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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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내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한다면, 난 어떻게 될까? 너무나 연약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사고로 얼마든지, 언제든지 내게 팔, 다리를 못 쓰게 되거나 온몸이 마비되거나 또는 실명이나 청각을 상실하거나 말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겠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그래도 제일 견디기 힘들 것 같은 경우는 역시나 실명이다. 그런데 여기 한 남자가 운전하고 길을 가다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게 이 눈먼 자들의 도시가 되는 시초이다. 사람들은 하나, 둘씩 그렇게 눈이 멀어버린다.

‘안 보여, 안 보여. (...) 아무것도 안 보여요, 마치 안개 속이나 우유로 가득한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제 사라마구는 먼저 눈이 먼 사람들의 도시를 환상 속에서 펼쳐 보인다. 하지만 그 환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와 최악의 모든 본성, 감정 그리고 처절하고도 끔찍한, 현실적인 사고를 보여준다. 나도 모르게, ‘세상에... 이런, 세상에...’ 감탄에 감탄을 하며 읽었다. 환상을 시작으로 눈먼 자들의 세상으로 들어갔지만 그 세상은 너무나 실재적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처음엔 눈이 먼 자와 눈이 아직 멀지 않은 자 그리고 눈이 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자들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곧 눈이 멀 것이라고 생각한 의사의 아내가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고 눈이 먼 자들이 행하는 갖가지 행동을 그려준다. 너무나 눈이 멀고 싶은 그녀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자로서 해야 할 행동이 있었고, 눈이 먼 자들의 지독하고 끔찍한 본성만 남은 원초적인 모습을 봐야했으며, 그건 그녀에게 더 이상 환상이 아닌, 버텨내야할 현실이었다.     
 
‘그녀는 조금씩 힘을 회복했다.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까보다 느린 속도였고 또 마음은 고요했다. 마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것과 마주친 것처럼. 그녀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두 손과 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 갑자기 지친 몸이 그녀에게 너는 늙었다고 말했다. 늙었지, 그리고 살인자이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다시 살인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언제 살인이 필요할까, 그녀는 생각하면서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이미 죽은 것이 될 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말이야, 그저 말일 뿐이야.’

모두가 눈이 멀어버렸으니 이제 더 이상 글도 소용없는 세상이다. 이름도 필요 없다. 그저 누구나 눈먼 자일 뿐이다. 눈먼 자로서의 삶은 삶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그들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어쩌면 삶은 진짜 어디로 갈지 모르는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렸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에요. (...) 어떤 면에서는 나도 눈이 멀었지, 당신들의 먼 눈이 내 눈도 멀게 한 거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면 나도 더 잘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눈이 있으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을 신랄하고 명확하게 꼬집은 최고의 작품이다. 존재하는데 그 존재를 아무도 보지 못하고 그저 생존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눈을 가졌으면 그 눈으로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라는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다. 눈을 떴으되 눈먼 자들인 우리 모두에게 말이다.

끔찍한 장면이 너무 많아 눈을 감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토록 강렬하고 멋진 작품을 얼마나 오랜만에 만났는지. 최고로 끔찍했지만 또 최고로 멋진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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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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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영원한 고전이라든가 베스트셀러라든가를 읽고 실망할 때가 있다. 글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는 들려오는 소리에 너무 큰 기대를 했다가 ‘그 정도는 아닌 걸’ 하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겐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다. 물론 좋은 책이었지만 내 마음엔 여전히 ‘그 정도는 아닌 걸’이라는 생각이 남아있다. 그래서 이번엔 별 기대 없이 읽었다. 그랬더니 오히려 이 작품집이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것 같다. 이 변덕 같으니라고.

하지만 내 마음을 잡아 끈 작품은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와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이었다. <젤리빈>과 <행복의 잔해>도 꽤 괜찮았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물론 그 소재의 상상력이 대단히 뛰어난 작품이었지만 같은 소재로 이야기를 이끌어간 <막스 티볼리의 고백>에 비해, 단편이라 그랬는지 그 재미나 비극성에서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영화가 나왔다는데도 별로 보고픈 생각이 안 들었다.

반면 <리츠칼튼 호텔만 한 다이아몬드>는 친구를 갖고 싶은 호의와 자신만을 위해 친구를 희생시키는 그 이기심과 너무 많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전쟁을 해야 하는 그 비극성이 섬뜩함으로 다가왔다. 치졸한 이기주의가 선의와 당위성으로 포장되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 잘 드러내준 작품이었다. ‘순결하고도 일관된 이기주의’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작품이다.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데, 아니, 한 남자가 생각하는 한 여자가 등장하는데 결국은 평범한 인생을 산다는 게 어떤 건지 그 씁쓸함을 잘 그리고 있다. 우연이 필연이 되었더라면 이 남자의 인생은 좀 달라졌을까. 

‘멀린은 아홉시에 아주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에 들어가 문을 꽉 닫은 뒤 그는 마른 수족을 떨면서 잠시 그러고 서 있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평생 바보였음을 깨달았다.
“오 적갈색 머리카락 마녀 같으니!”
하지만 너무 늦었다. 그는 너무 많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신의 섭리를 거역한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천국뿐이었다. 그곳에 가면 그 자신처럼, 이승의 삶을 제대로 쓰지 않고 낭비해버린 자들만 만나게 되리라.’ 

<행복의 잔해>는 작가 자신도 감상에 젖은 소품이라는 비난을 각오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진정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주는 것 같다. 삶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오히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이 두 사람에게 삶은 재빨리 왔다가 사라져버렸고, 쓰디쓴 악감이 아니라 동정을, 환멸이 아니라 오로지 아픔을 남겨놓았다. 그들이 악수를 나눌 때, 이미 달빛이 충분히 퍼져 있어서 둘은 서로의 눈 속에 솟아오르는 상냥한 친절을 볼 수 있었다.’   

맨 뒤의 작가가 직접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각각의 설명도 아주 흥미로웠고 옮긴이의 말도 이 작품의 시대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작가에게 보낸 독자의 편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재밌지 않은가. 

“선생님, <콜리어스>지에 실린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단편소설 작가치고 선생님은 아주 훌륭한 미친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평생 허풍치고 뻥치는 소리를 꽤나 많이 들어왔는데, 이제까지 본 뻥쟁이 중에서도 선생님이 최곱니다. 선생님한테 편지지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또한 이 옮긴이의 말이 어찌나 맘에 와 닿던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경우를 만나거나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 공감하지 않던가 말이다.

‘틀림없이 우스개인데 역자부터가 우습지 않아 막막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이라든가 거장이라든가 정전이라든가, 후대가 붙인 이런 저런 권위의 딱지들을 떼어버리고 다시 보면, 이 가볍고 팔랑거리면서도 미묘하게 축축한 환멸과 슬픔의 무게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은 우리 눈앞에 이제는 사라진 한 시대의 풍경들을 쓱쓱 선명하게 스케치해 펼쳐 보여주고 있더란 말이다. 심판도 비난도 해설도 덧붙이지 않고, 바로 ‘재즈 시대의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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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 찍어라 - 포토그래퍼 조선희의 사진강좌
조선희 글.사진 / 황금가지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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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벼르다 드디어 캐논 DSLR 카메라를 샀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주문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조선희는 워낙 유명한 사진가니까. 그녀가 해주는 사진 얘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그녀의 시선 앞에 잡힌 사진들도 궁금했다. 그리고 덤으로 조금 기술적인 얘기를 얻어들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싶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좋은 책이었다. 책의 서두에 조선희가 밝혀두었듯이 이 책은 기술적인 면보다는 사진을 찍는 개개인에게 즐거운 놀이로서의 카메라와 사진 얘기가 주를 이룬다.

‘이 책은 사진 정보나 기술만을 다룬 책이 아니라 사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카메라라는 소중한 장난감으로 재미나게, 즐겁게 놀 수 있는 방법을 쓴 책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 둔다.’

하지만 더 좋았던 건,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해줘서 고마운 책이라는 사실이다. 즉 나와 사진과의 관계를 좀 더 명확히 보게 해준 책이라는 것이다. 나도 내 나름대로 나만의 감각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난 늘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고 다녔다. 지금도 내 가방 안엔 손바닥 크기보다도 작은 후지 파인픽스 카메라가 들어있다. 꾹 눌러야 사진이 찍히는 단점을 가져 많이 흔들리지만 그래도 워낙 작고 가벼운데다 제대로만 찍히면 사진도 그럭저럭 잘 나오는 편이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도 세상의 재밌고 웃긴 모습이나 계절의 변화, 또는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의 평범한 일상의 모습도 잘 찍었다. 나도 모르게 사진 찍는 걸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로그에 밋밋한 글만 올리는 것보다는 작고 아기자기한 사진을 올리는 즐거움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작은 책치곤 칼라 사진이 워낙 많이 들어있는 터라 책값이 좀 비싼 편이지만 그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이젠 어디서나 당당하게 카메라를 꺼내들고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을 얻었으니까.    

 






(깍아놓은 사과가 시간에 의해 변질 된 모습까지. 진달래 찍음 ^^)
 
이 책엔 조선희가 생각하는 사진에 대한 얘기가 많이 들어있다. 나도 모르게 알고 있었던 사실들이 모두 들어있었다. 제목처럼 멋대로, 많이 찍다보면 자신만의 색깔이나 톤, 감각 그리고 시선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그녀의 직업으로서의 사진에 대한 생각도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함께 많이 들어있다. 그녀만이 찍을 수 있었던 멋진 풍광들, 미처 몰랐던 배우들의 다른 모습들 그리고 손금이나 스포츠 선수의 발 등등 그녀의 감각적 사진 세계는 즐겁고 독특한 덤이다.

‘외로워지자. 자꾸 더 외로워지자. 외로움의 절벽으로 나를 내몰아보면, 마음 밑바닥의 깊은 감정을 끌어내 다른 사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어딘가로 떠나야만 좋은 사진을 얻는 건 아니다. 멋진 사진의 피사체는 우리 주위에 널렸다. 하지만 나처럼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찍을 수 있는 사진은 한정되어있다. 정착하지 못하는 나의 운명 때문에 유난히 정착을 추구했지만 이젠 다시 떠나보려 한다. 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의 기본이라는 노출과 셔터스피드의 관계만 직접 사진을 찍어보며 이해한다면 사진의 세계에 한발 들여놓는 진달래가 될 것이다. 떠나는, 그 외로움은 카메라로, 그 카메라에 찍히는 사진으로 덜 외로울 거란 확신이 든다. 꽃피는 3월의 제주가 나와 내 카메라를 기다리고 있다. 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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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의 맛
조경수 외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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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봤을 때 그 아기가 떠올랐다. 과일 씨만 먹던 아기 말이다. 그러니 그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당연히 수박이었다. 수박을 반으로 갈랐을 때 엄청 나타난 씨들을 보고 그 아기가 얼마나 환한 웃음을 짓던지 그 행복한 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과일의 과육을 먹지만 과일 씨만 먹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베르타(이리스의 외할머니)는 사과의 불룩한 몸통 부분을 먼저 다 돌려 먹은 후 조심스럽게 아래 꽃받침 주위를 먹고 나서 꼭지 주위를 먹었고, 씨가 있는 속심은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버렸다. 안나(베르타의 언니인 이모할머니)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아래서부터 위로, 전부 다 먹었다. 씨는 몇 시간씩 씹어 먹었다. 베르타가 씨에는 독성이 있다고 야단하면 안나는 씨에서 마르치판 과자 맛이 난다고 대꾸할 뿐이었다. 안나는 꼭지만 뱉어냈다. 내가 자기처럼 사과를 먹는다는 걸 알았을 때 외할머니가 해준 얘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나 외할머니처럼 사과를 먹는다.’ 
 이 작품에는 사과 과육을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먹던, 또는 과일 씨까지 먹던 델바터 가의 삼대의 운명과 사랑이야기가 현실과 병행적으로 기억과 망상으로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으로 남겨준 집으로 돌아온 나, 이리스는 어릴 적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이모들과 이종사촌 로스마리 그리고 늘 함께 놀던 친구 미라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스스로 떠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어렵게 기억해내기도 한다.
'그때만 해도 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글로 쓰인 것, 인쇄된 것, 내가 읽은 것들을 믿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책을 사고 빌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읽지는 않는다. 옛날엔 읽었다. 쉬지 않고 읽었다. 침대에서, 밥을 먹으면서, 심지어 자전거를 타면서도. 하지만 그런 시절은 끝이 났다. 독서, 그것은 수집과 같고, 수집은 보존과 같고, 보존은 기억과 같으며 기억은 정확히 모르는 것과 같고, 정확히 모르는 것은 망각과 같고, 망각은 추락과 같다. 그리고 모든 추락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내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이유이다.
나는 내가 사서인 것이 좋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건 마치 어릴 적에 무지막지 책을 읽고 또 읽다가 이젠 책을 찾아내고 보기만 하는 도서관 사서인 이리스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 같기도 하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어린 시절의 순진하지만 순수하지 않은 추억들과 다들 알면서 모르는 척 숨기는 어른들의 비밀 같은 것들이 아닐까.          이리스의 외할머니의 사랑 아닌 결혼 그리고 바람 아닌 사랑, 이모할머니의 사랑 아닌 격정 그리고 둑음, 어머니와 아버지의 스케이트 장에서의 사랑과 어머니의 우울과 향수 그리고 온 몸에서 전기가 심하게 흘러 그 정전기가 기분 나쁘면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끌면서도 결말을 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잉가 이모 그리고 사랑의 열정에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했지만 결국 미혼모로 남게 된 하리에트 이모, 이모의 딸인 이종사촌 언니 로스마리의 짧은 삶, 이를 함께했던 그 친구 미라의 특별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어릴 적 ‘쪼다’였던 미라의 동생과 이리스와의 재회, 또한 끌릴 듯 멀어질 듯 이어지는 이들의 잔잔한 만남과 우정 같은 사랑 등등 이 모든 사랑과 운명 이야기들이 환상과 리얼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제임스 조이스식 기억의 탐구보다는 무겁지 않아 좋았고 마르케스식 마술적 리얼리즘보다는 명쾌하고 은근한 환상이 더 아름다웠던, 정말 특색 있는 작품이다. 하나 안타까웠던 것은 특이한 식물이나 과일, 과자 같은 게 꽤 나오는데 전혀 옮긴이의 주가 없었다는 것이다.                               
암튼 읽는 내내 풋사과 맛을 보는 것 같았고, 달콤한 사과 향이 주위를 떠도는 것 같았고, 썩은 사과를 밟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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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리 편지 (양장)
배유안 지음, 홍선주 그림 / 창비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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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3대 요소를 재미와 감동 그리고 교훈이라고 본다면 이 동화는 최고의 동화다. 더구나 어린이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함께 재밌고 즐겁게 그리고 가슴 훈훈하게 읽을 수 있는 동화다. 정말 나도 즐겁게 읽었고 주변 동료들의 아이들에게 선물하면서 점수 팍팍 따게 해주는 책이다. 아이들이 여전히 살짝 몰랐으면 좋겠는 책이다. 그래야 내가 더 여기저기 선물하면서 뿌듯해할 수 있을 테니까. 암튼 정말 고마운 책이다. ^^

하늘나라에서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을 굽어보시는 세종대왕께서도 오랜만에 아주 즐거운 미소를 짓고 계실 것 같다. 앗, 옆에 장운이도 함께 있으려나? ^^*

이야기의 배경은 조선시대이다. 장운이는 아픈 아버지와 누나와 함께 가난하게 살고 있다. 동네 분들에게 나무를 해다 드리고 먹을거리를 얻어다 간신히 끼니를 이으며 살고 있다. 아프기만 해서 미안해하는 아버지와 약값을 내지 못해 결국 종살이를 하러가게 되는 누나와도 사이좋게 지냈다. 장운이는 나름 부지런히 일을 하지만 너무 어려서 겨우 세 식구 먹고 살기도 힘들고 처지를 생각하면 자꾸 기운이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장운이는 눈알이 빨간 토끼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한글을 배운다. (물론 지금과는 많이 다른 한글이라 작가는 현대 국어로 말을 바꾸어주는 친절을 잊지 않지만 사실 옛 한글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면서 나이도 초월하고 양반, 양민도 초월하며 둘은 글을 가르치고 배우면서 친구가 된다. 둘이 서로 만나지 못해 정자 아래 흙바닥에 글씨를 써놓고 가는 모습도 정말 정겹다.

‘할아바님 장우니 기리로소이다’ (->할아버지, 장운이 기다립니다.)
‘어제는 듕 이리 이셔셔 몯 오거다’ (-> 어제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못 왔느니라.)

그렇게 장운이는 한글을 배우고 또 이를 누이와 친구들에게도 가르쳐준다. 서로 흙바닥에 써보는 장난을 하면서 즐겁게 한글을 익힌 것이다. 남들은 모르는 새로운 글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마치 서로의 비밀을 간직한 듯 즐겁고 유쾌한 것이다. 그로 인해 나중에 헤어지게 되는 누이와도 편지 연락을 하게 되고, 한글을 가르쳐준 할아버지는 민생을 위해 만든 그 글자들이 정말 쉽게 서로의 마음을 글로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야기가 단지 한글만 배우고 마는 것이라면 그저 교육동화에 그쳤겠지만 더 큰 인물이 되기 위해 목수 아저씨를 따라 돌 다듬는 일을 배우고 그 과정에 생겨나는 질투와 미움 등도 겪게 되는 등 고생스럽지만 밝게 자라는 장운이를 보여준다. 나이 많은 상수의 방해공작에도 참고, 배운 것을 열심히 적어 외우면서 잊지 않으려 하고, 이 모습을 본 동료 일꾼들에게도 한글을 가르쳐주며 함께 배우는 삶을 산다. (결국 글이 있어 우리가 오늘날 많은 것을 배우고 즐기는 것이 아닌가. 암튼 한글 만만세!!! 한 번 외쳐주고!) 즉 우연히 좋은 사람만 만나고 성공만 거두는 장운이가 아니라 남들처럼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모든 일에 열심이고 남을 배려하면서 가족을 사랑하는 장운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약재영감의 은근한 차별 아래 장운이와 친구로 지내는 착한 난이, 장운이 누이인 덕이를 사모하는 순진남 오복이의 이야기도 은근한 즐거움을 더한다. 정말 이렇게 좋은 책, 나만 알고 있고 싶다. ^^;;

그럼 토끼 눈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이들의 우정은? (난 안 가르쳐줄 테니 궁금하면 책을 보든가... ^^;;)     

 
(부산 책모임에서 만난 작가가 새 책을 설명하고 계신다. ^^;; 멋진 배유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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