 뒷골목 등등 정말 어디 한 군데의 틈도 없이 잘 만들었다. <스캔들>이나 <음란서생> 등의 한국 고전영화에서 봤던 소세모습이나 화장모습 등 당시 일상의 모습이 차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똑같이 되살아났다. 봐도 봐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도도하고 당당한 여인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송혜교도 노력 많이 했다고 본다. 살이 쏙 빠져, 소녀의 이미지보다는 이제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를 풍기기도 했다. 조금은 불편한 장중한 목소리는 그녀의 노력의 일환으로 보겠다. 그저 예쁜 소녀였던 송혜교를 이젠 배우로 불러도 좋으리라…

영화는 드라마와는 달리, 일단 사랑에 초점을 맞췄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같은 레벨로 올라갈 수 없어 사랑하는 여인을 끌어내리려 했던 남정네, 놈이는 사랑하는 여인의 행복을 망쳤다는 후회를 하지만 이미 일은 저질러진 것이다. 살짝 김기덕의 <나쁜 남자>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사랑은 사랑인 것을 어쩌리…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난 뒤, 당당히 자신의 인생을 선택한 진이는 놈이에게 첫 정을 주며 기둥서방이 되어달라고 하지만, 그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놈이는 떠난다. 결국 기생은 기생대로, 의적은 의적대로의 삶을 살지만, 그들의 운명과 사랑은 얽히고설킨다.



하나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황진이와 사또와의 관계였다.

“오늘 내 수청을 들러온 것이냐?”
“수청을 들라시면 들어야지요.”
“그럼 네 진짜 마음은 어떠하냐?”
“굳이 여쭈신다면, 싫습니다.”

억지로 기생을 품지 않겠다는 사또와 황진이의 관계는 마치 서로 권력 다툼을 하듯 보인다. 실제 권력을 가진 사람의 겉멋 들린 아량과 피권력자이면서 진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듯 보이는 일개 기생의 관계는 알 듯 모를 듯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결국 친구 같은 몸종의 신랑을 살리기 위해 마음이 동해 옷고름을 푼다는 황진이, 다음 날 아침, 목적을 달성하자 다시 옷고름을 다잡아 맨다. 그 달라진 모습에 사또의 한 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소견 좁은 여자만이 방금 마신 물에다 침을 뱉는 법이다.” 황진이도 지지 않는다. “어떤 못난 남정네가 기생 하나 품는데, 이리 오래 걸린답니까?” 그러면서 진정한 남자로 서화담을 꼽는 황진이…

북한 작가의 대사들은 간혹 너무 순수해서(!) 식상한 것도 있었고, 2시간 반이 넘는 영화는 2시간이 지나자, 좀 지루했다. 배우 하나하나의 몸짓, 손짓, 눈짓까지 표현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2시간 정도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같은 역할을 별 시간차도 없이 다른 두 여배우가 하다 보니, 아무래도 전작의 포스가 많이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가 다 끝나고 나오면서 화면을 봤는데, 혼자 한참 웃었다. 의적 놈이의 밑에서 의적을 하고 황진이 몸종의 신랑이 되는 사람 이름이 개똥이가 아니고 ‘괴똥’이었던 것이다. 그걸 누가 그렇게 들었을까 싶어서, 별 것 아니었지만 신선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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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묵을...

카테고리 이름 바꾸느라 삭제했는데,

삭제하기 전에 옮기냐고 묻길래, 클릭하고 삭제했건만...

카테고리 안에 있던 글이 다 날아가버렸다.

빌어묵을...

새 서재에 아직 적응 못 하고 있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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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6-19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재질 하다가 자꾸 서버오류라는 한국말과 함께 모르는 숫자와 영어가 나와 서재 들어오기가 겁이 나요.ㅠ.ㅠ

2007-06-19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6-2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사실 다른 데랑 비교해보면 알라딘은 컴쪽이 강한 거 같아요. 그래서 신뢰가 가죠. 새로운 서재의 오류들은 신고되는 대로 아마 처리되지 않을까... 합니다. ^^;;

***님, 당장은 못해도 곧 실행을 해볼게요. ^^;; 시간 나면 곧 제대로 구경 먼저 하구요. ^^
 
우리들의 스캔들 창비청소년문학 1
이현 지음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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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스캔들이라는 단어를 보고는 청소년들의 ‘풋풋한’ 연애얘기나 ‘추문’이 이는 연애얘기인 줄 알았다.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뜻 가운데에서도 요즘에는 유난히 그런 뜻으로 많이 쓰이지 않는가. 그래서 막연히 교사와 학생의 연애 감정, 남녀 친구들 간의 삼각관계 또는 동성 친구들 간의 어떤 감정 등 그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어쨌건 이런 이야기들이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스캔들 범주에 들어가는 케이스들이 아닌가. 그런데 웬걸. 전혀 잘못 짚었다. 사실 여기서 스캔들이라는 말은 어떤 ‘사건’을 지칭한다고 하겠다. 물론 잠깐 마음 설레게 하는 감정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저 ‘사건’의 범주 안에서이다.

주인공(!) 이보라의 중딩 학교생활백서 1조는 ‘튀지 않는다, 밟히지도 않는다!’이다. 만만치 않은 중딩 생활을 보내기 위한 보라의 지침인데, 난데없이 천방지축 이모가 학교 교생으로 오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물론 공과 사를 분명히 구별하는 보라는 이모를 모른 척하고 이모도 나름 협조한다. 그런데 이모는 단순히 나이 서른에 외모가 빼어나서만 튀는 이모가 아니었다. 보통 사회의 범주에서 보면 용납하기 힘든 현실을 갖고 사는 이모였다. 그런 이모의 ‘사생활적인’ 사진이, 가면과 닉네임을 쓰면서 2학년 5반 아이들이 이용하는 비밀 카페에 뜨면서부터 사건은 크게 불거지기 시작한다. 이용도도 낮은 카페였지만 가면 쓴 아이들이 선생님들을 때리는 게임은 너무 한다는 댓글과 함께 아이들이 모두 한번쯤은 해본 게임이었다.  

이모의 사진들과 카페 존재 사실을 담임도 학교도 차차 알게 되고, 담임은 교생의 수업 참관, 조례와 종례도 금지시킨다. 그에 대항하는 이모와 그에 열 받은 담임, 그리고 마침내 열 받은 담임이 작은 잘못을 한 인호를 가격하면서 일은 삽시간에 벌어진다. 학교와 교사를 비난하는 글을 올린 학생은 정학을 당하고, 학교와 교사들, 학부모 그리고 학생들 모두 경직 일변도로 치닫는 가운데, 마침내 동영상이 카페에 뜨고 아이들은 비밀카페를 공개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행동개시에 들어간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도 봤듯이, 결국 이 세상의 어떤 사회든 단체나 구조, 체제는 그게 어른들의 세상이건, 아이들의 세상이건 그 본질은 같다. 치사함, 비굴함, 협박, 반항, 배신, 영웅, 정의 등등이 모두 인간 내면에, 사회 속에 공존하는 감정들인 것이다.

이야기는 마치 추리물처럼 흥미진진하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밝혀지면서 재미를 더해간다. 실제 이야기가 전개되는 기간은 이모가 교생실습을 나온 한 달이지만, 그 한 달이 전체적인 학교나 교사, 학부모 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라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조숙하지만 평범했고 또 범생이었던 이보라가 이젠 남들이 따가운 시선을 던지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이제 보라는 ‘적어도, 나 자신의 시선에 대해서라면 당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요즘 새롭게 배워가는 중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사건을 겪고도 학교는 변한 게 없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늘 똑같을 것이다. 대신 그 가운데에서 우리 중딩 아이들은 나름의 이런저런 성장통을 겪으면서 때로는 힘들게, 때로는 덜 힘들게 만만치 않은 고집불통 학교에서 중딩 생활을 해내며 성장할 것이다. 생각하면, 한편 마음 한쪽이 아릿하게 아파오고 또 한편 아련한 추억이 깃든 내 중딩 생활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그렇게 웃을 일도 많고 울 일도 많았던지… 그립다, 그때가…

현실에 맞게, 아주 재밌게,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청소년 소설을 만났다. 교사도 아니고 학부모도 아니고 중딩 조카를 둔 이모나 고모도 아니지만, 정말 재밌게, 단숨에 읽어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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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호텔 르완다> 영화를 봤었다. 꼭 봐야할 것 같은 느낌에, 바쁜 와중에도 극장에 혼자 가서 봤었다. 그때 느낌이 생생하다. 거기선 한 호텔 지배인이 둑음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어떻게 구하려고 애썼는지를 그 당시의 경제, 정치, 사회를 보여줬었다. 그 영화는 영화를 보는 눈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었다. 가슴을 활짝 열고 온 마음으로 보게 한 영화였다. 남의 일이라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이미 지나버린 일이라고 생각했었던 이름으로만 듣던 르완다라는 나라가 그렇게 가까이 온 얼굴을 들이밀며 다가왔었다.

이 책, <내 이름은 임마꿀레>는 그 당시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그 둑음의 사선을 넘어 생존한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이자, 온 르완다 국민의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투치와 후투, 자신들이 어떤 민족인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으며 그저 평화롭고 순수하게 살던 르완다 국민들은 어느 순간부터 외세 세력이 그들을 투치와 후투라는 민족구별을 짓고 차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구별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한쪽이 키가 좀 더 크고 코가 좀 더 오똑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막무가내의 살상이 이루어지면서 그 대상이 된 투치족은 물론, 투치족과 친하게 지냈던 후투족, 그리고 후투족이면서도 투치족을 닮은 사람들은 모두 살인을 당한다.

세상엔 갖가지 전쟁, 싸움이 존재한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이기에 자신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견을 함께하지 않으면 배척하고 왕따를 시킨다. 뿌리가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갈라져 다른 종교가 되어버린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의 종교 싸움,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구교와 신교로 나눠 아직도 테러를 일삼는 사람들, 서양이 나눠놓은 이념의 차이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도 우리지만, 외모 상 구별되는 것으로 두 민족을 갈라놓고 전쟁을 부추기고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나 몰라라 발을 빼는 서양 세계의 이간질. 그에 백만 명이 희생을 당한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비이성의 극한을 말한다. 그 안에는 완전히 이성이 마비되어 무차별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의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진다. 그 모든 상황이 한 약한 인간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함께하면서 때론 가슴이 막히고 때론 어이가 없고 또 때론 함께 눈물짓기도 했다. 아름다운 나라 안의 한 단란한 가정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투치족 임마꿀레는 대학살 와중에 가족의 대다수를 잃는다. 그 둑음 또한 얼마나 비참하던지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임마꿀레 본인은 그녀를 다른 여섯 명과 숨겨준 목사님의 좁디좁은 욕실에서 52킬로였던 몸무게가 29킬로가 되면서 3개월을 버티고 생존한다. 

겉으로 그녀를 구해준 것처럼 보이는 이는 물론 목숨을 걸고 그들을 숨겨준 인간, 목사님이지만 목사님 또한 인간이기에 한없는 고마움을 돌리기엔 부족하다. 실제로 그녀를 구해준 이는 하느님이고 하느님 이전에 그녀의 기도와 묵상이었다. 둑음을 앞두고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살려달라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였고, 이미 둑은 가족과 친구, 민족을 위한 기도였고, 후에는 무지막지한 살인을 해댄 이들을 용서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잊기 힘든 그 끔찍한 과거를 치료하고 새 삶을 살도록 갈구하는 새로운 기도였다.

‘살인자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거듭 빌어봤지만 마음 깊은 속에서는 그들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갈등이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건 마치 악마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님, 제 닫힌 마음을 열고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저는 증오를 다스릴 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악행이 저를 이토록 비뚤어지게 했습니다. 도저히 그들에 대한 미움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주님, 저의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시고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물론 처음부터 아무 의심 없이, 아무 갈등 없이 기도와 묵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세상을 두고 본 하느님에 대한 원망, 살인자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에 대한 감정 등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가 악마적인 마음과 되살아나곤 했지만, 결국 그녀의 간절한 기도는 그녀의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기도가 된다.

‘그랬다. 살인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과 같았다. 벌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야만적인 폭도들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미숙한 영혼을 가진 아기들에 불과했다. (…) “용서해 주거라.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을 분이다.” 그날 나는 참된 용서로 가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 전에 본 <밀양>에서도 용서와 구원, 등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내용을 보면서 인간과 신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있었다. 실제적으로 어떤 교회나 성당 또는 절엘 나가는 건 아니지만 엄마가 처음 정말 심각하게 아팠을 때, 나름대로 ‘기도’라는 걸 했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비는 형식도 없는 기도였지만, 그때 어떤 영감에 대한 느낌이 있었다. 임마꿀레를 보면서 그때 했던 간절한 기도가 떠올랐다. 이젠 그 장소가 어디든, 어떤 신이든, 간절한 기도 끝엔 꼭 어떤 형식으로든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전쟁과 살육 같은 한계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도 모두 마비되어 버리는 상태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어쩌면 정말 간절한 기도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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