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와 함께한 그해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박광자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바타넨은 남들이 볼 때 근사하고 그럴듯한 기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차를 운전하던 동료가 산토끼를 친다. 부상당한 몸으로 토끼는 숲으로 몸을 피하고 바타넨은 그 토끼를 따라간다. 동료가 부르건 말건 상관 않고 바타넨은 그냥 토끼와 숲에 머물기로 한다.

생각해보면 바타넨은 실상 ‘온갖 불공정한 일을 보도한다면서 막상 사회의 근원적인 병폐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침묵하는’ 잡지를 위해 일하고, 처음에 부당한 일을 바로잡는 여론을 조성하는 일에 대한 자랑스러움도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시키는 일만 하면서 비판적인 지적은 포기한지 오래다. 이기적이고 심술궂은 아내는 ‘목소리만 들어도 열이 오를’ 정도라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알리자, 울기 시작하는 아내에게 “울려면 빨리 울어. 통화료가 비싸.”라고 냉소를 날린다.

그렇게 바타넨은 배를 팔아 챙긴 자금으로 토끼와 함께 여행을 시작한다. 다친 토끼를 돌보고, 그를 잡으려는 아내와 동료를 따돌리고 토끼와 동반자가 되어 목적도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가끔은 이유도 없이 공격적인 사람도 만나고 가끔은 친절한 경찰도 만나고 경찰의 소개로 그의 친구가 낚시를 하고 있는 호숫가에서 함께 지내기도 한다. 불이 나서 불을 끄러 다니기도 하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지만 그는 생각한다.

‘인생살이가 정말 풍파도 많지만 (...) 헬싱키보다는 여기가 천배는 좋아’라고.

점점 더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 토끼와 그는 잡초를 베는 일용직 일을 얻어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개의치 않고 힘든 일도 하지만 덕분에 정치 문제로 열을 올릴 필요도 없어졌고 시선을 끄는 여자들도 없었으므로 싸구려 섹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공사판에서 일용직을 얻어 일하다가 만난 술꾼 쿠르코와는 강바닥에 잠겨있던 옛 무기들도 함께 꺼내고 벌목꾼을 할 때는 일용할 양식을 약탈해가는 뚱뚱한 까마귀와 한판 승부도 벌였다. 토끼를 제물로 바치려는 사람에게선 총으로 위협까지 해가며 토끼를 구해 오기도 했다. 얼토당토않은 일에 연루되기도 하는데, 간혹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토끼 때문에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또 간혹은 엄청 술을 마셔 기억도 나지 않는데 결혼 약속까지 해버렸단다. 산장에서는 곰의 습격을 받아 토끼도 그도 다쳤다. 허나 그것이 토끼에게도 그에게도 또 다른 목적이 된다. 곰을 추적해 둑이는 것이다. 소련의 국경을 넘어서까지 쫓아가 곰을 잡지만 수차례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 발각되어 감옥 생활도 하게 된다.

바타넨은 감방에서 토끼와 도망치기 전에 감옥으로 찾아와 인터뷰를 한 작가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면서 이렇게 마지막 말을 했다. “인생이란 그런 겁니다.”

매일 매일을 그럭저럭 살아가는 우리는 습관처럼 먹고 마시고 일을 하고 잠을 잔다. 바타넨처럼 무슨 일을 하던 처음에는 모두 의욕과 열성에 넘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차츰 반복되는 일상에 젖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도 모르게 된다. 간혹은 별 것 아닌 감정싸움에 휘둘려 언성을 높이고, 늘 그 밥에 그 나물인 정치판 때문에 술도 마셔대고, 천정부지로 솟는 물가에 비해 오르지 않는 월급에 절망하고, 어릴 적엔 더 못났던 친구 넘이 무슨 복인지 결혼도 잘하고 엄청 부자로 사는 모습에 화가 나고, 내 꼴은 왜 늘 이 모양 이 꼴인지 쪽팔리기까지 한다. 그런 일상에서 우연히 만난 토끼 한 마리가 우리의 일상을 확 바꿔 놓는다. 그 토끼를 알아보고 따라나설 용기가 내게도 있을까? 말도 못하는 토끼가 무의미했던 일상을 다른 의미로 바꿔놓는 것처럼 나도 어떤 계기로 인해 무의미를 의미로 바꿀 수 있을까. 내겐 그 계기가 꼭 토끼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멋진 왕자로 변신할 두꺼비여도 좋으리라.                

북유럽의 정갈하고 깔끔한 나라에서 작가 아르토 파실린나는 이 작품으로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일상과 함께 우리를 일상에서 탈출시켜줄 토끼가 살고 있는 핀란드의 울창한 숲을 멋들어지게 보여주고 있다. 황당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마치 맑은 숲 속에 흐르는 강물처럼 시원하기만 하다.  

작가의 <목 매달린 여우의 숲>을 읽고 있는데, 어찌 보면 비슷한 분위기고 어찌 보면 또 다른 작품 같다. 나도 모르게 그의 블랙 유머에 푹 빠지고 있다. <기발한 자살 여행>도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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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8-22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트로 파실린나, 기억해두렵니다. 블랙유머가 빛나는가 봐요^^
진달래님, 더위에 어찌 지내시나요? 리뷰 반가워 달려왔어요.

진달래 2007-08-23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추천할만한 작가예요. ^^
이 작품도 재밌지만 <목 매달린 여우>도 정말 독특하고 재밌네요. ^^
혜경님도 잘 지내시지요? 휴가를 좀 길게 다녀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