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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의 맛
조경수 외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그 아기가 떠올랐다. 과일 씨만 먹던 아기 말이다. 그러니 그 아기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당연히 수박이었다. 수박을 반으로 갈랐을 때 엄청 나타난 씨들을 보고 그 아기가 얼마나 환한 웃음을 짓던지 그 행복한 모습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그렇다. 보통 사람들은 과일의 과육을 먹지만 과일 씨만 먹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베르타(이리스의 외할머니)는 사과의 불룩한 몸통 부분을 먼저 다 돌려 먹은 후 조심스럽게 아래 꽃받침 주위를 먹고 나서 꼭지 주위를 먹었고, 씨가 있는 속심은 높이 포물선을 그리며 던져버렸다. 안나(베르타의 언니인 이모할머니)는 천천히 음미하면서 아래서부터 위로, 전부 다 먹었다. 씨는 몇 시간씩 씹어 먹었다. 베르타가 씨에는 독성이 있다고 야단하면 안나는 씨에서 마르치판 과자 맛이 난다고 대꾸할 뿐이었다. 안나는 꼭지만 뱉어냈다. 내가 자기처럼 사과를 먹는다는 걸 알았을 때 외할머니가 해준 얘기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나 외할머니처럼 사과를 먹는다.’
이 작품에는 사과 과육을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먹던, 또는 과일 씨까지 먹던 델바터 가의 삼대의 운명과 사랑이야기가 현실과 병행적으로 기억과 망상으로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유산으로 남겨준 집으로 돌아온 나, 이리스는 어릴 적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이모들과 이종사촌 로스마리 그리고 늘 함께 놀던 친구 미라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스스로 떠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어렵게 기억해내기도 한다.
'그때만 해도 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글로 쓰인 것, 인쇄된 것, 내가 읽은 것들을 믿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책을 사고 빌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읽지는 않는다. 옛날엔 읽었다. 쉬지 않고 읽었다. 침대에서, 밥을 먹으면서, 심지어 자전거를 타면서도. 하지만 그런 시절은 끝이 났다. 독서, 그것은 수집과 같고, 수집은 보존과 같고, 보존은 기억과 같으며 기억은 정확히 모르는 것과 같고, 정확히 모르는 것은 망각과 같고, 망각은 추락과 같다. 그리고 모든 추락에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내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이유이다.
나는 내가 사서인 것이 좋다.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건 마치 어릴 적에 무지막지 책을 읽고 또 읽다가 이젠 책을 찾아내고 보기만 하는 도서관 사서인 이리스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 같기도 하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건 어린 시절의 순진하지만 순수하지 않은 추억들과 다들 알면서 모르는 척 숨기는 어른들의 비밀 같은 것들이 아닐까. 이리스의 외할머니의 사랑 아닌 결혼 그리고 바람 아닌 사랑, 이모할머니의 사랑 아닌 격정 그리고 둑음, 어머니와 아버지의 스케이트 장에서의 사랑과 어머니의 우울과 향수 그리고 온 몸에서 전기가 심하게 흘러 그 정전기가 기분 나쁘면서도 화들짝 놀라게 하는 성질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끌면서도 결말을 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는 잉가 이모 그리고 사랑의 열정에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했지만 결국 미혼모로 남게 된 하리에트 이모, 이모의 딸인 이종사촌 언니 로스마리의 짧은 삶, 이를 함께했던 그 친구 미라의 특별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어릴 적 ‘쪼다’였던 미라의 동생과 이리스와의 재회, 또한 끌릴 듯 멀어질 듯 이어지는 이들의 잔잔한 만남과 우정 같은 사랑 등등 이 모든 사랑과 운명 이야기들이 환상과 리얼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제임스 조이스식 기억의 탐구보다는 무겁지 않아 좋았고 마르케스식 마술적 리얼리즘보다는 명쾌하고 은근한 환상이 더 아름다웠던, 정말 특색 있는 작품이다. 하나 안타까웠던 것은 특이한 식물이나 과일, 과자 같은 게 꽤 나오는데 전혀 옮긴이의 주가 없었다는 것이다.
암튼 읽는 내내 풋사과 맛을 보는 것 같았고, 달콤한 사과 향이 주위를 떠도는 것 같았고, 썩은 사과를 밟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