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바타넨은 남들이 볼 때 근사하고 그럴듯한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차를 운전하던 동료가 산토끼를 친다. 부상당한 몸으로 토끼는 숲으로 몸을 피하고 바타넨은 그 토끼를 따라간다. 동료가 부르건 말건 상관 않고 바타넨은 그냥 토끼와 숲에 머물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바타넨은 실상 ‘온갖 불공정한 일을 보도한다면서 막상 사회의 근원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침묵하는’ 잡지를 위해 일하고, 처음에 부당한 일을 바로잡는 여론을 조성하는 일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시키는 일만 하면서 비판적인 지적은 포기한지 오래다. 이기적이고 심술궂은 아내는 ‘목소리만 들어도 열이 오를’ 정도라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알리자, 울기 시작하는 아내에게 “울려면 빨리 울어. 통화료가 비싸.”라고 냉소를 날린다.

그렇게 바타넨은 배를 팔아 챙긴 자금으로 토끼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다친 토끼를 돌보고, 그를 잡으려는 아내와 동료를 따돌리고 토끼와 동반자가 되어 목적도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가끔은 이유도 없이 공격적인 사람도 만나고 가끔은 친절한 경찰도 만나고 경찰의 소개로 그의 친구가 낚시를 하고 있는 호숫가에서 함께 지내기도 한다. 불이 나서 불을 끄러 다니기도 하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지만 그는 생각한다.

‘인생살이가 정말 풍파도 많지만 (...) 헬싱키보다는 여기가 천배는 좋아’라고.

점점 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토끼와 그는 잡초를 베는 일용직 일을 얻어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힘든 일도 하지만 덕분에 정치 문제로 열을 올릴 필요도 없어졌고 시선을 끄는 여자들도 없었으므로 싸구려 섹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공사판에서 일용직을 얻어 일하다가 만난 술꾼 쿠르코와는 강바닥에 잠겨있던 옛 무기들도 함께 꺼내고 벌목꾼을 할 때는 일용할 양식을 약탈해가는 뚱뚱한 까마귀와 한판 승부도 벌였다. 토끼를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에게선 총으로 위협까지 해가며 토끼를 구해 오기도 했다. 얼토당토않은 일에 연루되기도 하는데, 간혹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토끼 때문에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또 간혹은 엄청 술을 마셔 기억도 나지 않는데 결혼 약속까지 해버렸단다. 산장에서는 곰의 습격을 받아 토끼도 그도 다쳤다. 허나 그것이 토끼에게도 그에게도 또 다른 목적이 된다. 곰을 추적해 둑이는 것이다. 소련의 국경을 넘어서까지 쫓아가 곰을 잡지만 수차례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감옥 생활도 하게 된다.

바타넨은 감방에서 토끼와 도망치기 전에 감옥으로 찾아와 인터뷰를 한 작가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마지막 말을 했다. “인생이란 그런 겁니다.”

매일 매일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우리는 습관처럼 먹고 마시고 일을 하고 잠을 잔다. 바타넨처럼 무슨 일을 하던 처음에는 모두 의욕과 열성에 넘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도 모르게 된다. 간혹은 별 것 아닌 감정싸움에 휘둘려 언성을 높이고, 늘 그 밥에 그 나물인 정치판 때문에 술도 마셔대고, 천정부지로 솟는 물가에 비해 오르지 않는 월급에 절망하고, 어릴 적엔 더 못났던 친구 넘이 무슨 복인지 결혼도 잘하고 엄청 부자로 사는 모습에 화가 나고, 내 꼴은 왜 늘 이 모양 이 꼴인지 쪽팔리기까지 한다. 그런 일상에서 우연히 만난 토끼 한 마리가 우리의 일상을 확 바꿔 놓는다. 그 토끼를 알아보고 따라나설 용기가 내게도 있을까? 말도 못하는 토끼가 무의미했던 일상을 다른 의미로 바꿔놓는 것처럼 나도 어떤 계기로 인해 무의미를 의미로 바꿀 수 있을까. 내겐 그 계기가 꼭 토끼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멋진 왕자로 변신할 두꺼비여도 좋으리라.                

북유럽의 정갈하고 깔끔한 나라에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는 이 작품으로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일상과 함께 우리를 일상에서 탈출시켜줄 토끼가 살고 있는 핀란드의 울창한 숲을 멋들어지게 보여주고 있다. 황당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마치 맑은 숲 속에 흐르는 강물처럼 시원하기만 하다.  

작가의 <목 매달린 여우의 숲>을 읽고 있는데, 어찌 보면 비슷한 분위기고 어찌 보면 또 다른 작품 같다. 나도 모르게 그의 블랙 유머에 푹 빠지고 있다. <기발한 자살 여행>도 무척 궁금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08-2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트로 파실린나, 기억해두렵니다. 블랙유머가 빛나는가 봐요^^
진달래님, 더위에 어찌 지내시나요? 리뷰 반가워 달려왔어요.

진달래 2007-08-23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추천할만한 작가예요. ^^
이 작품도 재밌지만 <목 매달린 여우>도 정말 독특하고 재밌네요. ^^
혜경님도 잘 지내시지요? 휴가를 좀 길게 다녀왔어요. ^^;;
 
빅 머니
이시다 이라 지음, 오유리 옮김 / 토파즈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이 제목에 속으로 한참 웃었다. 강남의 ‘큰손’이라든가 굳이 ‘큰돈’이라 하지 않고 빅머니라 하다니 말이다. 더구나 ‘파도 위의 마술사’라는 멋진 원제를 놓아두고 저런 단어를 제목으로 삼다니. 작가도 아니고 사실 일개 독자일 뿐인 나도 ‘돈’이라는 단어 대신에 늘 ‘머니’라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저 제목과 모종의 공감대랄까 그런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내가 ‘돈’이라는 우리 말 대신에 ‘머니’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 어느 새 물질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항 때문이다. 너무 현실을 모른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난 아직 물질이나 ‘돈’ 대신에 사람을 더 믿는다. 시집 간 친구들 말의 공통점은 모두 ‘돈’ 많은 넘(이 단어도 실제 단어보다 뜻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사용한다)을 물으라는 것이다. 그게 최고라고. 이 세상엔 아직도 그 비인간적인 ‘돈’보다 더 가치 있고 더 행복할 수 있는 따뜻한 많은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어느 새 우리 세상은 ‘돈’이 하나의 진리가 되어버렸다. ‘돈’ 때문에 울고 ‘돈’ 때문에 웃고. 그 넘의 ‘돈’이 뭐길래 말이다.

이 작품은 ‘돈’에 대한 얘기이다. 읽다 보니 재미도 있고 흥미진진하고 즐거웠다. 한 젊은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못하자, 카지노에서 좀스러운(!) 도박을 하며 생활비를 벌고 그 승률을 따지며 어떻게든 먹고 산다. 확률이든 운이든 어떤 식으로든 카지노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돈’을 잃고 빈털터리가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내게 기계와 승부를 하는 주인공의 승률에 좀 의아하기도 하고, 어떻게 기계와 온종일 시간을 보내며 ‘돈’을 번다고 생각하는지 특이하기도 했다. 내게 일이란 신성한 것이고 ‘돈’이란 그 일에 대한 대가일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띤다고 생각하기에 그런 식의 삶은 미래가 없는 인생 낭비로만 보였다.

물론 카지노에서 젊은이가 보내는 시간은 이야기의 도입부에 불과하다. 젊은이는 거기서 한 노인을 만나고 그 노인에 의해 주식을 알게 되고 무수한 ‘돈’이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마켓’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그것도 공부고 노력이고 또 다른 세상의 형태이다. 비록 물건을 생산하거나 육체적 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켓은 어찌 되었건 ‘돈’이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권력세상인 것이다. ‘투자가 편한 직업이라고? 새빨간 거짓말. 몸을 움직이지 않는 만큼 머리와 심장은 더할 수 없이 혹사당해야 한다.’고 시라토는 말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또한 그에 대한 쾌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단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조건이지만.

주식의 원리는 더 없이 간단하다. 주가가 쌀 때 사서 비쌀 때 파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의 이익을 남기는 것이 주식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식의 이점을 최대한도로 끌어내도 난 주식을 믿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식을 20억어치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20억을 손에 쥐기 전에는 내게 그 20어치의 가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 다음 날 장이 폭락하거나 회사에 악재가 낀다면 그 가치는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소극적인 생각을 갖고 부자 되긴 글렀다고 할 것이다. 물론이다.

요즘엔 펀드가 한창이다. 은행원이 하도 꼬셔서 작년에 펀드를 네 개나 들었었다. 큰 액수도 아니었고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보다는 펀드가 뭔지 알고 싶은 호기심에 시작했었다. 5백만원을 넣은 중국펀드. 늘 원금 아래에서 놀더니, 중국 시장에 거품이 끼었다는 소식에 어느 날 4백2십만원이 되었다. 최악의 상황은 제로가 되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시작하긴 했지만, 내가 힘들여 번 ‘돈’이 물거품이 된다고 생각하니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잊어버리고 한 3년 놓아두라고 했지만, 난 6개월 만에 그 펀드라는 것이 내 적성엔 안 맞는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래서 장이 좋아져 10% 정도의 이익이 나자, 곧 해지해버렸다. 장이 더 좋아져 남들이 아무리 20% 아니 200% 이익이 났다고 좋아해도 난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주식에 손을 대거나 펀드를 하지 않을 작정이다. 왜냐… 정신적인 노력과 고통도 노동이라면 노동이겠지만 그 안엔 생산적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을 쫓아 이익이 났다 싶으면 웃고 손해가 났다 싶으면 울고. 그런 정신적 피폐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난 그보다는 땀 흘려 번, 적은 내 ‘돈’을 내 손에 쥐고 웃는 것이 더 좋다.           

물론 이 이야기가 단지 그저 ‘돈’과 ‘마켓’ 이야기라면 소설이 아니라 경제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엔 다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돈’을 매개로 ‘돈을 읽는 흐름’과 ‘돈’을 넣고 ‘돈’을 먹는 법이 인간 심리와 함께 아주 흥미롭게 전개되어있다. 또한 퇴직 노인들을 상대로 한 보험사기, 그에 따른 인생사도 복수와 얽혀, 어찌 보면 신나는 액션물처럼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재밌다. 첫 투자를 실패로 날리자, 노인이 젊은이에게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분할하는 것이네. 마켓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욕망을 갖고 있어. 하지만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야만적인 사람은 시장에선 단순한 사냥감이 되고 말지. 갈기갈기 뜯겨 쥐도 새도 모르게 퇴출된다 그거야. 자금을 분할함으로써 자신의 욕망도 분할한다.”

은행과 손해보험사의 변액보험사기를 당해 자살까지 내몰리는 노인들을 구한다는 복수를 명분으로 내세우긴 했지만 이 이야기는 결국 ‘돈’ 놓고 ‘돈’ 먹기의 얘기인 것이다. 공모와 사기도 불사하고 시라토를 감옥에까지 가게 하는 고즈카 노인은 결국 자신의 딜에는 성공했다. 또한 마지막 시라토와 헤어지기 전에 시라토에게 하는 말은 마치 진리처럼 들린다. “일본인들은 돈을 뒤가 구린 것, 더러운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돈 가지고 돈 버는 일은 땀 흘리지 않고 득을 보는, 나쁜 일이라 본다고. 이제는 그런 단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딜에서 만약 실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한 시라토를 감옥에 가게 하면서까지 그 일을 했어야만 했는가? 감옥에서 시라토가 잘못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정도의 공부를 해서, 연구와 분석을 해서 누구나 마켓에서 ‘돈’을 벌까? 누구나 노인이 꾸몄던 공모와 사기를 쳐야 했다면, 또한 감옥에까지 가야 한다면 누구나 그 일을 할까? 그렇다면 그 마켓이란 곳은 모든 개미 투자자들의 희망이고 삶의 빛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에 따르는 불행도 만만치 않은 것이 아닐까? 이야기는 흥미롭고 재밌었지만 난 결국 이야기 기조에 들어있는 원칙과 방법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럼 그 리스크는 누구 몫인데? 결국 투자자, 내 몫이 아닌가. 그래도 마켓의 ‘빅머니’ 파도에 몸을 던지겠는가? 당신이 고즈카 노인처럼, 시라토처럼 ‘파도 위의 마술사’가 될 자신이 있다면, 해 보시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백 쪽도 안 되는 아주 작은 책이다.
상큼사과님의 추천으로 읽었는데, 생각보다는 특이했다.
그림도 요즘 따스한 글에 많이 등장하는 스타일로 따스하고 정감이 간다.
작은 책이 무척 예쁜 책이다.

하지만 내용은...
모두 7편의 단편이 들어있는데, 하나 같이 특이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지구가 둥근지 확인하러 떠나는 남자.
똑같은 일상의 언어를 자신만의 언어로 바꾸는 남자.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부스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대한 다른 해석.
발명을 하다 세상에 나와보니 자신이 발명한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는 세상.
열차는 타지 않으면서 열차 시간표는 모두 외우는 남자.
존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되는 요도크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 등등

처음에 1편, 2편 읽어나가면서는 참 황당했다.
아마 주제를 잡아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다 읽고 나서야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내게는 특이하게 보이는 주인공들의 일상이
어쩌면 나도 너도 세상도 이렇게 살다가는 모두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보가 넘쳐나고 편리한 물건들이 활개를 치는 가운데,
인간은 어쩌면 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지고
점점 더 타인과, 또 세상과 소통이 어려워지고
자신도 모르게 단절과 고립으로 향해가는 것이 아닐까.

따스하고 유머스런 이야기 가운데,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전 집을 떠날 때 - 창비소설집
신경숙 지음 / 창비 / 199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신경숙은 내 기억에 늘 감성이 줄줄 흘러넘치는 여성스러운(!) 작가였다. 그녀는 왜 그렇게 진지한 것인가. 글마다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그 진지함과 성실함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농담도 없고 유머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냉소적인 데가 있나, 지적 유희를 즐길 줄 알길 하나. 그냥 여성적인 감성이 간혹은 감상적인 데까지 가 버려 늘 부담스럽게 여겨지던 작가였다. 슬픔에 침잠하고 고통이나 아픔 앞에서도 가만히 내면으로 들어앉아 버리는 작가, 그것이 그 동안 내가 느낀 모습이었다. 단편 몇 개 읽은 게 다인데도 그 포스가 이 정도였다. 어쩌면 작가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슬픔과 아픔이 글을 통해 그대로 내게 전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너거 어메조차 나한티 어째 그르케 말을 안허냐고 답답히서 살지를 못허겄다고 해도 나는 암말도 안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였다. 말이 무서웠지야. 천지간에 양친도 없는 사람이 허는 말을 누가 듣기나 허겄나 싶기도 허더라. 근디 그것이 병이 되야서 돌아왔는갑다…… 안 글면 어쩌서 내가 이렇다냐?’

그런 생각은 이 작품집을 읽고 나서 좀 바뀌었다. 어쩌면 그 동안 내가 너무 단편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그녀를 대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든다. 이 작품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는 친구가 선물해준 헌책이었다. 새로 나온 책, <리진>을 읽기 전에 다시 한 번 그녀에 대한 생각을 모아보자고 읽기 시작했다. 물론 작품들 모두 꽤 오래된 작품들이고 몇 개는 이미 읽은 작품들이었다. 작품집 자체도 이미 십년도 더 된 작품집이지만, 그래도 그 동안의 편견을 좀 더 씩씩한 쪽으로 바꿀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젠 맘 편히 <리진>을 읽으러 갈 수 있겠다. 

오래된 책이지만 그냥 넘어가긴 아쉬우니 그래도 간단한 감상만 적어보자. <감자 먹는 사람들> <벌판 위의 빈집> <모여 있는 불빛>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빈 집>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 <전설> <깊은 숨을 쉴 때마다> 등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이 작품집은 전체적으로는 신경숙표 감성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덤으로 신경숙표 전설의 고향(!)도 있었는데, 비오는 날 밤에 읽다가 으스스해 둑는 줄 알았다. <벌판 위의 빈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와 <빈집>이 참 스산했다. 다시 읽은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는 예전에 읽을 땐 그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설렁설렁 읽어서였겠지만 다시 읽으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의외로 맘에 들었다. <모여 있는 불빛>이 시골과 가족 얘기여서였는지 의외로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이었고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여성적인 감성과 삶의 긍정에서 씩씩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아픔을 간직한 나도, 쌍둥이 동생을 잃은 처녀도, 두 달에 한번 피를 갈러가도 내처 엎어지면서도 자전거를 배우고 베란다에 꽃을 피우고 이별 선물로 문주란 씨앗을 주는 소녀를 통해서 더 강한 인생의 씩씩함을 배우는 게 아닐까.

신경숙에게 있어 여전히 소설은 그녀를 견디게 해주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그 동안 그것이 내게 부담스러운 감성이듯 느껴졌으므로. ‘그녀는 어느 자리에서 말했었다. 내 소설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소설이란 우선 나 자신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기른 헛것들을 더 이상 가두어놓을 수가 없어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을 때, 그때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잊는다고,고.’ 그녀는 <모여 있는 불빛> 속 소설가 그녀를 통해 이렇게 밝혔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7년 6월에 읽은 책


81. 사랑은 배워야 할 감정입니다, 월터 트로비쉬, 한국 기독학생회 출판부
82. How to read 셰익스피어, 니콜러스 로일, 이다희역, 웅진지식하우스
83.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정영목역, 랜덤하우스 코리아
84. 우리들의 스캔들, 이현, 창비
85. 내 이름은 임마꿀레, 임마꿀레 일리바기자, 김태훈역, 섬돌
86. 하얀 달의 여신, 천양희, 하늘연못
87. 감기, 윤성희, 창비
88. 바람의 사생활, 이병률, 창비
89. 이현의 연애, 심윤경, 문학동네
90. 바리데기, 황석영, 창비

2007년 7월에 읽은 책


91.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비
92. 검은 꽃, 김영하, 문학동네
93. 안녕하세요, 김주하입니다, 김주하, 랜덤하우스코리아
94. 사자개, 양쯔쥔 저, 이성희 옮김, 황금여우 
95. 사기공화국에서 살아남기, 김주덕, 가야북스 
96. 누나! 결혼할래, 박주연, 푸르름
97. 우리 엄마, 앤서니 브라운 저, 허은미 옮김, 웅진주니어 
98. 이상한 소파, 에드워드 고리 저, 윤희기 옮김, 미메시스 
99. 세계 역사, 숨겨진 비밀을 밝히다, 장장년, 장영진 편저, 김숙향 옮김, 눈과마음
100. 기억전달자, 로이스 로리 저, 장은수 옮김, 비룡소 
101.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신경숙, 창비
102.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문학과 지성사
103. 새, 오정희, 문학과 지성사 

읽고 싶은 책들도 많고 읽어야 할 책들도 많은데,

시간은 별로 없고, 어째야 좋으냐...

떼어먹은 리뷰들도 마저 써야 할 텐데... 게을러지네.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홍수맘 2007-08-0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엄청나네요. 부럽사와요.
참!. 진하게 칠한 책 제목은 뭘 뜻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진달래 2007-08-02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진한 색은 나름대로 제게 좋았던 책이에요. 이런저런 이유로요. ^^*

dd 2007-10-01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위의 목록에 읽어야 할 책 많아요!

진달래 2007-10-02 09:14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