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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거나 죽지않고 살 수 있겠니 - 제5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이지형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계속 제목을 보면서 내용이 절망적인 소설일 거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언뜻 보기에 꼭 그럴 것 같지 않느냐 말이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망하지 않고도 둑지 않고도 잘 살던 모던 보이와 모던 걸 들의 쿨한(!) 연애담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물론 연애담이라고 단칼에 자르기엔 당시 상황과도 연결되어 있어, 등장인물들과 결말이 좀 억울할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렇게 보였으니 할 수 없다.
작가 이지형은, 이젠 이지민이라는 이름으로 얼마 전에 <그 남자는 나에게 바래다 달라고 한다>를 발표한 작가다. 너무나 현재스러워서 진부하기까지 했던 작품집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신선도에 있어서도 이 작품이 훨씬 재밌었다. 물론 20세기 초, 경성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렸다고 해서 꼭 그렇게 느낀 것만은 아니다. 신선하면서도 독특하고 그러면서도 사랑과 연애에 대해선 지금이나 그때나 보편적인 감정을 잘 그렸기 때문에 그런 느낌을 갖게 된 것 같다.
실제로 경성이 그 시절에 어땠는지 난 모른다. 늘 그렇듯이 영상매체나 글로써만 짐작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이 그리고 있는 당시 경성은 마치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던 것만큼이나 리얼하게 다가온다. 흔히 그 시절은 우리에게 독립투사나 친일 둘 중 하나로써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글을 이끌어가는 이 주인공 이해명은 겉으로 보기엔 친일이다. 부유한 조상에다 제국대학까지 나오고 총독부에 근무하는 잘 생기고 멋진 모던 보이다. 그렇다고 이 남자가 알고 보니 독립투사다, 뭐, 그런 어설픈 반전 같은 건 없다. 비스무리한 건 조금 있지만…
이해명, 그는 자신을 떠난 여자, 알고 보니 모든 것이 거짓말에다 천의 얼굴을 가진 여자, 조난실을 찾아 헤맨다. 곁엔 양심에 찔려하면서도 경성에서 멋쟁이 바람둥이로 통하는 신스케와 총독부 총무국 인사국장의 부인이면서 자신의 부정까지도 우아하고 유쾌하게 즐길 줄 아는 유키코와의 관계,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사랑과 연애, 배신 등등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벌이는 세상이다.
“여자들은 흔히 남자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데, 완전 사기죠. 어쩔 수 없다는 말은, 운동회 날 비가 올 때나 하는 말이고…… 여자들은 대개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서도 물론 아니고, 다 필요해서 하는 일입니다. 왜, 해명씨는 상처받는 게 두렵습니까? 사람들은 상처에 대해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이 상처 받는 걸 때로는 즐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상한 일이죠? 사랑은 주고받지 못해 환장을 하면서 상처는 당연히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알다니. 넘어온 공을 받아치지 못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다니, 바보들 아닙니까?”
여자가 남자를 왜 배신하느냐는 이해명의 질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남편을 배반하고 있는 유키코가 대답한 내용이다.
사실 이 책에 모던 보이 모던 걸 들의 연애담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부분이 제일 커 보여 거기에 초점을 맞춰 읽었을 뿐이다. 당시의 시대적인 멋과 분위기가 정말 생생하게 살아 있어, 독립이냐 친일이냐의 이분법적인 소설에서 벗어난 것이 이 작품의 또 하나의 약점이자 장점처럼 보였다. 결말의 이해명의 태도가 이해가 잘 안 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멋스러운 작품이었다.
‘시간은 언젠가 한번은 기회를 준다’는 말이 이 책을 다 읽고 내가 마음에 담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