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외 지음, 김태훈 옮김 / 섬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호텔 르완다> 영화를 봤었다. 꼭 봐야할 것 같은 느낌에, 바쁜 와중에도 극장에 혼자 가서 봤었다. 그때 느낌이 생생하다. 거기선 한 호텔 지배인이 둑음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을 어떻게 구하려고 애썼는지를 그 당시의 경제, 정치, 사회를 보여줬었다. 그 영화는 영화를 보는 눈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었다. 가슴을 활짝 열고 온 마음으로 보게 한 영화였다. 남의 일이라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이미 지나버린 일이라고 생각했었던 이름으로만 듣던 르완다라는 나라가 그렇게 가까이 온 얼굴을 들이밀며 다가왔었다.

이 책, <내 이름은 임마꿀레>는 그 당시 그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그 둑음의 사선을 넘어 생존한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이자, 온 르완다 국민의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투치와 후투, 자신들이 어떤 민족인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었으며 그저 평화롭고 순수하게 살던 르완다 국민들은 어느 순간부터 외세 세력이 그들을 투치와 후투라는 민족구별을 짓고 차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 구별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한쪽이 키가 좀 더 크고 코가 좀 더 오똑하다는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고 막무가내의 살상이 이루어지면서 그 대상이 된 투치족은 물론, 투치족과 친하게 지냈던 후투족, 그리고 후투족이면서도 투치족을 닮은 사람들은 모두 살인을 당한다.

세상엔 갖가지 전쟁, 싸움이 존재한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이기에 자신과 다르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견을 함께하지 않으면 배척하고 왕따를 시킨다. 뿌리가 같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갈라져 다른 종교가 되어버린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등의 종교 싸움, 같은 기독교이면서도 구교와 신교로 나눠 아직도 테러를 일삼는 사람들, 서양이 나눠놓은 이념의 차이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도 우리지만, 외모 상 구별되는 것으로 두 민족을 갈라놓고 전쟁을 부추기고 막상 전쟁이 벌어지니 나 몰라라 발을 빼는 서양 세계의 이간질. 그에 백만 명이 희생을 당한다.

전쟁이라는 단어는 비이성의 극한을 말한다. 그 안에는 완전히 이성이 마비되어 무차별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의 인간으로서는 차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진다. 그 모든 상황이 한 약한 인간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이 이야기를 함께하면서 때론 가슴이 막히고 때론 어이가 없고 또 때론 함께 눈물짓기도 했다. 아름다운 나라 안의 한 단란한 가정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투치족 임마꿀레는 대학살 와중에 가족의 대다수를 잃는다. 그 둑음 또한 얼마나 비참하던지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임마꿀레 본인은 그녀를 다른 여섯 명과 숨겨준 목사님의 좁디좁은 욕실에서 52킬로였던 몸무게가 29킬로가 되면서 3개월을 버티고 생존한다. 

겉으로 그녀를 구해준 것처럼 보이는 이는 물론 목숨을 걸고 그들을 숨겨준 인간, 목사님이지만 목사님 또한 인간이기에 한없는 고마움을 돌리기엔 부족하다. 실제로 그녀를 구해준 이는 하느님이고 하느님 이전에 그녀의 기도와 묵상이었다. 둑음을 앞두고 그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살려달라는 그녀의 간절한 기도였고, 이미 둑은 가족과 친구, 민족을 위한 기도였고, 후에는 무지막지한 살인을 해댄 이들을 용서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잊기 힘든 그 끔찍한 과거를 치료하고 새 삶을 살도록 갈구하는 새로운 기도였다.

‘살인자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거듭 빌어봤지만 마음 깊은 속에서는 그들은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감당하기 힘든 갈등이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건 마치 악마를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님, 제 닫힌 마음을 열고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저는 증오를 다스릴 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악행이 저를 이토록 비뚤어지게 했습니다. 도저히 그들에 대한 미움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주님, 저의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시고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물론 처음부터 아무 의심 없이, 아무 갈등 없이 기도와 묵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런 세상을 두고 본 하느님에 대한 원망, 살인자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에 대한 감정 등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가 악마적인 마음과 되살아나곤 했지만, 결국 그녀의 간절한 기도는 그녀의 마음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는 기도가 된다.

‘그랬다. 살인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들과 같았다. 벌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야만적인 폭도들이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미숙한 영혼을 가진 아기들에 불과했다. (…) “용서해 주거라. 그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을 분이다.” 그날 나는 참된 용서로 가는 첫 걸음을 내딛었다.’

얼마 전에 본 <밀양>에서도 용서와 구원, 등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내용을 보면서 인간과 신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가 있었다. 실제적으로 어떤 교회나 성당 또는 절엘 나가는 건 아니지만 엄마가 처음 정말 심각하게 아팠을 때, 나름대로 ‘기도’라는 걸 했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비는 형식도 없는 기도였지만, 그때 어떤 영감에 대한 느낌이 있었다. 임마꿀레를 보면서 그때 했던 간절한 기도가 떠올랐다. 이젠 그 장소가 어디든, 어떤 신이든, 간절한 기도 끝엔 꼭 어떤 형식으로든 대답이 있다고 믿는다. 전쟁과 살육 같은 한계 상황에서 인간의 이성도 모두 마비되어 버리는 상태에서 우리가 기댈 곳은 어쩌면 정말 간절한 기도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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