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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집을 떠날 때 - 창비소설집
신경숙 지음 / 창비 / 199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신경숙은 내 기억에 늘 감성이 줄줄 흘러넘치는 여성스러운(!) 작가였다. 그녀는 왜 그렇게 진지한 것인가. 글마다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이 그 진지함과 성실함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농담도 없고 유머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냉소적인 데가 있나, 지적 유희를 즐길 줄 알길 하나. 그냥 여성적인 감성이 간혹은 감상적인 데까지 가 버려 늘 부담스럽게 여겨지던 작가였다. 슬픔에 침잠하고 고통이나 아픔 앞에서도 가만히 내면으로 들어앉아 버리는 작가, 그것이 그 동안 내가 느낀 모습이었다. 단편 몇 개 읽은 게 다인데도 그 포스가 이 정도였다. 어쩌면 작가가 마음속 깊이 간직한 슬픔과 아픔이 글을 통해 그대로 내게 전해져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너거 어메조차 나한티 어째 그르케 말을 안허냐고 답답히서 살지를 못허겄다고 해도 나는 암말도 안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였다. 말이 무서웠지야. 천지간에 양친도 없는 사람이 허는 말을 누가 듣기나 허겄나 싶기도 허더라. 근디 그것이 병이 되야서 돌아왔는갑다…… 안 글면 어쩌서 내가 이렇다냐?’
그런 생각은 이 작품집을 읽고 나서 좀 바뀌었다. 어쩌면 그 동안 내가 너무 단편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그녀를 대하지 않았나 하는 후회가 든다. 이 작품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는 친구가 선물해준 헌책이었다. 새로 나온 책, <리진>을 읽기 전에 다시 한 번 그녀에 대한 생각을 모아보자고 읽기 시작했다. 물론 작품들 모두 꽤 오래된 작품들이고 몇 개는 이미 읽은 작품들이었다. 작품집 자체도 이미 십년도 더 된 작품집이지만, 그래도 그 동안의 편견을 좀 더 씩씩한 쪽으로 바꿀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젠 맘 편히 <리진>을 읽으러 갈 수 있겠다.
오래된 책이지만 그냥 넘어가긴 아쉬우니 그래도 간단한 감상만 적어보자. <감자 먹는 사람들> <벌판 위의 빈집> <모여 있는 불빛>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빈 집>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 <전설> <깊은 숨을 쉴 때마다> 등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 이 작품집은 전체적으로는 신경숙표 감성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덤으로 신경숙표 전설의 고향(!)도 있었는데, 비오는 날 밤에 읽다가 으스스해 둑는 줄 알았다. <벌판 위의 빈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와 <빈집>이 참 스산했다. 다시 읽은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는 예전에 읽을 땐 그 의미를 다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설렁설렁 읽어서였겠지만 다시 읽으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의외로 맘에 들었다. <모여 있는 불빛>이 시골과 가족 얘기여서였는지 의외로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이었고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여성적인 감성과 삶의 긍정에서 씩씩함이 느껴져서 좋았다. 아픔을 간직한 나도, 쌍둥이 동생을 잃은 처녀도, 두 달에 한번 피를 갈러가도 내처 엎어지면서도 자전거를 배우고 베란다에 꽃을 피우고 이별 선물로 문주란 씨앗을 주는 소녀를 통해서 더 강한 인생의 씩씩함을 배우는 게 아닐까.
신경숙에게 있어 여전히 소설은 그녀를 견디게 해주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그 동안 그것이 내게 부담스러운 감성이듯 느껴졌으므로. ‘그녀는 어느 자리에서 말했었다. 내 소설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힘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소설이란 우선 나 자신을 견디게 해주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기른 헛것들을 더 이상 가두어놓을 수가 없어 문장으로 풀어내고 있을 때, 그때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잊는다고,고.’ 그녀는 <모여 있는 불빛> 속 소설가 그녀를 통해 이렇게 밝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